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서진 붉은 존재(12)
“범 알타이 인민동맹이라면 진즉부터 그런 움직임을 보이긴 했지.”
마치 벌어질 일이 벌어졌다는 듯, 예감을 사실로 확인했다는 듯, 시레문은 담담하게 보고를 받았다.
“문제는 ‘인민동맹’ 쪽이 이번 칸발리크 테러와 얼마나 관련이 있는가, 다.”
범 알타이 인민동맹은, 칸발리크 테러 및 그로 인한 혼란에 편승해 이번 시위를 주도했는가.
혹은 카라코룸에서의 시위와 칸발리크 테러 모두, 범 알타이 인민동맹의 기획인가.
“둘 다 인민동맹의 작품이라면, 이 테러는 우리가 카라코룸에 신경 쓰지 못하게 하려는 공작이겠지.”
대규모 군대가 본래 주둔지를 떠나 칸발리크 주변에 집중 배치되었을 뿐만 아니라, 정치권도 사회도 모두 칸발리크에서 일어나는 일에 주목하고 있다. 카라코룸의 군이나 경찰도 아침마다 새롭게 전해지는 수도의 소식에 관심을 가졌겠지.
그 틈을 타서 ‘인민동맹’은 수면 아래로 모습을 숨겼다가, 준비가 끝나자 폭발하듯 대규모 시위를 일으킨 것이다.
혁명…… 그래, 혁명이라고 했으니 까딱 잘못하면 정말 혁명으로 발전할 수도 있겠지.
이게 우연이거나, 인민동맹이 기회를 틈탄 게 아니라면, 치밀하게 준비된 원대한 작전이라고 할 수 있다.
“인민동맹의 수완이 거기까지 미칠지는 의문입니다만, 일단은 말씀하신 대로 모두 인민동맹의 짓이라 보고 대책을 세우는 게 좋겠습니다. 과소평가보다는 과대평가가 안전하니까요.”
적을 얕보고 덜 준비하는 것보다, 적의 전력을 크게 보고 철저히 준비하는 것이 낫다. 볼로드의 논지는 그러했다.
“하지만 ‘인민동맹’이 칸발리크 테러의 배후가 아닐 가능성도 생각은 해둬야 해. 인민동맹이 범인일 것이다, 이렇게 단정 짓고 있다가 다른 집단이 진범이라는 증거를 놓치면…… 그때는 그 ‘진범’들에게 뒤통수를 맞을 테니까.”
카간의 분석은 타당했다. 힘을 집중하되 다른 가능성까지 모조리 생각해둬야 한다. 정책의 유연성은 바로 거기서 나온다.
“다만 정말로 ‘혁명’으로 바뀌기 전에 뭔가 조치가 필요하겠군.”
“생각해 볼 수 있는 조치는 두 가지가 있겠습니다. 하나는…… 일단은 카라코룸의 시위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경제적 수단을 동원하는 겁니다. 시위에 참여한 시민 중 대부분은 빈곤 문제만 어느 정도 해결된다면 더는 참여하지 않으리라 여겨집니다.”
“그 ‘경제적 수단’이라는 건 뭐지?”
“다소의 손해를 감소하고서라도, 고려 측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겁니다. 비상시국이니, 비상조치가 필요하죠.”
시레문은 혀를 찼다. 몽골이 고려에 경제적으로 종속되는 것, 그리고 게레센제나 울제이의 반발을 막기 위해 거절했던 제안인데. 설마 재상이 다시 꺼내올 줄이야.
“여전히 내키지 않는 제안인데.”
“예. 고려에 경제적으로 종속된다든가, 두 칸의 반발을 사서 몽골 황실 간 영원한 분단을 가져온다든가, 이런 것들은 저도 바라지 않는 바입니다. 그러니 일단 ‘급한 불’을 끌 때 필요한 정도의 원조만, ‘비밀리에’ 받아들이자는 것이지요.”
영원한 날조는 불가능하지만, 일시적 날조는 가능하다. 장부에 몇 가지 속임수를 부려서 실질적으로 고려의 원조를 받긴 했지만, 공식적으로는 몽골의 자력으로 경제 위기를 극복했다는 지표를 만드는 것이다. 그것도 ‘합법적으로’.
“물론 오래갈 속임수는 아닙니다. 가능한 빠른 시일 내에 칸발리크와 카라코룸, 두 곳의 문제를 해결한다는 걸 전제로 한 속임수죠.”
