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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소녀는 대원수가 되었다-171화 (171/541)

부서진 붉은 존재(9)

“……검붉은수평선너머에서나를부르시네영혼없는이몸뚱이에혼을불어넣으사미천한이내몸이기꺼이피를바칠지니부디흠향하사한낱고깃덩이를신성케하시고……”

손가락을 치켜든 채 그런 외침을 빠르게 내뱉는 남자.

마치 그 주문, 혹은 기도문에 반응이라도 하듯, 하늘 위 구체가 심하게 꿈틀거린다.

도대체 어떤 모양이 되어 있는지는 잘 보이지 않지만, 그래도 꽤 역겨운 모습이리라는 건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팔이나 다리, 혹은 뼈 같은 것으로 보이는 뭔가가, 구체의 검은 그림자 표면에서 튀어나와 꿈틀거리다 들어간다.

들락거리는 신체 기관의 기괴한 춤이 반복된다.

그러다, 끝내,

허무할 정도로 작은 ‘펑’ 소리와 함께 터져버렸다.

“효윤아, 물러서!”

루우의 외침이 떨어지기도 전에 효윤은 뒤로 재빨리 물러섰다.

터져버린 구체가 있던 허공, 거기서 대량의 핏물이 쏟아졌다.

두 소녀는 거리를 벌리며 그 핏물을 피했지만, 바로 밑에 있던 남자는 핏물을 완전히 뒤집어썼다. 남자의 벌린 입에도 피가 쏟아졌는지, 기도문은 거품이 끓는 듯한 기묘한 소리로 변했다.

아니, 핏물을, 벌컥벌컥, 마시고 있다.

“……보인다.”

이윽고 입안의 피를 다 마셔 상쾌해지기라도 한 건지, 입꼬리를 한껏 끌어올리며 웃는다.

“보인다구! 보인다! 너희들은 안 보이냐? 나는 보여! 붉은 꿈! 그래, 은혜로운 피를 마셨으니 이제 깨어 있어도 보인다! 잠들 필요가 없어! 늘 볼 수 있다!”

미친 듯이 웃음을 터트리며, ‘보인다’는 말을 반복한다.

말과 웃음이 섞여 발음이 부정확하지만, 루우는 그의 말 중에서도 절대로 흘려들을 수 없는 한 단어를 짚어냈다.

“‘붉은 꿈’……?”

이단들이 간혹 꾸는 그 붉은 세계에 대한 꿈. 견하는 아예 파멸인들이 튀어나와 움직인다는 그 꿈. 그리고…… 얼마 전에는 아예 깨어 있는 동안 효윤과 루우가 함께 본 붉은 환상.

역시 그걸 볼 수 있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 건가?

절대로…… 좋은 현상이 아니다.

“나도 이제 영혼을 받는다! 영혼 없는 허망한 고깃덩이 신세는 이제 끝이야! 나도 이제 ‘그분들’과 같은 반열에 올라설 것이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목이 터지라 외쳐대는 남자를 보며, 루우는 오늘 밤 두 번째로 혀를 찼다.

“어떻게 예상이 빗나가는 법이 없네……!”

루우는 그렇게 뇌까리며 무기를 꺼냈다. 역시 이 수상한 종교는 파멸인을 섬기는 사이비였나!

남자가 무슨 돌발행동을 벌일지 모르니, 긴장하면서 제압해야 한다. 제압하고 나면 저 종교에 대해 이것저것 캐물어 보자.

이미 제정신은 아닌 것 같고…… 제대로 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루우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선 순간,

남자가 바닥에서 뭔가를 주웠다. 아까 구체가 터지면서 쏟아진 파편들 중 하나인 듯했다.

하얗고, 꿈틀거리는 저것은……

언젠가 한 번, 견하의 손바닥 위에서 소환되는 걸 봤던…… 그것.

“멈춰!”

루우가 다급하게 외쳤지만 남자의 동작이 더 빨랐다. 아니, 루우의 언월도가 더 빠를 수도 있었겠지만, 루우는 저게 무엇인지 인식하느라, 그리고 어떻게 대처할지 망설이느라 그 ‘찰나’를 놓치고 말았다.

