몽골인의 공화(6)
“범 알타이 인민동맹이 주도하는 신정부에 참여했을 경우, 그에 따른 손익은 무엇인가.”
“이익에 대해 말하자면, 확실히 현 칸발리크 정부에서 누린 것보다는 많은 지분을 확보할 수 있을 겁니다.
어쨌든 칸발리크 정부는 카라코룸 신정부를 인정하지 않을 테고, 고려, 키타이, 낭키아스는 칸발리크 정부를 지지하겠죠.
내전으로 나아가든 타협을 보든 큰 싸움 한판은 벌여야 할 텐데, 이기려면 ‘친구’가 많이 필요하니 우리의 도움도 절실하지 않겠습니까.”
누군가 범 알타이 인민동맹의 고민을 정확히 꿰뚫어 본다.
“그렇지만 그런 이익은 현 정부와 협력하는 방향으로도 얻을 수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신정부 대신 그들을 선택해주면, 그들도 그 대가로 우리의 정권 참여를 인정해주거나, 노동자 단체의 활동 폭을 좀 더 넓혀주지 않을까요?”
“그건 칸발리크의 현 정부가 얼마나 우리의 도움이 절실한가에 따라 다르겠죠. 카라코룸 신정부는 우리 도움에 목말라 있지만, 글쎄요…… 현 정부는 ‘당신들 도움이 없어도 충분히 처리할 수 있다’고 나오진 않을지…….”
“외국의 협력도 얻어낼 수 있을 테니 말이죠.”
그 말대로 현 정부는 고려, 키타이, 낭키아스 중 최소한 한 나라에서 협력을 구할 수 있다.
협력을 구하는 방법은 실로 간단하다. 세 카간 후보 중 하나를 고르기만 하면 된다.
“그렇다면 카라코룸 신정부와 손을 잡는 게 정답인가…….”
“범 알타이 인민동맹과의 차이점보다는 공통점에 주목하며 우호를 다져나간다면, 충분히 가능한 동맹이기는 합니다. 어쨌든 저들과 우리 모두, 군주정이 인민을 억압한다는 점에는 동의하니까요.”
“혹시 말입니다, 칸발리크 정부가 외세와 손을 잡는다면 ‘몽골의 자주성을 위협한다’는 문제를 걸고넘어질 수는 없겠습니까? 충분히 명분으로 활용할 수 있을 법한데요.”
“그게 좀 애매합니다. 고려야 그렇다 치더라도 키타이나 낭키아스가 과연 ‘외세’인가는 생각해 볼 문제거든요.”
“국제법으로야 독립국 취급이지만, 키타이와 낭키아스의 지위는 모호하죠. 게레센제와 울제이, 두 칸은 몽골에서는 식민지 총독이나 속방의 왕, 정도로 대우받고 있으니까요. 황족이기도 하고.”
본국 황족이기도 한 식민지 총독, 혹은 속국의 왕이 본국으로 돌아와 황위를 계승한다. 전혀 문제 될 것 없는 이야기다.
오히려 유럽인들에게 이런 상황이 더 익숙하겠지. 예를 들면 아프리카 쪽 식민지 총독으로 경력을 쌓는 브리튼의 왕족이라든가, 이탈리아나 게르마니아 쪽 왕으로 경력을 쌓는 신성 제국 황태자라든가.
“외세가 몽골 정치에 간섭한다, 자주성을 위협한다, 그런 구호를 내세우면 동조하는 인민보다는 어리둥절할 인민들이 훨씬 많을 겁니다.”
“명분으로 활용하긴 어렵겠군요.”
“뭐, 범 알타이 인민동맹이 내세우는 ‘몽골인 제일주의’에 영합해서, 고려는 고려인의 나라, 키타이와 낭키아스는 한족의 나라라는 식으로 강조하면 써먹을 수 없는 건 아니겠습니다만……”
신정부 참여 여부를 논의하는 중에도, 어떻게 ‘주도권’을 차지할 것인가, 하는 계책은 그치지 않는다.
그들 모두가 이상을 향한 꿈을 멈출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이상’에 근거해서, 누군가 앞서 나온 의견을 비판한다.
“그래서야 우리가 민족을 초월한 ‘세계혁명’을 꿈꾼다고 할 수나 있겠습니까. 사상적 퇴보라는 비판을 면하기 어려울 겁니다.”
세계혁명.
사회주의자를 자처한 모두의 꿈이다.