“좋아. 그럼 그런 안으로 고려 측에 접근해보지. 하지만 주의 깊게,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실행해야 해. 그렇지 않으면 모두가 파멸하게 될 테니.”
볼로드는 고개를 무겁게 끄덕인다. 늘 파멸을 가까이 둔 기분으로 살고는 있지만, 오늘처럼 실감나게 느끼는 건 대체 몇 년 만일까.
“두 번째 조치는 뭐지?”
“곧 칸발리크 전체가 군사작전 지역이 됩니다. 카간께서는 칸발리크를 떠나 새너두나 옹구차트로 거처를 옮기십시오. 안전을 확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카라코룸 시위에 적극 대처한다는 인상을 줄 수 있습니다.”
새너두는 이른바 상도(上都)라 하여, 대도(大都) 칸발리크와 짝을 이루는 도시다. 칸발리크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중세 때부터 카라코룸과 칸발리크를 잇는 중간 거점 역할을 해왔다.
옹구차트는 칸발리크의 서북쪽에 위치한 도시다. 새너두와 함께 칸발리크를 보좌하는 위상을 지녔다. 이 도시 역시 초원 본토와 한족의 땅을 연결하는 중간 거점 역할을 했다.
“상황이 여기까지 왔으니 칸발리크에서 떠나신다 하더라도 여론에 큰 타격은 없을 겁니다. 새너두나 옹구차트에 머무시면 칸발리크 문제를 계속 주시한다는 느낌도 들고, 카라코룸에서 일어나는 일도 예의주시하고 있다는 메시지를 확실히 전하게 됩니다.”
“그렇게까지 간접적인 방법이어서는 카라코룸의 시위대에게 미치는 영향은 크지 않을 것 같은데.”
“예. 그러니 거기서 또 다른 행동에 들어가셔야죠. 예를 들면…… 곧 칸발리크 문제가 해결되는 대로 카간이 직접 카라코룸을 시찰하러 온다든가, 이미 새너두에서 시위 주도자들과 협상에 들어갔다든가…… 하는 소문을 흘리는 겁니다.”
“헛소문이지 않나.”
“헛소문이어도 시위대 안에 논쟁을 일으킨다든가, 세력을 약화시키는 효과는 있겠죠. 물론 거짓말이 들통나는 순간 더 큰 파장을 몰고 올 게 뻔하니, 어디까지나 비상조치일 뿐입니다. 여차하면 헛소문을 사실로 만드는 것도 가능하고요.”
“협상이 가능하다고 보는가.”
“어느 혁명에나 ‘이쯤에서 멈추자’고 생각하는 사람은 있기 마련입니다. 타협과 진압, 양쪽 모두 가능성을 열어두고 상황에 맞게 적절하게 활용하면서…… 이 사태를 해결해야겠죠.”
그렇게까지 기막힌 대책이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볼로드가 내놓은 이야기들은 정석적인 대책이긴 했다.
편법, 정공법, 적절히 구사.
누구든 할 수 있는 이야기지만, 다시 한번 상관에게 일깨워주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알겠네. 그렇다면 새너두로, 비행선으로 가지. 공군으로 일단 하늘 위의 구체들을 치워놓도록 하세.”
***
그로부터 몇 시간 뒤, 두 소녀가 피투성이가 되어 방어선 안으로 돌아왔다.
짐승과도 같은 몰골이었다.
다행스럽게도 두 소녀가 흘린 피는 아니었다. 그러나 대체 어떤 전장을 헤치고 돌아온 것인지, 방어선 안에 들어와서도 흥분으로 숨을 몰아쉬며 충혈된 눈을 번뜩였다.
무기도 놓지 않았다.
그녀들은 욕실과 마실 물, 갈아입을 옷을 미친 듯이, 분노에 찬 목소리로 몇 번이고 요구했다.
아니, 날뛰는 쪽은 한 명이고, 다른 한 명은 그런 동료를 진정시키며 사람들에게 빨리 가져다 달라고 재촉했다.
날뛰는 쪽은 이마를 감싸다가, 관자놀이를 누르다가, 나중에는 아예 자기 머리카락을 뜯을 듯이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거대한 박도를 쥔 오른손도, 금방이라도 휘두를 듯 바르쥐면서.
“후우…….”
직접 욕탕으로 데려가 옷을 벗기고, 씻기고, 갈아입힌 다음 방에 눕혔다. 일단 피를 씻어내니까 차분해지더니, 침대에 누운 후에는 얌전히 눈을 감는다.
