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서진 붉은 존재(11)
예정대로 돌아가는 일은 없다지만, 이건 뭔가 좀 잘못됐다고 효윤은 생각했다.
생각하면서 동시에 벤다.
파멸인으로 변한 남자는 아까 진즉에 베어버렸다. 지금 베는 것은 파멸인이 아니다.
같은…… 인간이다.
인간이 파멸인으로 변하는 모습을 보고서도 그들과 자신이 ‘같다’고 말할 수 있을지, 애초에 파멸인이 우리와 ‘다르다’고 할 수 있을지도 잘 모르겠지만.
그러나 그런 혼란에 참격이 무뎌져선 안 된다.
“……정신 차리자.”
그 중얼거림은 등을 맞댄 루우에게 들려주는 것이면서, 동시에 자신을 다잡는 말이기도 했다.
“이 사람들, 대체 뭐야.”
루우의 중얼거림에 효윤은 글쎄, 하고 말을 흐렸다.
모르겠다. 분명 이단은 아니다. 하지만 일반인이었다면 이 정도로 애를 먹지는 않는다. 방심만 하지 않는다면 일방적인 살육도 가능할 터.
그러나 지금 앞뒤 안 가리고 달려드는 이 사람들은, 확실히 일반인을 뛰어넘는 힘과 움직임을 보인다.
루우는 식칼이나 철봉 따위의 공격을 막아내며, 머리를 굴린다.
아까부터 놀라운 일들이 계속되어 머릿속이 복잡하지만, 그렇다고 생각을 멈출 수는 없다.
이 사람들, 아까 종교의식을 치르고 있던 사람들인 것 같은데.
하지만 지금 이 골목 안으로 밀려드는 사람의 수는, 아까 본 사람들보다는 많다.
“단순 광신도라고 보긴 어렵겠어.”
물론 광신도가 아닌 건 아니다. 광신도 ‘이상’의 무언가가 있다는 추측이다.
이상한 기도문을 외고, 구체의 피를 뒤집어쓰자 파멸인으로 변해버린 남자.
이들도 그 사람처럼 정체불명의 종교 때문에 신체가 강화된 걸까?
베어 넘기는 게 어렵진 않지만 방심할 수는 없다. 언제 이들 중에 또 파멸인으로 변하는 사람이 나올지 알 수 없으니까.
방어선 바깥의 시민들이 죄다 몰려나온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이 골목 안으로 밀려들어 온다.
아까 파멸인으로 변한 남자가, 뭔가 신호가 된 걸까.
리안은 누군가가 자기 의도대로 파멸인이나 구체를 조종한다고 했었다. 그렇다면 그 남자뿐만 아니라 지금 여기 달려드는 광신도들까지 누군가의 조종을 받는 걸까?
“고려 황제인 내가 여기 있는 걸 노리고 달려오는 건…… 아닌 것 같고.”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입을 움직이면서도, 피보라를 일으키는 언월도의 춤을 멈추지 않는다.
“기껏 만들어낸 파멸인의 공격이 저지됐다. 그렇다면 방어선 밖에 이단이 출현했다. 그러니 공격한다…… 그런 건가?”
아무래도 그게 가능성이 더 높겠지. 그럼 이들에게 ‘자신의 의지’는 없는 걸까?
광신도라고 해도 이토록 격렬한 공격을 받으면 움찔 정도는 한다. 머리가 아니라 근육이 반응한다. 그건 신앙이나 각오와는 전혀 별개의, 생물로서의 본능이다.
하지만 이들은 그런 게 없다.
어떤 ‘하나의 의지’에 지배받는, 소모품에 불과한 신세로 떨어졌다고 봐야겠지.
“루우, 뚫는다.”
옆에서 효윤이 속삭인다. 루우는 응, 하고 짧게 답하며 자세를 고쳤다.
흘끗 보자 효윤은 이미 피범벅이다. 베어낸 사람들의 피를 뒤집어쓴 탓이다.
머리가 지끈거린다는 듯, 왼손으로는 이마를 짚고 있다.
“최효윤!”
다그치듯 부르자 효윤은 고개를 휘휘 젓는다.
“빨리 돌파하자. 이렇게 피투성이인 건 좋지 않은 것 같아. 피를…… 씻어내고 싶어.”
루우는 효윤의 그 말에서, 그녀가 또다시 ‘붉은’ 무언가를 봤음을 직감했다. 그녀의 말대로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는 게 좋겠다.
“알았어. 내가 앞장설게.”
