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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소녀는 대원수가 되었다-175화 (175/541)

부서진 붉은 존재(13)

“나는 새너두로 갈 예정이다.”

잠시 쪽잠을 자고 난 후, 루우는 다시 시레문과 단둘이 마주 앉았다.

앞으로의 일을 이야기하기 위해.

“거기서 칸발리크 문제를 지켜보면서, 카라코룸에서 일어나는 사태에도 대처할 생각이다.”

“카라코룸에서 일어난 혁명 운동…… 지금 칸발리크 문제와 관련이 있나요?”

“배후는 ‘범 알타이 인민동맹’이라는 단체인 것 같은데, 두 도시에서 일어나는 사건이 연결되어 있는지 아닌지는 아직 밝혀진 게 없단다. 다만 가능성은 상당히 높다고 짐작할 뿐이지.”

“칸발리크 문제의 신속한 해결이 요구되겠군요. 그럼 칸발리크는 어찌어찌 해결한다 치고, 카라코룸은 어떻게 하실 거예요? 강경 진압? 타협?”

“일단은 타협 쪽으로 접근해봐야겠지. 칸발리크 문제는 덮어두더라도.”

“만약 그 ‘범 알타이 인민동맹’이라는 자들이 정말로 칸발리크 테러의 배후라면요? 수많은 시민들을 죽이고, 수도의 기능을 완전히 망가뜨렸어요. 그 죄도 깊지만, 국가의 대처를 농락할 정도로 치밀한 자들이에요. 없애버리는 쪽이 훗날을 위해 좋을 텐데요?”

“……네 말대로 ‘수도의 기능’이 완전히 정지된 상태지. 그런데 여기서 강경 진압을 선언했다가, 혹여나 몽골이 두 쪽으로 나뉘어 내전이라도 벌어지면, 이 나라가 어떻게 될 것 같니? 고려는 내전의 상처를 다 극복했던가?”

안 그래도 대공황으로 휘청이다, 관세동맹 후 조금 안정되어 가는 듯했던 경제가 바닥을 향해 가라앉고 있었다.

이런 사태가 더 진행되는 것도 안 되고, 내전을 향해 치닫는 것도 안 된다.

세계대전 종전 후 20년 동안 쌓아 올린 모든 것이 거품처럼 사라져버릴 수도 있다.

루우도 그 점에는 동의한다. 애초에 몽골의 경제가 받는 타격이 더 커지면 고려도 피해를 입는다. 세계경제에 끼치는 악영향이야 말할 것도 없고.

“물론 타협을 한다 해도, ‘겉으로만’이다. 시간은 걸리겠지만 일단 국민들 좀 진정시켜서 혁명으로 진행되는 건 막고, 범 알타이 인민동맹을 지지하는 세력을 차차 약화시켜 나가는 거지.”

경제가 안정되면 분노도 사그라든다. 시레문은 경제를 안정시킬 ‘시간’을 벌겠다는 것이다.

“알겠어요. 새너두로 가신다면…… 일단 황실 사람들은 다 가는 건가요?”

“거기에도 궁궐이 있으니까. 칸발리크에는 도시 정상화를 위해 현장을 맡을 사람들만 남고 대부분이 새너두로 옮길 거다.”

“……어머니도요?”

“……그래, 네 어머니도.”

그 말 이후로 두 사람의 대화는 꽤 오래 끊겼다.

의식을 잃고 의료기기에 의존해서 살아가는 루우의 어머니. 루우에게 고려식 이름 왕서라와 용의 피를 물려준 사람.

시레문은 그 대답 말고도 어떤 말을 덧붙여야 할지 알지 못했고, 루우도 그 답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생각해두지 않았다.

두 사람 모두 생각하기 두려워하는 화제였다. 결국 화제는 다른 곳으로 옮겨 간다.

“고려의 황제께선 어떻게 하실 생각인가?”

“저는 칸발리크에 남겠습니다. 여기는 이단 전력이 계속 필요하니까요.”

“버티고 있다 해도 고려군의 입국을 허락하진 않을 거야.”

시레문도 루우의 의도는 꿰뚫어 보고 있었다. 루우도, 꿰뚫어 보리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고.

“안타깝지만 몽골에 대한 고려의 영향력은 계속 커질 거예요.”

아버지의 자리, 아버지의 나라를 삼키겠다는 야심을 드러낼 정도로 큰 딸.

군주다운 위엄에 기뻐해야 하는가, 아니면 가족 간에도 이런 식으로 날을 세워야 하는 권력의 속성에 슬퍼해야 하는가.

두 사람의 대화는 시레문의 씁쓸한 웃음과 루우의 차가운 웃음으로 마무리되었다.

***

카간을 비롯한 황실이 새너두로 떠난다.