동시에 꿈의 ‘현실적 구현 모델’이기도 하다.
예를 들자면 이렇다.
‘어떤 나라’에서 혁명이 성공했다고 가정해보자.
주변국은 그 나라에서 혁명이 전파되어 자기네 체제가 무너지는 걸 꺼릴 것이다.
당연히 ‘어떤 나라’의 기존 집권층을 지원, 혁명을 무너뜨리려 시도한다.
이때 ‘어떤 나라’가 농업이 발달한 대신, 중공업이 뒤떨어지는 나라라고 가정해보자.
혁명을 수호할 군인들을 먹일 식량은 충분하다. 그러나 타국의 강력한 군대를 이길 무기가 제대로 생산되지 않는다.
무역 봉쇄 등의 조치가 겹친다면 이런 사정은 더욱 악화된다.
반대로 ‘어떤 나라’가 중공업이 발달하고, 농업은 뒤떨어졌다고 해보자.
마찬가지로 무기 공급은 어느 정도 되지만 식량이 부족해서 혁명이 무너지는 사태가 일어난다.
필요한 모든 물자를 자급자족할 수 있는 나라는 거의 없다. 따라서 혁명은 세계 여러 나라에서, 동시에 일어나야 한다.
그래야 혁명의 동지가 되는 나라들끼리 서로 도우며, 혁명을 분쇄하려는 시도에 맞설 수 있다.
그것이 ‘세계혁명’이다.
그러나 여러 나라에서 동시에 일어난 혁명이, 손발을 척척 맞춰 진행되리라는 보장은 없다.
보통은 각자 앞가림하기에도 벅차기 때문이다.
페르시아나 버마 방면으로 열심히 혁명을 전파하던 바라트도, 최근엔 주춤하는 낌새고.
그래서 대두된 것이 이른바 ‘일국 사회주의’다.
세계혁명보다는 한 국가의 사회주의를 먼저 달성하자는 노선을 말한다.
동시다발적 세계혁명이 좌절된다고 해서 혁명 국가의 붕괴만 바라보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
혁명을 어느 정도 안정 궤도에 올려놓은 나라 하나라도 ‘자급자족’이 가능하도록 개조해야 한다.
농업이 발달했다면 중공업 국가로 개조하고, 중공업 국가라면 식량 증산을 계획한다.
그러나 일국 사회주의도 어디까지나 미래의 ‘세계혁명’을 향한 임시방편, 이 보 전진을 위한 일 보 후퇴일 뿐이다.
궁극적 목표는 어디까지나 전 세계의 사회주의 혁명이다. 이걸 양보할 수는 없다.
“하지만 여러분, 잘 생각해봅시다. 모든 가능성을 낙관적으로 보고 결국 카라코룸 신정부의 혁명이 성공하고 군주정이 폐지되며, 몽골이 신생 공화국으로 거듭난다고 가정해봅시다.
단순히 혁명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은 우리의 목표가 아닙니다. 혁명은 궁극적 자유와 평등을 달성하기 위한 과정이자 수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혁명 ‘이후’도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비단 이들 뿐만이 아니라, 모든 정치가들의 고민이다. 권력은 손에 넣었다. 그렇다면 이 권력을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그걸 가지고 어떤 나라를 만들 셈이지?
“먼저 토사구팽, 즉 범 알타이 인민동맹에 이용만 당하고 버려질 위험성을 생각해봐야 합니다.
자본가들의 혁명이 늘 그런 식 아닙니까? 앞장서서 곤봉에 맞아주고, 총알을 받아주고, 그건 인민의 몫이지만, 막상 혁명이 완수되면 인민에게 돌아가는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자본가들이 ‘새로운 귀족’으로 자리매김할 뿐이죠.”
“범 알타이 인민동맹에 협력한다 해도, 혁명 중에 우리의 입지를 탄탄히 다져놓아야 한다는 거군요.”
“예. 뭐 그렇게 해서 어찌어찌 신정부 안에서 입지를 굳힌다 해도, 문제는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범 알타이 인민동맹, 여기서 ‘범 알타이’라는 말에 주목해봅시다. 이게 무슨 뜻인지는 다들 아시지요? ‘알타이 민족’이라는 개념 아래 몽골 민족과 인척 관계에 있는 모든 민족을 병합한다는 뜻 아닙니까.”
