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인의 공화(2)
설령 당장 카간 자리를 차지하는 데 실패하더라도, 상황은 낭키아스만 붙들고 있을 때보단 훨씬 유리해진다.
키타이를 남김없이 게레센제 자신의 것으로 삼으면, 거의 옛 태평천국 정도의 영토를 차지하게 되는 셈이다.
그렇다면 울제이가 이야기했던 것처럼, 한족들의 황제 노릇을 하며 독립국가를 꾸려나가는 것도 가능하다.
뜻대로 풀리면 옛 다이온 전체의 카간. 실패해도 한족의 황제. 상당히 매력적인 도박이다.
-뭐, 이런 계산에 따라 울제이와 당장 손을 끊는 것도 한 방법이겠지만.
일단은 신중할 필요가 있겠지. 상황이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는 게 가장 큰 문제다. 그러니 울제이와는 아직……
아니.
변하게 할…… 방법이 있다.
-넌지시, 던져볼까.
이렇게 던져보자.
-나는, 칸발리크 사태가 ‘어떻게 일어났는지’ 알고 있다.
-조카 루우 테무르여, 만약 칸발리크 사태를 해결하고 싶다면, 내가 알고 있는 정보를 제공받고 싶다면, 칸발리크에서 나를 ‘영접하라’.
-그 외 다른 조건을 제시해도 좋다. 거저 얻을 수 있는 것은 없으니까.
루우 테무르가 거절한다면 그건 그것대로 좋고, 받아들인다면 카간 자리를 향해 한 걸음 더 전진하는 셈이다.
-그 다음 행보는 루우 테무르가 어떻게 나오느냐에 따라 결정해도 되겠지.
***
울제이는, 이 덩치 큰 사내는 덩치에 안 어울리게 생각을 기민하게 굴린다.
그는 굵은 눈물방울을 뚝뚝 흘리며 큰형의 죽음을 애도하면서도, 게레센제와 거의 완벽하게 대칭을 이루는 생각들을 떠올리고 있었다.
어린 동생들, 그들을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자신도 아무것도 모르는 애송이였으면서 큰형은 카간 자리를 향해 나아갔었다.
울제이는 아직도 벌벌 떨던 시레문의 두 다리를, 그러나 곧게 세운 등을 기억한다.
그런 기억을 떠올리면서 동시에, 울제이는 큰형의 자리를 자신이 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는 게레센제가 그러했듯이, 게레센제와 계속 손을 잡을 경우와, 루우 테무르와 손을 잡을 경우를 저울질해보고 있다.
루우 테무르와 손을 잡으면, 일단 카간 자리에 바짝 다가서는 한편으로, 게레센제를 제거하는 데에만 집중할 수 있다.
반대로 게레센제와 계속 손을 잡고 있으면, 남방을 안정시킨 상태에서 루우 테무르와 대결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두 방안 모두, 한 가지 구멍이 있다.
루우 테무르와 게레센제도 지금 울제이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으리라는 점이다.
만약 루우 테무르나 게레센제가 겉으로는 울제이와 협력하는 척하면서, 뒤로는 밀약을 맺고 울제이를 협공하기로 했다면, 그때는 어떻게 할 텐가?
같은 질문을 루우 테무르나 게레센제에게도 각각 던져볼 수 있다.
지금은 서로가 서로를 몹시 필요로 하지만, 또 서로를 절대로 믿을 수 없는 상황.
그렇기에 울제이도 신중히 지켜보기로 한다.
동시에 게레센제가 그러하듯, 루우 테무르에게 은근한 제안을 던져본다.
-내가 큰형님의 자리를 잇고 새로운 카간이 되는 데 협력해 달라.
-대신 몽골 본토뿐만 아니라 키타이 내부까지 고려의 기업이 진출하는 것을 허용하겠다. 군사기지 건설과 주둔도.
-게레센제 형을 배제할 경우, 낭키아스의 주요 무역항들을 고려 측 조차지로 내어주겠다.
이런 식으로 상당히 구체적인 이권들을 내걸어 보는 것이다.
-어떻게 반응할까, 루우 테무르는.
한 번 내어준 이권들은 다시 거둬들이기 어렵고, 또 지금 내건 조건들엔 나중에 울제이에게 위협이 될만한 요소들도 있다.
그러나 카간이 되지 못한다면 이렇게 내어준 이권들을 거둬들일 시도도 하지 못한다.
카간이 되기만 한다면, 시간과 노력은 상당히 들어가겠지만 협상을 통해, 혹은 협박을 통해 거둬들일 방법은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걸 ‘결정’할 수 있는 자리에 있어야 한다는 것.