이상증세를 보이는 효윤보다는, 그 붉은 풍경의 영향을 조금이라도 덜 받는 자신이 나서는 게 낫다.
붉은 꿈, 파멸인, 구체, 피, 정체불명의 종교, 광신도들의 광기…… 이 모든 것이, 연관되어 있을까?
자신이 효윤에 비해 영향을 덜 받는 건, 신종(神種)으로부터 비롯된 이단이기 때문일까.
아마도 그렇겠지. 하지만 다른 사람과도 의논해볼 필요는 있다.
그리고 여기서 본 걸 누군가에게 전하려면, 일단은 살아나가야 한다.
“주견하처럼 잔인한 방식은 별로 내키지 않지만.”
루우의 언월도가 녹아내리듯 형태를 잃었다가, 포의 형태로 다시 뭉친다.
“피도 덜 묻히고 빨리 지나가려면 이게 제일이지.”
골목에 벼락 한줄기가 작렬한다.
뼈와 내장과 살의 단면을 드러낸 채 터져버린 시체들. 역겨운 뜨끈함과 누린내를 풍기는 그 사이로 두 소녀는 전진했다.
다시 저 멀리서 달려오는 사람들의, 비명 비슷한 소리를 들으며.
문득 파멸인의 ‘새 울음소리’가 사람의 비명과 무척 닮았음을 떠올리며.
***
“방어선이 뚫렸습니다.”
그 보고 한마디에 어전의 모두가 분주해졌다. 실제 행동이 분주해진 사람도 있었고, 말이 분주해진 사람도 있었으며, 생각이 분주해진 사람도 있었다.
최종 책임을 지는 시레문 카간은 ‘생각을 분주하게 움직이는 쪽’이다.
아무런 전조도 없이, 갑작스레 방어선 안에 출현한 파멸인들.
“감시가 소홀한 곳은 없었을 텐데! 돌파당했다면 진즉에……!”
“하늘에 떠 있는 구체들이 방어선 안쪽으로 괴물을 발사했다거나 그랬다면 역시 보고가 들어왔을 겁니다. 그걸 놓칠 정도로 우리 몽골군의 기강이 해이해져 있진 않습니다.”
상식적으로 봐도, 눈 달린 사람이 그걸 놓친다는 건 말이 안 된다. 그렇다면 이런저런 불가능한 가정들을 제쳐놓았을 때, 남는 가능성은……
“누군가 이 괴물들을 소환할 방법을 아는 자가 피난민들 틈에 섞여서 방어선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그자가 밖에서 공격이 이루어지는 것과 때를 맞춰 방어선 안에서 괴물을 소환했다…… 이렇게 볼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피난민을 방어선 안으로 들이는 작전을 즉각 중단하고, 완전봉쇄로 전환해야 합니다.”
“도시 외곽에서 대기 중인 부대들도 동원해야 합니다. 이제는 정치적 배려나 위신, 민심을 생각할 단계는 지났습니다. 비상 상황입니다. 즉시 도시 전체의 장악에 나서야 합니다.”
장관이니 참모니 하는 직함을 달고 있는, 장군과 대신들의 말들. 시레문은 그 말들을 쭉 경청했다.
이윽고 그는 자신에게 몰린 시선들을 향해 되물었다.
“원인 파악도 중요하고, 장기적인 대책도 중요하지만, 지금 당장 벌어지는 일들에 대한 대응도 중요하지. 방어선 안쪽에 나타난 괴물들은 어떻게 막고 있지?”
“이럴 때를 대비해 방어선 안에 2차 방어선 구축 작전을 짜뒀습니다. 괴물 출현 보고가 올라오자마자 작전을 발동했으며, 근처에 주둔 중인 이단 중 기존 방어선…… 그러니까 이걸 1차 방어선이라고 한다면, 거기 돌릴 인원을 제외한 이단 전원을 출동시켰습니다.”
“괴물들의 처리는 일단 그들에게 맡기기로 하고. 그래, 의견이 나온 대로 도시 외곽부터 제압 작전을 시작합시다. 우리들의 칸발리크가 또 한 번 전장이 되는 건 가슴 아픈 일이지만, 해야 할 일은 해야겠지.”
긴, 한숨을 내쉰다. 정체불명. 배후 세력도 실행범도 수단도 목적도 알지 못한다. 터지는 각각의 사건에 계속 말려 들어갈 뿐.