파멸인의 습격을 받을 우려가 있는 열차가 아니라, 비행선으로.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몽골 공군이 며칠에 걸쳐 하늘에 떠 있는 구체들을 공격했다.

“썩은 피처럼 변해버렸어.”

효윤의 말대로 구체들은 거무죽죽하게 변해서 활동을 완전히 멈춰버렸다.

저렇게 되어버린 구체들은 계속 바라봐도 별다른 이상 현상이 일어나진 않았다.

이때가 도시를 빠져나갈 기회라고 판단했는지, 카간을 태운 비행선이 이륙한다.

먹구름은 여전하다. 비행선은 그 밑바닥을 스칠 듯이 날아서 북쪽으로 향한다.

이변은 바로 그때 시작됐다.

“구름이……?”

누군가 그렇게 말하는 순간 모두가 이상을 눈치챘다. 먹구름이 새빨갛게 빛난다.

아니, 먹구름 너머에 새빨갛게 빛나는 뭔가가 나타난 것이다.

검게 변한 구체들이 녹아내린다.

썩은 피가 남김없이 흘러내린다.

그 밑에…… 혹여라도 사람이 있으면 어쩌지, 하는 걱정은 들지 않는다.

그런 걱정을 하기엔, 하늘에 펼쳐진 광경에서 도저히 눈을 뗄 수 없었으니까.

먹구름을 간단하게 찢어버리고, 하늘로부터 내려온…… 붉은 존재.

마치, 달이 지표면 근처까지 바짝 접근하면 이런 느낌일까 싶은 모습.

“부서져 있어……”

간신히 ‘달이었을 것 같다’는 윤곽선을 그려볼 수 있을 뿐, 그것은 산산이 부서진 채로 하늘 위에 떠 있었다.

분명, 먹구름 걷힌 하늘은 푸른 대낮이어야 할 텐데.

왜 저렇게 어둡지?

‘부서진 붉은 존재’는 피처럼 시뻘겋게 빛나며 모두의, 모든 것의 표면을 붉게, 붉게 비추고 있다.

“아버지는? 아버지의 비행선이!”

넋 놓은 사람들 중 가장 먼저 카간이 탄 비행선을 신경 쓴 사람은, 루우였다.

***

비행선 안.

창밖에서 들어오는 강렬한 붉은 빛에, 여기도 핏빛으로 물들었다.

아니, 핏빛은, 밖에서 비치는 것뿐만이 아니다.

정말로 피가 분출해서, 이 고급스러운 비행선 내부를 더럽히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미친듯이, 아니 미쳐서 웃는 사람이 있다. 허파가 터지고 횡격막이 찢어질 듯, 의미 없는 웃음을 고통스레 토해낸다.

미쳐서 우는 사람이 있다. 낮게 흐느끼는 사람부터 소리소리 지르며 통곡하는 사람까지. 역시 의미 없는 울음을 고통스레 토해낸다.

미쳐서 남을 공격하는 사람이 있다. 이, 손톱, 주변의 물건 등, 모든 수단을 동원해 상대의 살을 찢고 혈관을 끊는다. 공격하는 사람의 괴성에도 웃음과 울음이 섞이고, 당하는 사람의 비명에도 웃음과 울음이 섞인다.

미쳐서 스스로를 공격하는 사람이 있다. 이 사람 역시 모든 수단을 동원해 자신의 급소를 찌르거나 베려고 한다. 이미 성공한 사람들의 피가 울컥울컥 튀어서 벽을 덧칠한다.

이 모든 감정표현은, 고통에 가득 차 있다.

각자의 의지로 하는 게 아니라, 누군가의 조종을 받아 강제로 한다는 느낌.

힘줄과 근육이 말을 듣지 않고, 의식에서 의지가 도려내진다.

그 모든 과정을 산 채로 겪고, 느끼고, 지켜보는.

그 고통이 비명을 지르게 한다.

그 고통이 울게 한다.

그 고통이 사람을 망가뜨려, 웃게 한다.

쓰러진 몇몇은 몸을 기괴하게 비튼다. 목구멍 안쪽, 혹은 콧구멍, 혹은 귓구멍, 혹은 안구 뒤편, 혹은 겨드랑이나 오금, 사타구니……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곳에서, 새로운 신체 기관이 돋아난다.

신체 기관들은, 하얗게 번들거린다.

-저게, 파멸인으로 변이하는 과정인가……!

지끈거리는 머리를 누르며 카간 시레문은 그 자리를 벗어났다. 붉은 핏빛은 너무 고통스럽다. 벗어나고 싶다.

아니, 고통에서 벗어난다고 해서 고통을 ‘넘어선’ 어딘가로 나아가면 안 된다.

절대로 그러면 안 된다. 그런 예감이 든다.

