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인의 공화(3)
겨우, 혼자 생각할 시간을 얻었다.
루우는 지금, 어렸을 때부터 고려로 떠나기 직전까지 머물던 방에 있었다.
그 방 한가운데에 서서, 루우는 방 안에 놓인 가구와 물건들을 둘러본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각오를 했기에, 고려로 가져간 물건은 거의 없었다. 그랬던 물건들이, 마치 어제 떠났다 돌아온 것처럼 그대로 놓여 있다.
아버지.
무엇 때문에 제가 쓰던 물건들을 그대로 두셨습니까.
일이 잘 안 풀리면 언제든 집으로 돌아오라는 건가요? 그러길 바라셨던 건가요? 이게 당신의 부성애를 표현하는 방식이었습니까?
나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제는 여쭤볼 수도 없게 됐군요.
먹먹하지만…… 당신은 내 마음속에 영원히 이해할 수 없는 사람으로 남았습니다.
그리고 어머니.
루우의 머릿속에 어머니는 늘 의료기기에 묶여 있던 사람이었다.
따뜻한 말 한마디나 눈길은, 거의 기억에 없다.
기억마저도 어디서 ‘어머니’라는 존재에 대해 듣거나 읽은 걸 멋대로 조합해 만들어낸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나는, 아버지도 어머니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됐다.
-이런 인간이 제대로 된 황제로 치세를 보낼 수 있을까.
그렇게 생각하자 문득, 주변이 서늘해진 것 같았다.
더운 여름이라 드러낸 팔 위로 소름이 돋았다.
루우는 양손으로 팔을 쓸면서, 방 안을 불안하게 둘러보다, 간신히 한마디 중얼거렸다.
“……추워.”
***
루우는 자신의 옛 방을 나와, 견하가 머무는 다른 방으로 들어왔다. 견하는 막 칸발리크에 도착했다고 들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얼굴을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견하는 소파 앉아서 대기하고 있었는지, 루우를 보고 일어섰다.
“폐하, 상심이 크시겠습니다.”
간략한 조의.
그뿐이다. 견하는 그 외에 다른 애도의 표현은 하지 않았다.
대신 단도직입적으로, 해야 할 말을 꺼낸다.
“황제, 카간 자리를 계승해.”
루우의 눈이 커졌다.
“나는 견하 네가 태사와 의견을 같이할 줄 알았는데.”
태사가 내심 루우의 몽골 황위 계승을 반대한다면…… 견하도 그 의견을 따를 거라고만 생각했었다. 뭐지? 태사의 의견이 바뀐 건가?
“리안 누나와 의견이 늘 같을 수는 없는 법이니까.”
리안은 리안 나름대로 최선의 답을 찾는다. 견하도 견하 나름대로 최선의 답을 찾는다. 그러나 두 사람이 각자 생각하는 ‘최선’은 다르다.
리안은 정치가로서 자신의 이상, 그리고 자신이 만들어나갈 고려 제3제국의 최선을 찾지만,
견하는 리안 개인이 취할 수 있는 최선을 찾는다.
“나는……”
뭐라고 대답해야 하지.
목이 막힌 듯이, 대답이 나오지 않는다.
이상하다.
지금까지 그토록 바라왔던 몽골 카간의 자리인데, 그게 지금 손만 뻗으면 닿을 곳에 있는데, 왜 ‘계승하겠다’는 말이 선뜻 나오지 않는 걸까.
“……망설이는 건가?”
견하가 의아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루우, 이보다 더 좋은 기회는 없어. 아버지를 잃은 슬픔은 이해하지만, 카간의 자리는 공석이고, 칸발리크에는 다른 누구도 아닌 네가 있지.”
그렇다. 게레센제 숙부도 아니고, 울제이 숙부도 아닌, 보르지긴 루우 테무르, 왕서라, 자신이 이 도시에 있다.
정부 요인 상당수도 살아남아 여전히 이 도시에 머무른다. 비행선 폭발 이후 새너두로 나가는 게 여의치 않아졌으니까.
그들을 장악하는 건 일도 아닐 터.
도시의 민심도 루우 쪽으로 많이 기울었다.
특히 루우의 활약을 곁에서 지켜본 군인들이나 경찰들은, 루우를 지지한다.
정부 장악, 군과 민중의 지지 확보.
“쿠릴타이, 소집해. 그러면 그걸로 끝날 거야.”
쿠릴타이…… 몽골의 귀족들이 카간의 추대 등 중요한 일들을 의논할 때 열리는 회의. 지금은 의회 비슷한 것으로 바뀌었지만.