이렇게 된 이상, 더 말려 들어가지 않으려면 적보다 우위에 서 있는 ‘양’을 활용할 수밖에 없다.
시레문의 결정을 하달하러 다시 분주하게들 움직일 때, 누군가 타이시 볼로드의 옆으로 다가와 속삭였다. 그 속삭임을 들은 볼로드의 눈이 잠깐 커졌다.
그러나 노련한 정치인답게 볼로드는 금방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돌아갔다. 그 측근의 속삭임은 꽤 길게 이어졌다.
한참만에야 알겠다는 손짓으로 그 사람을 물린 볼로드는, 시레문을 향해 시선을 보냈다.
오랜 세월 군주와 재상으로 함께 보낸 두 사람이다. 그 눈빛이 긴히 할 말이 있다는 뜻임을 못 알아차릴 수가 없다.
각료들에겐 잠시 휴식을 취하게 하고, 시레문과 볼로드는 자리를 옮겨 이야기를 나눈다.
“방금 들어온 첩보입니다. 고려의 외무장관 안세규가, 자국의 황제 구출 및 사태 진정을 목적으로 고려군 일부의 입국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루우 테무르라면 보급 열차에라도 태워서 보내면 그만일 텐데?”
“그게…… 고려 황제 폐하께선 그 열차에 타고 도시 외곽으로 정찰을 나가셨다고……”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그럼, 지금 루우 테무르의 소재는 파악이 안 되는 건가?”
“그렇습니다.”
시레문의 입술이 굳게 닫혔다. 이단 전력이 부족하니 루우도 전선에 나가 달라고 부탁한 사람은 다름 아닌 자신이다.
그 결정이 지금 이렇게 곤란한 상황을 만들 줄이야.
“곧 도시 외곽에서 군이 진입할 텐데, 그 전에 방어선 안으로 돌아왔으면 좋겠군.”
“지금으로서는 그러길 바라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보다도, 안세규의 요청에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최대한 시간을 끌도록 하게. 지금 고려군이 개입하면 키타이나 낭키아스도 움직일 수가 있어.”
“그리 오래는 끌지 못합니다. 저들은 황제를 구출한다는 명분으로 움직일 테죠. 최소한 황제와의 연락을 시도할 겁니다. 그런데 황제는 지금 어디 있는지 모릅니다. ‘침공’을 감수하고서라도 고려군이 움직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상황이 꼬일 대로 꼬이기도 했지만, 손님으로 온 외국의 국가원수가 어디 있는지도 파악이 안 된다니 이만저만한 위신 손상이 아닐 수 없다.
“최대한 빨리 찾아보게. 그리고 또 다른 소식이 있나?”
시레문은 이 질문을 던진 직후, 볼로드의 표정을 보며 이렇게 생각했다.
이 사람 얼굴이 이 정도로 딱딱하게 굳는 건 정말 오랜만이군.
“……카라코룸에서, 전례 없던 대규모 시위가.”
“전례가 없다고 한다면 도대체 얼마나?”
“폭동 수준은 이미 넘어섰습니다. 공공연히 ‘혁명’이나 폐하의 퇴위를 요구하는 외침까지 나오는 수준이죠.”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다. 카라코룸 빈민 문제 해결에는 시간이 더 필요했다. 즉, 아직 해결 못 했다는 말이다.
여기에 최근 칸발리크의 혼란한 상황까지 불만에 기름을 부었을 것이다. 정부가 제대로 대처를 못 하니 더더욱.
칸발리크는 어쨌든 한 나라의 수도고, 몽골이 바다로 나가는 통로이기도 하다. 이런 땅이 지금 기능이 완전히 마비됐다. 악몽과 괴물들이 도시를 지배하고 있고, 언제 회복될지도 알 수 없다.
정부의 무능을 규탄한다. 황실의 무능을 비판한다.
군주제 자체의 효율성에 의문을 제기한다.
이에 따라 황제의 퇴위, 더 나아가 황실의 철폐까지도 요구한다.
“……하지만 원한다고 무조건 들어줄 수도 없는 노릇이지.”
요즘 돌아가는 상황이 도저히 좋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시레문에겐 시레문의 국가관과 미래관이 있다. 퇴위해달라고 해서 퇴위해 줄 수는 없다. 황실을 폐지하고 공화국으로 체제를 전환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한 가지 수확이 있다면 카라코룸 시위의 배후를 특정해냈다는 겁니다. ‘범 알타이 인민동맹’. 이들이 혁명과 황실 폐지의 구호를 불어넣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