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리고 소녀는 대원수가 되었다-179화 (178/541)

몽골인의 공화(4)

볼로드에게 루우의 성별은 조금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로지 루우가 카간 자리에 대한 야심이 있고, 고려의 황위 계승권이 있다는 점만 중요했다.

그런 그녀는 볼로드가 꿈꾸는 ‘다이온’의 이상을 보다 폭넓게 실현시켜 줄 존재다.

그렇기에 볼로드는 루우가 칸발리크 황궁을 떠날 수 있도록 배려했고,

안세규가 그녀를 데려갈 수 있도록 주선했고,

고려국민당을 지원하며, 루우가 고려 황제가 될 때까지 온 신경을 기울였다.

-몽골과 고려가 하나가 된다면 대세는 정해진다.

제아무리 키타이와 낭키아스가 발버둥 쳐도, 고려와 몽골의 산업력은 당해낼 수가 없다. 세계 대전 이후 몽골과 고려는 두 나라의 국력을 어느 정도는 의도적으로 억눌러왔기 때문이다.

그런 통합을 몽골이 주도하든, 고려가 주도하든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다이온’이라는 강국이 들어서는 것, 그 자체가 중요했다.

그러니까 볼로드는 ‘민족’보다는 ‘국가’라는 단위를 훨씬 중시하는 입장이라고 볼 수 있다.

국가를 초월한 ‘민족’을 중시하는 범 알타이 인민동맹이나, 허동주의 관점에서 본다면 상당히 독특한 사상가라고 할 수 있다.

여하튼 그의 이러한 사상과 구상에 충실히 따른다면, 볼로드는 게레센제나 울제이 따위는 코웃음 한 번으로 무시해버리고, 루우를 카간으로 추대하는 게 맞다.

지금도 솔직히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루우의 말 한마디만 떨어지면 볼로드는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몽골 행정부가 루우를 지지하게 만들 것이다.

그러나 상황이 그렇게 되도록 도와주질 않는다.

칸발리크 상공에 떠 있는 붉은 존재와,

아직도 출현하는 ‘파멸인’이.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게레센제의 말을 전하고, 루우의 표정을 살핀다.

자, 시레문의 따님.

용의 이름을 지닌 분.

어떤 답을 내놓으시겠습니까.

***

견하가 다시 한번 돌아본 루우는, 여전히 답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었다.

막바지에 이런 망설임이라니.

안타깝기도 하지만, 기껏 리안의 의견에 반대하여 칸발리크로 온 보람이 없어서 아쉽기도 하다.

그렇다고 루우의 입만 바라보고 있을 순 없는 노릇이니, 견하는 머리를 굴려본다.

어떻게 대처하는 게 좋을까.

루우의 흔들리는 마음, 아마도 일시적이겠지만 쇠약해진 정신…… 이런 걸 볼로드에게 설명할 순 없다.

다른 핑계가 필요하다.

문득.

견하는 리안이 했던 말을 떠올린다.

태사 자리에서 잠깐 물러났다가 언제든지 다음, 혹은 다다음 태사로 돌아오면 된다고.

아직 젊다 못해 어리기 때문에, 시간은 자신의 편이라고.

루우는, 그런 리안보다 더 어린 소녀다. 아직 10대에 불과하다.

“카간 자리까지 직진은 어렵겠지.”

루우는 그렇게 고려어로 말하는 견하의 얼굴을 바라본다.

“당장 카간이 되는 데에는 여러모로 부담이 따를 거야. 그러니 조금 돌아가자고. 한동안은 몽골 내에서 고려와 황제의 영향력을 증대시키는 방향으로 가자. 황제는 아직 어리니까, 게레센제 칸이나 울제이 칸에 비하면 시간이 많아. 기회는 또 오겠지. 그동안은…… 마음을 추스르자.”

그렇게 말하며 미소 지어주는 소년을 보면서, 루우는 조금, 마음을 놓았다.

견하가 효율과 합리만 추구하는 괴물이 아닌 점에도 안도했고,

누군가가 자신에게 시간을 벌어준다는 사실에도 안심했다.

그러면서, 조금 놀랍기도 했다.

-나랑 비슷한 사고에 도달할 수 있구나.

직진할 필요는 없다. 조금 돌아가면 된다.

어떻게 이렇게 비슷한 생각을 할 수 있는지 조금 신기……

……신기한가?

루우는 견하와, 볼로드를 번갈아 바라본다.

