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서진 붉은 존재(10)
“더 두고 보실 수는 없다, 그렇게 저와 의견이 같으시다면……”
리안이 조심스럽게 말을 끄는 건, 세규와의 갈등은 지금은 피하고 싶기 때문이다.
어쨌든 현 서부군, 구 극북방위군은 고려국민당의 무력 기반이다. 조유관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고려국민당에 다소 불이익이 가는 건 막기 어렵다.
미리안, 안세규, 루우 테무르의 권력 삼파전. 미리안은 안세규를 견제하기 위해, 안세규는 미리안을 견제하기 위해 각각 루우 테무르와 제휴했었다.
그러나 루우 테무르가 이렇게 황제권을 강화하겠다고 홀로 돌출하면, 이번에는 미리안과 안세규가 루우 테무르를 견제하기 위해 제휴할 수밖에 없다.
이런 제휴 과정에서, 세규가 조유관 제거에 대해 의논해온다고 ‘얼씨구나 좋다’며 달려들 수는 없다는 이야기.
그러니까, 늘 오가는 이야기지만, ‘정치적 배려’가 따라야 한다.
두 사람이 모두 동의하더라도, 안세규에게 약간의 보상을 해줄 필요는 있다. 이 제휴 관계에 리안이 얼마나 강한 의지를 품었는지 보여줄 수도 있고.
“문하시중 자리와 중서문하성, 지난 내전 이후 폐지했지만 정부 체제를 이대로 둘 수는 없어요. 태사가 감당할 수 있는 업무량에도 한계가 있고.”
리안이 다른 화제를 꺼내자 세규의 눈에 의문이 감돈다.
“내무성을 신설할 겁니다. 외무장관님은 내무성이 신설되는 대로 내무장관으로 자리를 옮겨주세요.”
“각하, 그 말씀은…….”
“방금 말한 것처럼, 태사가 국정을 총괄한다고는 해도 누군가는 업무를 분담해줘야 해요. 그리고 조유관을 제거하는 이상, 서부군이 고려국민당의 ‘당군’인 현 상황도 두고 볼 수는 없고요.”
세규는 끄덕였다. 이제는 무력에 의존한 대결이 아니라, 정권 내에서 협상과 견제를 반복하는 권력 다툼을 벌여야 할 것이다.
“대신 내무성 장관 휘하에는 국경수비대나 일반 경찰이 배치될 겁니다. 그 정도면 장관님께 어느 정도는 보상이 되리라 생각해요.”
국경수비대의 무장은 전쟁성 휘하 군대에 비하면 빈약하지만, 필요하면 써먹을 수는 있다. 일반 경찰을 손에 넣는다는 건 적어도 고려국민당원이 정치적, 사상적 이유로 불이익을 보는 걸 방어할 수 있다는 의미고.
-정치경찰실이 태사부 휘하에 있는 게 마음에 걸리지만.
슬쩍, 주견하의 얼굴을 본다. 그 표정에는 변화가 없다.
무력 충돌을 하지 않는다 해도, 정치경찰들 앞에 일반경찰을 대치시켜서 신경전 정도는 벌일 수 있겠지.
게다가 이러한 인사 배정을 통해 세규는 타국과의 교섭 현장에서는 멀어지겠지만, 국내 정치 문제에는 더욱 깊숙이 들어가게 된다.
더구나 내무장관 자리가 문하시중 자리에 해당함을 생각해보면, 대내외적으로 안세규가 현 정권의 2인자라 선포하는 셈이다.
득과 실 중, 확실히 득이 크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조치는 황제 루우를 겨냥한 것이기도 하지.
입 밖으로 내긴 어렵지만, 이는 루우에게는 상당한 압박으로 작용할 수 있다.
리안과 세규가 손을 잡았다. 그냥 손을 잡은 게 아니라 태사가 직접 세규를 내무장관으로 끌어들였다. 황제는 이게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겠는가?
“그럼, 외무성 장관 자리는 비게 될 텐데, 다음 인선은 생각해 두신 게 있으십니까?”
“조유관을 거기에 앉힐 겁니다.”
세규의 눈이 커지고, 견하의 눈이 가늘어진다.
리안, 대원수이자 태사이자 제국최고회의 의장인 그녀의 얼굴엔, 오랜만에 ‘그 미소’가 떠올랐다.
죽음의 위기가 닥쳐왔을 때.
전의를 불태울 때.
권력을 손에 쥐는 순간이 눈앞에 왔을 때.
그럴 때 짓는 미소. 그리고 견하가 정말로 좋아하는 당당한 미소가 떠올랐다.