“쿠릴타이에서 결정하고, 몽골 정부와 시민들, 군이 지지하지. 그리고 우리 감찰국도 네가 몽골 카간이 되는 걸 전폭 지원할 거야. 상황이 거기까지 흘러가면 제국최고회의든, 태사부든, 외무성이든 법무성이든 승인 못하겠다고 뻗대는 것도 한계가 있어.”
루우는 견하의 말을 잠자코 듣기만 한다.
그런 루우의 모습을 보다 견하는 덧붙인다.
“리안 누나는 너를 고려 정치권에서 떨어뜨려 놓으려고 여기 보낸 거야. 네가 고려의 여론을 ‘몽골 통합’ 쪽으로 움직이지 못하게 하려고.”
그제야 루우는 멍하니 대답했다.
“……나도 알아.”
아니까 그렇게 했다. 고려 내에서 미리안과 안세규, 두 사람과 정면충돌을 빚지 않으면서, 자신의 야망을 달성하려면 일단 밖으로 나와야 했다. 그리고 상황에 변화를 줘야 했다.
“안다면, 이제 와서 뭘 망설이는 거야? 너는 여기서 민심을 얻고, 고려군의 개입을 유도했어. 곧 조유관이든 누구든 움직여. ‘생각해보니까 별로 카간이 되고 싶지 않네요. 다들 돌아가 주세요.’ 이렇게 말할 셈이야?”
답답함에 견하의 말이 빠르고 거칠어진다. 하지만 루우는 그런 태도는 지적하지 않았다.
소파에 털썩 주저앉아, 큰 눈을 들어 견하를 올려다본다.
견하는 그런 눈을…… 전에도 한 번 본 적이 있다.
루우가 아니라 리안에게서.
그날…… 처음 입맞춤을 했던 날.
“네가 나에게 협력하는 건, 나를 위해서야?”
루우는 엉망이 된 기분을 담아, 자신도 뭐라고 하는지 모를 질문을 견하에게 던지고 있다.
이제야 알 것 같다.
이 기분은 견하도 잘 알고 있다.
작년, 4월, 암살자들의 손에 부모님을 잃은 날.
견하의 마음속 ‘인간성’의 일부가 조각나 흩어졌다.
마찬가지로 지금 루우도, 어딘가가 부서진 듯한 기분일 테지.
약하다고 탓할 순 없다.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걸 미친 듯이 일과 공부와 권력에 매달리는 방식으로 승화시켜,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은 자신이…… 오히려 이상한 사람이다.
“아니지. 결국은 리안을 위해서잖아.”
루우는 리안을, 고려어로 태사라고도, 몽골어로 타이시라고도 부르지 않았다.
이름을 그대로, 불렀다.
왜일까. 거기에 중대한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루우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린다. 견하는 시선을 내렸다.
팔걸이에 여유롭게 올려둔 손도, 떨리고 있다.
야망을 향해 한 걸음만 남겨둔 사람이, 망설이며 떨고 있다.
-피비린내 나는 투쟁, 그런 인생 경험이 다른 사람들보다 강하게 그녀를 키워냈을지는 몰라도, 루우는 어디까지나 소녀다.
그리고 그 소녀는 얼마 전에 고아가 됐다.
아버지의 카간 자리를 계승한다는 건, 아버지와의 감정 문제를 처리하는 과정을 수반한다.
감정 문제의 처리는…… 이렇다, 저렇다, 딱 잘라서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런 게 가능한 인간이야말로 비정상이겠지.
-마치, 나처럼.
새삼, 루우의 어깨가 가녀리게 보였다.
만약 리안과 사귀지 않았더라면, 끌어안아서 감싸줬을 것이다.
루우가 마음껏 울음을 터트리도록.
하지만 견하는 그럴 수 없었고, 그저, 시간이 느릿하게 흐르는 걸 느끼며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었다.
그때, 누군가 방 문을 두드렸다.
“타이시 볼로드입니다. 고려 황제 폐하께서 여기 계시다고 들어서.”
견하는 들어오라고 했다.
깔끔하고 반듯한 중년 사내가 루우를 향해 예를 표했다.
“꼭 전해드려야 할 말씀이.”
루우는 바라보기만 할 뿐 대답하지 않는다. 견하는 그런 그녀를 흘끗 한 번 보고, 대리인을 자처하기로 했다.
요즘 꽤 실력이 오른 몽골어로 물었다. 몽골 문자 독해는 어렵지만 회화 실력은 빠르게 는다.