“팽창주의적 정부로 폭주할 가능성…… 을 염려해야 한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죠. 고려도 합병한다, 키타이, 낭키아스도 병합한다, 알티샤흐르, 티베트, 탕구트, 대예, 보우슈엥 모두 예외는 아니다…… 그렇게 해서 옛 다이온의 강역을 수복할 때까지!
뭐 이런 구호를 내세우면서 새로운 세계대전을 시작한다고 하면, 그런 정권과 함께할 수 있겠습니까?”
다들 이웃 나라 고려에서, 작년에 일어났던 일을 떠올린다.
내전에서 패배해 죽은 허동주도 그런 정복을 꿈꿨었다지. 미리안 태사는 도저히 그걸 묵과할 수 없어서 내전이라는 비극을 감수했고.
“범 알타이 인민동맹과의 제휴는, 침몰이 예정된 배에 동승하는것과 같습니다. 그런 위험성을 감당할 수는 없습니다. 차라리 기존 정부를 지지하는 게 낫지.”
“카라코룸 신정부에 가담하는 이익과 손해에 대해 할 이야기는 모두 나온 것 같군요.”
자리에 앉아 있던 사회주의, 혹은 공산주의자를 자처하는 지식인들, 운동가들은 조용해졌다.
회의의 진행을 맡은 나이 지긋한 혁명가가 헛기침을 몇 번 하곤 말을 꺼냈다.
“자, 자, 그럼 두 번째로, 우리만의 ‘단독 혁명’을 시작했을 때의 손익에 대해 이야기해봅시다. 어떤 점들을 생각해야 할지?”
***
당대회까지 참석하는 간부들은, 여기 이 사람들을 ‘혁명의 최전선’이라 부른다.
“최전선, 최전선! 개뼉다귀 같은 소리지! 나가서 일해라! 경찰서나 교도소에 드나드는 당신들이 자랑스럽다! 하지만 당대회에 참여하는 건 안 돼! 당을 지도하는 건 이론 무장이 철저한 지식인들의 몫이거든!”
사내는 그렇게 코웃음 치며 술을 들이켰다. 사내는 본명 대신 ‘깡패’라는 별명으로 자신을 소개했다.
깡패 앞에 앉아서 그 말에 적당히 맞장구를 쳐 주는 남자도 자신을 ‘무당’이라고만 소개했다.
‘깡패’는 푸념을 이어나갔다.
“노동자의 나라를 만들겠다면서 노동자들의 당대회 참여는 안된다니, 이런 개잡소리가 있나. 안 그렇소, ‘무당’ 동무?”
‘무당’이 쓴웃음을 흘리자 깡패도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뭐 불평이야 이쯤 해두고, 일은 해야지. 실적을 올려야 노동자들이 직접 참여하는 당을 만들든 뭘 하든 할 테니까. 그래, 이번 지령은 뭐요?”
무당과 깡패는 오늘 처음 만나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전에도 몇 번인가 만나서 지령을 주고받았다.
이 관계는 일방적인 게 아니라, 깡패 쪽에서 무당에게 지령을 전할 때도 있었다.
명령 계통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 정치경찰이 파악하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였다.
무당은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어조로 지령을 전달했다.
“두 가지요. 서쪽 변경 도시, 알말릭으로 가서 거기 동지들 조직화 정도를 점검하시오. 언제라도 당 중앙위원회의 명령이 내려오면 ‘봉기’를 시작할 수 있도록.”
깡패의 눈이 가늘어진다. 목소리를 낮추고, 아까까지 없던 조심스러운 어조로 되묻는다.
“카라코룸에선 범 알타이인지 뭐시기인지가 혁명을 시작했다던데, 우리도 혁명…… 하는 겁니까?”
“아직 최종 결정이 내려진 건 아니오. 하지만 우리 당만의 ‘단독 혁명’을 당원들 모두가 염두에 두고는 있을 것. 그게 중앙위원회의 방침이오.”
“아니 할지 안 할지 결정도 안 됐는데 긴장만 하고 있으라니 원. 그러다 성급한 애들이 사고라도 치면 지역 조직 하나 날아가는 건 순식간이라는 걸 모른답니까, 중앙위는?”
“동무가 염려하는 바를 모르는 건 아니오. 솔직히 나도 같은 심정이지. 하지만 나라가 칸발리크와 카라코룸으로 두 쪽이 났소. 충분히 준비하는 것 말고는 별수가 없지 않소.”
깡패는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긁적이고는 물었다.
“두 번째 지령은 뭡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