“조유관은 얼마 전부터 태사부 측 인사와 접촉해서, 중앙 정계에 인맥을 만들고 싶어 하더군요. 전쟁성 장관 강태훈과도 몇 차례 접촉했고. 인맥을 만들 뿐만 아니라 본인도 중앙에 진출하고 싶겠죠.”
외무성 장관 자리는 그런 조유관을 수도로 불러들이기 위한 미끼다.
“그렇게 해두면 일차적으로 조유관과 서부군 병력을 분리할 수 있죠.”
그리고 외무장관이 되려면 민간인 신분이어야 하기에, 조유관은 일단은 전역하게 된다.
병사들에게서 멀어진 장군만큼 무력한 존재는 없다.
“그런데, 조유관이 서부군 지휘권을 쉽게 포기하겠습니까?”
“나나 안세규 장관의 이름으로 부르면 조유관도 이상하게 여기겠죠. 그러니 여기서는 황제 폐하의 이름을 빌립시다. 이번 몽골 파병 건이 마무리되면, 그 공로를 인정한 황제 폐하께서 넌지시, 외무장관직에 추천하셨다고.”
그러면 ‘비공식적 추천’이기 때문에, 조유관이 황제 본인에게 확인할 방법은 없다. 어쨌든 조유관은 황제와의 연줄이 닿은 것에 기뻐하며 동명으로 들어올 것이다.
“그 뒤 제거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겠죠. 지난번 숙군 때 적용하지 않은 혐의를 꺼내도 되고, 이번 일을 문제 삼아도 되고. 조유관의 피까지 요구하진 않겠지만, 적어도 다시는 정계에 발을 못 붙이게 할 겁니다.”
리안은 ‘피를 보진 않겠다’고 했지만, 세규의 생각은 달랐다.
-조유관이 최후의 발악으로 ‘범 알타이 인민동맹을 지원하라’던 내 명령을 누설할 가능성이 있다.
조유관이 외무장관에 임명되는 건, 세규가 내무장관에 취임한 이후일 터.
그렇다면 그 짧은 시간 동안 국경수비대나 일반 경찰조직을 장악, 죄인 조유관을 ‘호송 중 사고’로 처리한다거나, 형무소 사식에 독을 섞는다거나…… 어쨌든 도박을 할 필요가 있다.
피를 흘리는 도박을.
“알겠습니다. 그럼 오늘 태사께서 말씀하신 대로, 필요한 조치들을 취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몽골 정부 측에서 어떻게 나올지가 문제겠군요.”
***
안세규와의 면담이 끝나고, 리안은 그대로 자리에 앉아 생각에 잠겼다.
예전에, 루우의 ‘수명’에 대해 이야기했을 때.
-만약 루우가 일찍 생을 마감하게 된다면, 나더러 고려제국을 고려민국으로 전환하고, 그 통령이 되라고 했었지.
그 말은 어디까지가 진심일까?
루우는 자기가 죽고 난 이후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걸까? 황제나 제국 체제에 대한 미련이 그렇게 크진 않은 걸까?
하지만 지금 저렇게 야심에 찬 행보는……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이단과 파멸인의 비밀을 캐내기 위해, 혹은 파멸인으로 인해 벌어질 재앙을 막기 위해 몽골 황위를 노리는 것도 맞겠지.
그러나 개인적 야심, 자신의 한계에 도전해보고픈 마음으로 몽골 황위를 노리는 것도 진실이다.
-‘살아있는 동안 만큼은’ 최대한 자기 마음대로 해보겠다는 건가.
그런 리안의 상념을, 견하가 끊었다.
“안세규에게 내무장관 자리를 제안하신 거, 지난번에 말씀하신 권력 이양의 첫 단계인가요?”
리안은 고개를 갸웃했다. 견하가 왜 그런 질문을 던지는지 이해가 잘 안 된다는 듯한 동작이었다.
“그렇게 해석해도 큰 무리는 없어. 뭐 당장 권력을 내준다는 이야기는 아니고, 상황에 따라선 내무장관 자리에서 멈추게 할 수도 있으니까.”
어디까지나 황제 루우를 견제하는 조치.
즉 황제가 여기서 한발 물러서고, 안세규가 야심을 드러내는 식으로 상황이 변하면, 그때는 다시 황제와 태사가 제휴한다.
물론 황제와 안세규가 손을 잡고 태사에게 대항하는 일이 없도록, 태사도 조심스럽게 움직여야겠지만.
“한번 내무장관 자리를 내주면 그걸 다시 쉽게 빼앗을 수는 없지 않을까요.”
“쉽지는 않겠지만 불가능도 아니야. 나에겐 군대가 있어. 제국입헌당은 제1당이고.”
그리고 그녀는 달래듯, 견하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웃었다.
“충성스런 측근도 있지.”