이 느낌은 정말 기괴하다. 고통을 넘어서 버리면, 광기나 죽음과도 같은 절망이 기다리는 게 아니라, ‘깨달음’에 이를 것만 같은 느낌이다.

인간이 절대로 깨달아서는 안 되는 뭔가에 도달할 것만 같다.

이 고통의 경계선 저편에, 열반에 이를 것만 같은 고양감이 기다리고 있다. 그것은 명백하다.

창문이 없는 곳으로 들어오자 두통은 조금 가셨다. 하지만 여전히 눈앞에 그 ‘붉은 존재’가 아른거린다.

어쩌면, 이게 그 병사들이 겪었다는 환각일지도.

괴성을 지르며 누군가 달려든다.

“이런……!”

어깨로 상대의 가슴팍을 밀쳐낸 다음, 구부러진 칼을 빼 들고 목을 겨냥해 베어낸다. 아직 육신은 평범한 인간이었는지 그대로 피를 뿜으며 죽어버린다.

피…… 얼굴과 목 주변에 뒤집어썼다.

두통이 다시 심해진다.

제발…… 멀쩡한 정신을 유지할 수 있기를 바라며, 시레문은 비행선 안을 걸었다.

아내가, 루우 테무르의 어머니가 있는 곳으로.

가는 길에 서로 죽고 죽이는 사람들을 마주쳤다. 그들 눈에 띄지 않도록 이리저리 피해 봤지만, 두세 명 정도는 베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저 뒤쪽에서 새 울음소리가 들린다. 살과 뼈를 으깨거나 찢는 소리, 조금 성격이 다른 비명도.

그때쯤, 시레문은 살아나갈 수 없다는 걸 실감했다.

그러니 하다못해, 그녀의 곁에서.

이윽고 아내가 의료기기에 둘러싸여 누워 있는 병실에 도착했을 때, 시레문은 생각했던 것보다 끔찍한 광경에 진저리를 치면서도, 또 안도했다.

한편으로는 아내가 무사하다는 사실에 안도했고,

또 한편으로는 의료진과 경호원들이 서로 물고 뜯어 피범벅이 되어 있는 병실의 광경에, 진저리쳤다.

그러나 그런 감정들도 잠시, 시레문은 아내를 향해 천천히 걸어가다가, 아내의 상태를 보고는 멍하니 멈춰서 버렸다.

아내는 발작이라도 일으키듯 사지를 버둥거리고 있었다.

두 눈에서는 피눈물을 흘린다. 입가는 이미 어린아이가 음식이라도 흘린 듯 빨간 액체로 범벅이 되어 있다.

시레문은 피 묻은 손으로 피 묻은 의자를 가져와 앉았다.

그리고 그 시뻘건 손으로 아내의 떨리는 손을 잡아준다.

시레문이 이제 할 수 있는 건 그 정도뿐이었다.

“나는, 끝내 내가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깨닫지 못했소.”

사랑인지 집념인지 죄책감인지, 아니면 지금 이 순간에도 국력 향상을 위한 도구로 보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루우 테무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지.”

하나뿐인 딸.

그녀에 대한 부성애가 있는가?

있을지도 모른다. 황제가 된 그녀를 위해 뭔가를 해주고 싶은 마음은 정말…… 계속해서 솟아났으니까. 선배 군주로서 배우고 터득한 것들을, 정말 많이 알려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이 순수하게 딸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딸마저도 이용해서 자신의 야망을 충족하려 한 것인지…… 구분되지 않았다.

나는 루우 테무르와 제대로 된 부녀 사이였을까, 아니면 유산을 물려줄 사람과 물려받을 사람, 딱 그뿐인 사이였을까.

알지 못한다.

그렇기에 여태까지 후계자도 못 정한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알아갈 시간도 이젠 없다.

정말 많은 짐을, 뒷사람들에게 떠넘기고 가는군.

“루우 테무르……”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

***

하늘 위의 붉은 존재가,

마치 심장처럼, 박동했다.

단 한 번의 박동.

그것으로 끝.

카간의 비행선과, 그 주변을 호위하며 느리게 날던 비행기 모두, 공간째로 일그러지더니 폭발했다.

붉은 존재 아래서 조금 다른 붉은색으로 타오르는 비행선을 보며, 아무도 말을 꺼내지 않았다.

대신 귓가에, 저 멀리서부터 새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지표면의 도시에서 하늘을 향해 울려 퍼지는 것 같기도 하지만,

하늘에서, 지상을 향해 계시를 보내듯 내려오는 것 같기도 하다.

아니,

새 울음소리가 아니다. 마치 함성이나 환호 같은……

아니, 그것도 아니다.

비명.

무수한 인간이 지르는 비명의 합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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