남자는 그 작은 ‘하얀 괴물’을 삼켰다.

숨을 삼키는 것조차 잊어버린 채, 두 소녀는 남자를 지켜봤다.

남자의 몸에는 곧 이상이 찾아왔다.

일그러지나 싶었지만 그것보다는…… 공간 자체가 움푹 파이는 것 같은 느낌이다. 남자와 그 주변, 분명 ‘부피’를 차지해야 할 그 공간이 오목거울처럼 변했다.

공간이 텅 비어버리는 것조차 뛰어넘어, 저기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

눈에 보이는 그 모습은 그렇게 설명할 수밖에 없었다.

“이거, 그때 지하철에서 본 것과 똑같잖아…….”

“견하를 빨아들이려고 했을 때처럼 말이지.”

두 사람은 다리에 힘을 준다. 곧 그때와 같은 ‘바람’이 불면 무기를 바닥에 박아넣고 버틸 셈이다.

하지만 바람은 불지 않고, 대신 남자는…… ‘변한다’.

그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다. 저걸 대체 뭐라고 할 것인가. 저건, 공간을 비집고 나오는 것도 같고, 공간 자체를 오려다가 다른 조각으로 교체하는 것 같기도 하다. 눈으로 똑똑히 보고 있는데 머릿속에 그걸 이해할 ‘개념’이 없다.

유추도 불가능할, 완벽하게 처음 보는 현상.

남자의 육체, 육체가 차지하던 공간, 육체라는 개념 자체가 변모하여, 하회탈 같은 얼굴의 괴물이 된다.

무수한 이와 눈알. 피부를 덮은 비늘 같은 것은 실은…… 손톱과 발톱인가?

“소름끼치는 걸로는 지금까지 본 것들에 절대 뒤지지 않아.”

효윤이 그렇게 말하며 자세를 취했다.

혼란스러워하면서, 루우도 전투를 준비한다.

지금까지 ‘파멸인’은 구체가 낳는다고, 혹은 구체가 자신의 매개로 ‘어딘가’에서 소환해 오는 것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 이렇게 눈앞에서 ‘사람’이 파멸인으로 변하는 모습을 보면서, 도저히 뭐가 뭔지 알 수 없게 됐다.

이런 식으로 생산되는 방식도 있다, 라는 것밖에는.

더 많은 자료, 더 많은…… 「쿠빌라이 문서」의 파편이 필요하다.

***

주견하가 동석했다.

태사와 외무장관의 면담은 보통은 독대거나, 최측근 경호를 맡은 최효윤 중장과 함께 이루어진다.

물론 지금은 최효윤 중장이 자리를 비웠기에 주견하가 대신 참석했다, 고 말할 수도 있지만…… 그렇다면 ‘왜 하필 주견하인가’라는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그 질문의 답은, 지난 1년 하고도 수 개월 간, 주견하와 감찰국의 정치적 비중이 크게 성장했다는 것이다.

고등학교 3학년의 애송이, 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실적을 따져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

-암살 위협에 쫓기던 태사에게 피난처를 제공했다. 그리고 추격해온 암살자들에게 부모를 잃고, 그 자신도 쫓기며 목숨을 위협당하는 신세가 됐다.

-또다시 쫓아온 암살자들의 위협에서 태사와, 지금은 황제가 된 루우를 구하고 부상을 입었다.

-불온한 움직임을 보이는 구 야별초 조직을 진압, 기밀 자료의 유출을 막았다.

-태사와 황제를 수행해 신환도역 전투에 참가, 역적 허동주를 참살하며 내전의 조기 종결에 큰 기여를 했다.

-허동주 잔당을 토벌하는 산동 전역에 참전, 최전선에서 참호전까지 치렀다.

-태사의 전쟁 범죄 행위 처벌에 불만을 품은 무리, 신수덕의 잔당이 연합해 일으킨 쿠데타 시도를, 단신으로 동명역에 돌입해 저지했다.