“무슨 일입니까.”
“낭키아스의 게레센제 칸께서 보낸 겁니다. 칸발리크로 갈 테니, 조카인 루우 테무르는 맞이할 준비를 해 달라고.”
‘맞이하다’, 라.
그게 카간으로 즉위할 테니, 협조해 달라는 의미인 건 분명하다. ‘준비’는…… 쿠릴타이의 소집 같은 거겠지.
견하는 다시 루우 쪽에 시선을 던졌다. 노기라도 서렸으면 했는데, 여전히 무기력한 상태다.
한숨을 쉬고 싶은 걸 억누르며, 견하는 계속 볼로드와의 대화를 이어나갔다.
“……아무런 조건도 없이 대뜸 그런 억지를 들이밀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요.”
“예. 조건을 제시하긴 했습니다. 다만 그게…… 폐하의 판단을 요하는 성질의 것인지라.”
“어떤 거죠?”
볼로드는 잠깐 망설이는 듯했다. 루우에게 직접 말하고 싶었는데, 그게 안 되니까 그러는 모양이다.
혹은…… 상당히 껄끄럽고 당혹스러운 조건이거나.
“게레센제 칸은 ‘나는 칸발리크 상공에 나타난 것의 정체를 안다. 어떻게 불러낸 것인지도 안다. 협력해준다면 관련 정보를 제공하겠다’고 했습니다.”
그제야 루우의 눈에 생기가 돌아온다.
그녀는 몸을 홱 틀어, 볼로드 쪽을 똑바로 쏘아보았다.
그리고 요구했다.
“자세한 이야기를.”
***
볼로드는 청년기를 시레문과 함께 보냈다.
함께 전장에 서고, 함께 전략을 세웠다.
그랬기에 상대적으로 젊은 나이에 재상, 타이시의 자리까지 오를 수 있었던 것이다.
타이시가 된 그는 그 나름의 사상을 바탕으로 몽골이 나아갈 길을 제시하고, 카간과 함께 이끌어나갔다.
허동주가 그러했고, 미승휴가 그러했듯이,
볼로드에게도 ‘전후구상’이 있었다.
전쟁 중에 볼로드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 바로, ‘다이온(大元)’의 역사였기 때문이다.
그는 태평천국과의 전쟁을 ‘세계대전’의 관점에서 보는 게 아니라, 오랜 세월 계속되었던 한족과 몽골 초원 민족 간 전쟁의 연장선으로 보았다.
요컨대 한족의 ‘명’이 ‘다이온’을 북쪽으로 몰아내고 한족의 영토를 확보했듯이,
1910년의 승전은 몽골이 다시 한번 ‘다이온’을 부활시키고 한족의 영토를 모조리 지배하에 넣는 과정이라고 본 것이다.
얼핏 범 알타이 인민동맹과 비슷한 성향인 듯 보이지만, 그에겐 ‘인민동맹’과는 절대로 가까워질 수 없는 중요한 차이점이 있었다.
그것은 그가 ‘군주제’를 지지하는 보수주의자라는 점이다.
어쨌든 그런 생각을 지닌 사람이었기에, 허동주가 그랬듯이 볼로드도 전후 영토 배분에 큰 불만을 품었다.
물론 산동쯤이야 고려에 얼마든지 넘겨줄 수 있지만, 그 외의 지역들을 몽골이 직접 통치하지 못하고 키타이, 낭키아스로 쪼개 놓아야 한다는 점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다.
일본공화국, 그 배후에 있는 아즈텍 연방의 음모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특히 몽골의 영토 확장에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는 아즈텍 연방을 보면 더더욱.
키타이와 낭키아스가 성립한 것마저도, 허동주가 태평천국 황실을 처형해버리면서, 아즈텍과 일본이 ‘고려에는 도저히 못 맡기겠다’고 생각한 덕분에 가능했던 일이다.
그런 일이 없었다면 아예 황실만 폐지한 한족 독립국가를 다시 만들어줬을 것이다.
그 이후로, 볼로드의 마음속에서 아즈텍 연방은 ‘몽골의 안보에 대한 크나큰 위협’으로 자리 잡았다.
그런 위협에 대항하기 위해, 더더욱 ‘다이온’을 부활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전쟁이 끝난 후 유럽을 순방하며, 로마 제국이나 신성 제국 같은 나라들을 모델로 삼아 동아시아에도 ‘보편 제국’을 건설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게 자리 잡았다.
그리고 1929년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