눈동자 깊은 곳에 담긴 애정이, 견하의 마음을 흔든다. 그냥 알겠어요, 하고 수긍하고 싶은 욕망이 일게끔 한다. 그러나 할 말은…… 해야 한다.
“안세규는 믿을 수 없는 사람이에요.”
“맞아. 믿을 수 없지. 하지만 필요한 사람이야.”
일 년 넘게 사귄 연인이지만, 이렇게 생각에 차이가 난다.
믿을 수 없는 자는 필요도 없다는 견하와.
믿을 수 없다는 위험성을 감수하고서라도, 필요에 따라 데리고 있어야 한다는 리안.
잠깐이지만 견하의 눈이 번뜩이고, 리안은 그 눈빛을 안타깝다는 듯한 얼굴로 받아넘긴다.
결국 물러선 쪽은 견하였다.
“……알겠어요. 누나의 뜻이 그렇다면.”
“너무 염려하지 마. 저번에도 말했듯이 나도 만약을 대비한 수단은 여러 개 갖추고 있어. 네가 우려하는 사태는 일어나지 않아.”
수긍한 듯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견하는 생각한다.
정말 그럴까요.
권력을 내놓는다는 것, 힘을 잃는다는 것, 힘이 없다는 것.
그 결과…… 견하의 가정은 파멸했다.
리안을 원망하는 건 아니다. 그러나 견하는 명확한 교훈을 얻었고, 그 교훈에 따른 삶의 방식을 정했다.
그것만큼은 리안도 침해할 수 없다.
손을 한 번 잡고, 소녀의 이마에 입술을 맞추고 태사부를 나선다.
***
밖에는 감찰국, 즉 견하의 측근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유지나, 한재연, 그리고 이익서까지.
그들에게 고개를 한번 끄덕여주고, 견하는 앞장서 걸어 나갔다.
“……새로운 방침을 정하자.”
낮고 조용했지만, 뭔가 결의를 담은 듯한 그 목소리에 세 사람은 귀를 기울였다.
“유지나, 너는 「쿠빌라이 문서」를 비롯해서 이단, 파멸인 등…… 황제가 요구하는 모든 사업에 적극적으로 협력할 준비를 해. 아예 관련 부서를 신설해서, 거기 국장으로 취임할 수 있다는 생각도 해 둬.”
“제가…… 국장을?”
지나의 되물음엔 답하지 않고, 견하는 그대로 재연을 불렀다.
“한재연 너는 황제에게서 지원받은 자금, 인력을 한데 모아서 연구소 하나 차릴 준비를 해. 거기 소장으로 취임한다고 생각해 둬. 역시 황제의 몽골 황위 계승과 동군연합 계획에 적극 협조할 거야. 언제든 투입될 수 있는 이념적, 이론적 기반을 완성해 둬. 메뉴얼대로만 실행하면 착착 진행될 정도로.”
“……알겠어.”
뭔가 상황이 변했다는 걸 느끼고, 재연은 군말 없이 견하의 말을 따른다.
“이익서.”
“예.”
“안세규가 내무장관에 취임하면 일반 경찰조직은 그쪽 파벌 대학생들을 직간접적으로 지원해줄 거야. 반대로 우리를 탄압하려 들 수도 있겠지. 정치경찰실에서 지원을 해줄 수도 있지만 규모든 뭐든 상대가 안 돼. 그러니 한동안은 최대한 몸을 사리면서, 조직의 확대에만 주력하도록.”
“알겠습니다.”
“동맹이 더욱 많이 필요할 거야. 상황에 따라서는 공산당이나 사회민주당 계열 학생조직과 연대하는 것도 허가한다. 그 판단은 현장 책임자인 너에게 위임하고, 보고는 나중에 해도 좋다.”
“옙.”
걸어 나가던 견하가 돌아섰다.
세 사람은 멈춰섰다.
황궁의 뜰, 지금 그 주인은 이 나라에 없다.
“고려 제3제국, 그 정치무대의 주연 배우는 세 명. 태사 각하, 외무장관 안세규, 그리고 황제 폐하다.”
이 중 태사와 외무장관이 손을 잡았다. 견하가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나는 계획을 앞당겨서 내년,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정치경찰실 실장에 취임할 생각이야. 안세규가 내무장관까지 올라가면 지금 국장 자리로는 감당이 안 돼. 나제홍이 군에서 데려온 부하들도 인수하고, 황제 폐하의 편에 선다. 그리고 곧바로 안세규와의 대결에 들어간다.”
견하는 웃지 않았다. 그게 리안과 견하의 차이다.
“우리는 고려 제3제국의 정치무대에, 네 번째 주연 배우로 올라갈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