견하는 우연히 루우와 비슷한 생각을 하게 된 건가? 아니면 그런 생각에 도달하게 된 필연적 이유가 있을까?

알아봐야…… 겠다.

그래도 일단, 루우는 미소로 마주 답해주었다.

“알았어. 나도 그게 좋을 거라고 생각해.”

물론 자신의 남은 수명이 얼마나 되는지 짐작할 수 없는 루우 같은 처지에선, 일종의 도박이나 다름없는 결정이다.

그러나 자신도 다른 평범한 10대 소녀들과 다르지 않을 거라고 가정하고, 카간 자리를 향해 나아가는 전략을 짠다.

죽기 전에 카간이 되고 싶다는 생각도 들고, 그 때문에 초조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기분대로라면 앞으로의 일이 어떻게 되든, 우격다짐으로 카간의 자리를 계승하고 싶다고도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그러지 않겠다.

내일 죽을 사람처럼 막무가내로 살지 않고, 언제까지고 삶이 지속하리라 믿는, 그렇기에 미래를 바라보는 사람으로 살겠다.

이는 삶에 희망을 품는 행위이자, 동시에, 루우가 삶의 품격을 지켜나가는 방식이기도 했다.

그녀의 미소를 본 후 견하는 볼로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럼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해보죠. 게레센제의 제안, 받아들이지 않을 수는 없을 거예요. 칸발리크의 상황이 이러니까. 카라코룸에서 일어난 소요를 생각하면 더 여유를 부리기도 힘들고요.”

그러니 일단은 게레센제를 이용합시다. 그게 견하의 의견이었다.

“게레센제가 즉위한다고 해서 그 자리가 영원히 갈 것도 아니고, 우리 황제 폐하의 협력이 없으면 유지하기도 벅찰 황위가 될 것은 자명한 노릇입니다.”

견하의 말대로, 칸발리크의 정계와 쿠릴타이가 게레센제를 인정한다면, 그건 ‘루우가 지지하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카간 자리를 주되, 실권의 상당 부분은 우리 황제 폐하가 가져오는 쪽으로, 조건을 내밉시다.”

이를테면 고려군의 몽골 주둔, 그리고 시레문은 허락하지 않으려 했던, 고려 기업의 무제한적 몽골 진출.

고려가 몽골의 경제와 군, 모두를 장악한다.

“칸발리크와 카라코룸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고려군이 몽골군의 작전지휘권까지 가져올 수 있으면 더 좋겠죠.”

이는 몽골군과 고려군을 하나의 군대로 통합하는 발판이 될 것이다.

“거기에 더해 황제께서 언제든 몽골 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하실 수 있도록, 역시 제한 없이 몽골에 출입국 하실 수 있고, 얼마든지 머물고 싶은 곳에 머무실 수 있도록 하는 권한도.”

볼로드는 끄덕인다. 지금 이 소년, 고려의 감찰국 국장 주견하의 구상에는 동의한다.

그런 식으로 차근차근, 내정이나 외교권도 고려가 접수한 뒤, 최종적으로 게레센제를 몰아내고 루우가 모든 영토를 통합한 다이온의 군주가 된다.

얼마나 원대한 구상인가.

얼마나 장엄한 구상인가.

볼로드는 이 주견하라는 소년이 마음에 들었다. 같이 일해볼 만하다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좋은 말씀입니다만, 게레센제 칸도 그 정도는 계산하고 있을 겁니다.”

즉, 일단 굽히고 들어와서 카간 자리를 얻어내되, 계속해서 반격의 칼날을 갈아댈 것이라는 말이다.

“게레센제 칸은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도 나름 최선을 다해 자신의 카간 자리를 지켜내고, 그 자손에게 물려주려 할 것입니다. 지금 고려 황제 폐하의 사촌 형제들에 해당하는 사람들도…… 가만히 있지는 않을 테지요.”

상대는 허수아비가 아니다. 이건 지푸라기를 상대로 한 검술 연습이 아니다. 살아 움직이는 사람을 상대로 한 실전이다.

어떻게 할 텐가.

주견하 당신은, 그에 대한 대책도 생각해뒀는가.

견하의 얼굴에 비릿한 미소가 떠오른다.

“우리한텐 써먹을 수 있는 패가 하나 더 있죠.”

호오.

그렇게까지 생각할 수 있는 건가.

“울제이 칸.”

지금은 게레센제와 협력하고 있지만, 언제든지 경쟁 관계로 되돌아갈 수 있는, 삼형제의 막내.

루우가 손을 내민다면 울제이는 얼마든지 그 손을 잡을 것이다.