그런 결정을 가능케 하는 것이 바로,
‘권력’이다.
***
칸발리크의 어전.
방어선 안쪽에서 밖으로, 그리고 도시 밖에서 안으로, 수도를 평정하는 군사작전은 이미 시작됐다.
그런 결정을 내리고 나자 남은 건, 역시 카간위 계승 문제.
이 점은 게레센제가 고민하고 있는 바와 거의 같았다.
카간의 유해도 찾을 수 없고,
도시는 이렇게 개판이 되어 있는 데다, 하늘에는 괴이한 존재가 떠 있으니 애도를 하는 데에도 한계가 있다.
그러니 다음 카간 자리에 대한 의논이나 실컷 하는 수밖에.
“여성이 카간 자리에 오르는 것은 전례가 없던 일입니다.”
전례는 중요하다. 경험으로 축적된 성공 사례이자, 역사의 교훈이다. 전례를 무시하는 것은 곧 역사에서 아무것도 배운 게 없음을 드러내는 짓이다. 파격은 철부지의 도박일 뿐이다.
“그렇지만 중세 이후엔 모계를 통해 칭기스 카간의 혈통을 이은 것도 인정하고 있어요.”
“모계로 혈통을 이은 ‘남성’의 칸 계승을 인정해준 사례겠죠.”
중세 후기 몽골의 명장이자 재상인 이성계와, 새로 페르시아 일대를 차지한 티무르 사이 맺어진 약조가 그러했다. 덕분에 티무르는 칸을 칭할 수 있었고, 이성계는 붕괴해 가는 예케 몽골 울루스의 위기를 일단은 수습했다.
“신라에서 여왕을 선출한 전례가 있던 고려와는 사정이 다릅니다. 아니 여군주의 계승도 적당한 남성 후계자가 없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어요. 하지만 우리는 번듯한 후보가 둘이나 있지 않습니까.”
먼 방계인 것도 아니다. 시레문의 동복 형제면서 그 전임 카간의 적통인 두 아들이 아직 살아있지 않나.
낭키아스의 게레센제 칸과, 키타이의 울제이 칸이.
“하지만 지금 이 도시에 머물고 계신 분은 고려의 황제이시기도 한 루우 테무르십니다. 그분을 제쳐두고 카간위 계승이나 쿠릴타이를 이야기하긴 어렵습니다.”
“루우 테무르께선 실적과 실력 모두 갖고 계시죠. 최근 사태 진압에 활약하시면서 몽골 국민들의 평가도 아주 좋은 편입니다.”
멋지게 고려 황위를 쟁취했을 뿐만 아니라, 이단으로서 화려한 전투를 선보이기도 했다.
게다가 고려는 상당한 강국이다. 그 나라의 반발을 사는 건 좋지 않기도 하고, 루우가 몽골의 새로운 카간이 된다면 고려의 힘을 곧 몽골의 힘으로 활용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도 품어본다.
“다들 착각하시는 게 있는데, 카간은 공화국 통령이 아닙니다. 실력이나 실적이 우선되는 자리가 아니에요. 계승의 전례에 따르는 정통성이 우선하는 자리지.”
“실력이나 실적이 우선시되면, 그게 어떤 논리로 이어지는지는 다들 아시지 않습니까?”
‘실력 있는 자가 황위에 오른다’는 원칙이 서면,
실력 있는 자라면 ‘누구나’ 황위에 오를 수 있다는 논리로 곧바로 이어진다. 그렇기에 군주의 자리는 안정성을 위해 ‘혈통’이나 ‘종법’을 따른다.
기준이 모호한 ‘실력’보다는, 전임 군주들과 혈연적으로 어떤 관계에 있는가가 훨씬 객관적이니까.
타이시 볼로드는 피곤한 얼굴로 각료들의 논쟁을 지켜본다.
자신은 몽골의 이런 미래는 구상하지 않았는데.
시레문 카간은 후계자 문제를 어떻게 해보기도 전에, 상당수 황실 구성원들과 함께 가루가 되어버렸다.
안경을 벗고 두 눈을 비빈다.
어딘가에, 지금 이 고민에서 구해줄 누군가가 없을까.
***
“몽골 공군이 대규모 공격을 시도해봤지만, 상당한 피해만 입혔을 뿐 성과는 거의 없었다고 합니다.”
열차를 타고 서쪽으로 향하면서, 견하는 안내를 맡은 장교의 설명을 듣는다.