“지켜봐 줘. 무슨 이상이 있거든 절차 전부 무시하고 곧바로 나에게 보고를.”
“예”
양수영에게는 그렇게 부탁해두고, 루우는 방을 나섰다.
황궁으로 간다. 가서, 아버지에게 알려야 한다.
-최효윤이 저렇게 될 정도면, 방어선을 지키는 다른 병력도 머지않아 저 지경이 될 거야.
앞장서서 싸우려고 해봤지만, 적의 워낙 수가 많았다. 결국 중간부터는 효윤과 함께 어깨를 맞대고 칼을 휘두를 수밖에 없었고, 그 과정에서 효윤은 계속 적의 ‘피’와 접촉했다.
‘피’와의 물리적 접촉. 혹은 ‘피’나 ‘구체’, ‘파멸인’을 시야에 오래, 대량으로 담아두는 행위.
이 모든 것이 붉은 꿈, 환상, 광증을 유발한다.
광증의 끝에서, 인간은 파멸인이 된다.
방어선 안에서도 나타났다는 파멸인은, 피난민 중 어떤 광신도가 변한 것일 터.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물리적 접촉이야 어찌어찌 피한다 치더라도, 시야에 닿지 않게 하는 건…… 아니 애초에 미치지 않은 방법은 없나?
루우 자신도, 방어선에 도달하기 직전에 붉은 그림자 비슷한 것을 봤다. 붉은 환상들이, 두 눈에 들어오는 풍경과 겹쳐 보이는 것이다. 남의 안경을 억지로 썼을 때처럼.
-그럼 이걸 아버지한테 어떻게 설명한다……?
숙소를 나온 루우는, 이제는 ‘2차 방어선’이라 불리는 벽으로 향했다. 그 너머에는 황궁과 주요 관청을 비롯한 시설들밖에 남지 않았다.
그런 일이 일어나면 안 되겠지만, 1차 방어선이 무너진다면 그건 도시의 파멸을 의미한다. 그때는 피난민이나 남은 시민들마저도 챙길 수가 없다. 2차 방어선은 황실과 정부 요인들이 탈출할 때까지 시간을 버는 용도로만 쓰일 것이다.
루우를 알아본 장교들이 그녀를 황궁으로 안내한다.
단순히 공주였다면 카간과 만나는 절차에 시간이 걸렸겠지만, 외국의 군주인 만큼 ‘시급하다’는 한마디에 그대로 카간 앞까지 나아갈 수 있었다.
약간의 뜸도 들이지 않고 루우는 말했다.
“괴물은 사람으로 만듭니다, 카간.”
시레문은 어딜 갔었냐고 물으려다, 딸의 말에 멈칫했다. 각료들도 모두 루우의 말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무슨 말입니까, 황제.”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괴물, 혹은 구체의 피와 접촉하거나, 오래 바라본 자는 악몽, 환상 등에 시달리다 광증을 일으키죠. 방어선 밖에는 어떤 ‘종교의식’을 치르는 자들이 있는데, 광증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듯합니다. 그 신도 중 일부가 괴상한 주문을 외우며 ‘피’와 접촉하자, 괴물로 변하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각료들이 술렁인다. 마침 고려의 군사개입이나 경제원조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장관급 이상만 남겨두고 모두 내보내서 다행이었다.
루우도 그걸 알아채고 바로 이야기를 시작한 거겠지만.
“즉시 수상한 종교를 믿는 자, 그 종교 의식을 실행하는 자 모두를 체포하고, 필요하면 즉결처형도 서슴지 말아야 합니다. 특히 주문을 외우는 신도들은…… 무슨 원리인지는 몰라도 ‘구체’를 작동시켜 괴물의 ‘피’를 받아내기 때문에 수단, 방법 가리지 말고 제거하길 권합니다.”
어떤 각료가 묻는다.
“사실입니까?”
루우의 매서운 시선이 그 각료를 향한다.
지금 사실로 확인되지도 않은 이야기를 하느라 시간 낭비하는 것처럼 보이는가! 그따위 멍청한 질문을 한 자의 머리는 어디에 붙어 있는가!
그런 경멸과 분노에 찬 시선이 던져지자, 각료는 움찔하며 입을 다문다.
루우는 쏘아보는 시선을 그대로 카간에게 돌렸다. 시레문은 딸의 위압감에 새삼 놀라면서도, 자신도 조용히 시선으로 맞받아친다.
루우의 작은 입술이 움직인다. 그러나 나오는 말은 무겁다.
“카간, 결단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