“게레센제 칸을 칸발리크로 불러들이고 나서, 울제이 칸에게도 제안을 해보죠. 같은 조건으로, 카간 자리에 도전해보지 않겠냐고.”

마치 카간 자리를 시장 물건인 양 흥정하는 것 같지만, 원래 정치적 협상이란 그런 법이다.

둘 사이에서 루우의 몸값을 최대한 불려 둬야 한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일단, 게레센제에게 폐하의 제안을 전하고, 쿠릴타이 소집 준비를 하겠습니다. 동시에 고려 외무성에도, 고려군의 국경 통과가 허용되었다는 연락을 해두겠습니다.”

볼로드는 만족스러운 기분으로 대답하고 물러났다.

***

“이단 병력, 지휘해 본 적 있나?”

리안은 배영훈 소령과 나란히 걸으며 그렇게 물었다. 아니, 배영훈은 지금 막 중령으로 진급한 참이다.

리안이 지금부터 맡길 일을 해야 하기에.

“이단 몇 명이 포함된 병력을 지휘해 본 적은 있습니다만, 이단만으로 구성된 부대는 아직…….”

“음, 뭐 그 정도면 됐어. 사실 지금 맡길 일은 허동주 말고는 경험해 본 사람도 거의 없을 거야. 지휘 경험보다는 ‘믿을 수 있는가’에 따라 결정한 거니까, 너무 부담 갖지는 말도록.”

“예.”

두 사람이 걷고 있는 장소는, 거대한 격납고 안이다.

이 안에는 이단들이 도열해 있고, 각 이단마다 뒤에 ‘기갑사’ 한 기가 배치되어 있다.

“태사 직속의 기갑사 부대. 이번에 새로 만들어 봤지. 시험 삼아서 칸발리크 사태에 투입할 거야. 중령한테는 지휘소로도 쓸 수 있는 장갑차 몇 대 함께 내줄 테니까, 칸발리크로 가서 황제 폐하의 안전을 확보하도록.”

“알겠습니다. 작전 개시는 언제쯤?”

“뭐 여러 가지 준비하고 싶겠지만, 미안해. 지금 즉시야. 몽골 정부가 고려군의 국경 통과를 승인했거든. 방금 외무성에서 보고가 올라왔어.”

그 말은, 조유관이 지휘하는 서부군이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말.

조유관이 얼마나 ‘공’을 세우는 데 혈안이 되어 있는지는, 배영훈도 전쟁성에서 나오는 소문들을 주워들어서 알고 있다.

조유관이 몽골로 가면 사태는 복잡해진다. 조유관은 몽골의 혼란을 최대한 이용할 생각일 테니까.

“제국최고회의에서는 전시가 아닐 때 고려군의 외국 주둔 기간을 제한하는 법을 올릴 거야. 그렇게 하면 조유관의 움직임에 어느 정도 부담을 줄 수는 있겠지만…… 중령도 알다시피 완전 통제는 어렵겠지.”

군은 조심스럽게 다뤄야 한다. 만약 조유관이 어디 한 번 죽을 때까지 붙어보자, 이런 식으로 나오면 또 내전이 시작된다.

미리안은 그러고 싶진 않은 것이다.

그래서 지난번 숙군도, ‘그렇게까지는 되지 않을 선’에서 마무리 지은 거고.

“알겠습니다. 그러면…… 제가 칸발리크에 가서 구체적으로 무슨 일을 하면 되겠습니까.”

“거기 도착하면, 일단 주견하 국장을 만나서 내 뜻을 전해. 폐하를 모시고, 중령과 함께 얌전히 귀국해. 그게 이번 작전의 목표야.”

중령은 침을 꿀꺽 삼켰다. 대원수의 위압감도 무섭긴 하지만, 주견하 대령 앞에서 그런 말을 늘어놓아야 한다는 것도 만만치 않게 무섭다.

그런 배영훈의 얼굴을 보곤, 리안은 겸연쩍은 듯 웃었다.

“계속 미안하다는 말밖에 할 수가 없군. 엄청난 부담이 될 거라는 건 알아. 하지만 주 국장에게 분명한 ‘태사의 명령’을 담아 보낼 사람은, 배 중령 말고는 적임자가 없었어.”

배영훈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든, 누구에게도 밉보이지 않을 방법을 생각해보자.

그리고 칸발리크에 갔다가 역으로 주견하 국장의 계략에 휘말리지 않도록, 정신 똑바로 차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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