유지나도 한재연도 이익서도 데려오지 않고, 주견하 홀로 향하는 몽골행. 보고에 따르면 완전히 사지가 된 만큼, 그들을 데려가도 안전을 챙길 여유가 없었다. 양수영을 무사히 귀환시키는 것도 큰일이다.
심지어 리안의 허락도 받지 않았다. ‘황제에게서 직접 명령이 떨어졌으니 급히 칸발리크로 향합니다’, 라는 보고를 올려뒀을 뿐.
아마 지금쯤은 견하가 몽골로 갔다는 걸 들었겠지만…… 너무 화를 내진 않았으면 좋겠다.
리안의 방침을 거스를 뿐만 아니라, 실망시킨 건 아닌가 싶어 견하의 마음도 여행 내내 편치 않았다.
그러나 창밖에 펼쳐진 광경이 그런 견하의 기분을 모두 구겨서 던져버렸다. 그건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닌 것 같다는 기분이 든다.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는, 도시 전체를 덮은 ‘검은 기둥.’
아래는 선명한 검은색이지만, 위로 갈수록 희미해져, 끝내 하늘 속으로 녹아든다.
“저 안은…… 밤처럼 어둡겠군요?”
“네. 하지만 그건 다른 이상 현상들에 비하면 별것 아닙니다. ‘부서진 붉은 달’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 비슷한 뭔가가 괴기스러운 붉은 빛을 뿜으며 지면을 비추고 있어서…… 계속 보고 있으면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고.”
파멸인의 출현과, 사람들 사이에 일어나는 ‘광증’의 상관관계. 정확히는 몰라도 뭔가 있는 건 확실하다.
하지만…… 저건 예상외인데.
어떻게 해결을 보겠다는 건가, 황제는.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열차는 아무렇지도 않게 검은 기둥 안으로 진입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도시 외곽의 기차역, 방어선 안쪽으로 공급할 물자가 집결하는 곳에 멈춰 선다.
견하는 모르지만, 얼마 전에 효윤과 루우가 정찰을 나왔던 바로 그 역이다.
“여기서부턴 다른 차량으로 이동하셔야 합니다. 가급적이면…… 하늘을 쳐다보지 않으시는 걸 권장합니다.”
그 말에 견하는 시선을 바닥으로 내렸다가, 흘끔, 하늘을 바라봤다.
이미 사방이 어스름한 붉은 조명을 받는 것처럼 보였기에 각오는 했지만.
……붉은 달이라기보다는 검붉은 태양이라는 표현이 더 맞지 않을까 싶은 뭔가가 하늘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부서진 걸 보면 암석질이라 태양과는 거리가 있지만.
걸음을 멈추고, 문득 든 생각에 빠져든다.
‘붉은 꿈’에서 본 풍경이,
저 부서진 붉은 존재의 표면과 무척 닮지 않았나, 하고.
다시 고개를 내린다. 안내를 맡은 장교의 말대로 오래 쳐다보는 건 좋지 않을 것 같다.
대신 차를 타고 이동하며, 칸발리크의 현 상황들을 머릿속에 집어넣는다.
겹겹이, 곳곳에 설치된 초소와 검문소.
아직 살아있는 주민들에게 물자를 나눠주는 병사들은, 라디오를 켜지 말고, 창문과 커튼을 닫고 하늘을 쳐다보지 말라 당부했다.
그러나 친절 이면에는 가혹한 처벌도 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처형된 시체들.
혹은 이제 곧 처형되어 시체가 될 사람들.
아마 저게 루우와 효윤이 전해준…… ‘정체불명의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겠지.
언제 광증을 일으켜 군인을 습격하고, 파멸인으로 돌변할지 알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처형은 조급한 느낌으로 이루어진다.
아니나 다를까 곳곳에 파멸인의 시체가 보인다.
이제는 하회탈 같은 얼굴이 아니라, 생생한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다.
큰 것도 있지만…… 차라리 큰 게 낫다.
아무리 봐도 어린애 정도밖에 안 되는 크기의 파멸인을 보면, 끔찍한 상상이 저절로 뇌리를 파고드는 걸 막을 수 없다.
대책을 내놓아야 한다. 뭐가 됐든, 신속하게.
그리고 이번 테러를 일으킨 놈들은…… 반드시 몰살한다. 자비는 없다. 무엇이 혁명이고 무엇이 민족이란 말인가. 그게 사람을, 어린애까지도 괴물로 만들어야 할 만큼…… 아니, 됐다.
옳고 그르고를 따지는 것도 용서의 여지가 있는 자들에게나 하는 것이다.
다시 한번 되뇐다. 몰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