-아즈텍에 망명 중인 신수덕을 추격, 신수덕이 ‘기갑사 기술’을 유출했으며, 아즈텍 내 극단주의 세력과 손을 잡고 있음을 밝혀냈다.

-바로 얼마 전에는 삼한반도 남부에서 게릴라 활동을 벌이는 신수덕 잔당을 토벌했다.

이렇게 정리해놓고 보면, 어리다고 얕보는 게 더 이상할 지경이다.

나이가 어리지만 특출난 사람이라고 판단하는 것이 맞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세규는 주견하의 눈치를 살폈다.

작년 4월 1일의 첫 공격을 자신이 꾸몄다는 것, 주견하의 부모님을 죽인 암살자들은 법무장관 류성일이 보냈다는 것…… 그런 건 영원히 몰랐으면 좋겠는데.

한편 견하도 세규의 얼굴을 보며 생각한다.

정황상 그러리라는 짐작만 할 뿐, 결정적인 증거는 없지만…… 안세규는, 언젠가는 지난 과오를 까발리고 제거해버려야 할 인간이라고, 되새긴다.

그리고 부모님 살해에 책임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 역시, 잊지 않는다.

리안 역시 비슷한 생각을 한다. 다만 견하가 모르기를. 언젠가는 알게 될지 몰라도, 이성을 잃은 그가 마구 살육을 저지르게 하기보다는, 자신이 안세규를 ‘적절히 처리’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그렇게, 겉으로 드러난 표정 안에 각자 생각을 감추고, 세 사람은 일단 온화한 얼굴로 마주 앉았다.

당장의 일을 해결하기 위해.

“……안 보낼 수는 없겠죠? 외무장관님.”

리안이 주어를 생략했어도, 모두가 알아들을 수 있었다. 황제를 ‘구출’하러 국경을 넘게 해달라는 서부군의 요청을, 승낙할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문제를 두고 나온 말이었다.

“유감스럽지만, 그럴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음, 이야기를 꺼내기 전에 먼저 정리를 하는 게 순서였을 것 같은데…… 외무장관께서도 ‘고려의 영토 확장’에는 부정적인 입장이시죠?”

“그렇습니다.”

고려의 영토 확장. 이는 침략행위뿐만 아니라, 루우가 몽골의 황위를 계승해 동군연합을 형성하고, 실질적인 영토가 넓어지는 것까지 포함한다.

이를 반대하는 데에는 세규와 리안 모두의 의견이 일치했다. 그렇기에 두 사람은 헌법에 황제의 ‘거부권’에 제한을 두는 등, 황제권 견제를 위한 여러 조치들을 넣는 데 합의했었고.

견하는 말없이 다른 두 사람의 표정만 살폈다.

-그러고 보니, 주견하는 동군연합에 찬성하는 쪽이었던가.

주견하는 루우의 권력이 다소 늘어나는 걸 감당하는 대신, 카라코룸에서 리안의 권력을 극도로 강화할 생각이다.

그런 방향으로 가도 늘어난 태사의 권력을 통해 황제권을 제한할 수 있겠지만…… 세규가 보기엔 어디까지나 차선책일 뿐이다.

최선책은, 그 전에 황제 루우에게 제동을 거는 것.

“이번 일은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줬습니다. 황제를 헌법이라는 규정에 따르도록 만들어도, 황제가 그 저지선을 돌파하는 방법을 고안해낼 수는 있다는 것 말이죠.”

법망 피하기. 그것은 단순히 ‘법에는 그런 구절은 없는 걸’하면서 문자 그대로의 해석을 적용, ‘언급되지 않아서 금지되지도 않은 행위’를 저지른다는 의미가 아니다.

애초에 법은 그런 저능한 방법으로 회피할 만큼 허술하지 않아서, ‘언급되지 않은 위법 행위’를 막을 방법들도 얼마든지 있다.

정말로 법망을 교묘하게 피하는 방법. 그것은 법의 근본적 목적으로 돌아가 보는 것이다.

“법 또한 국가의 존속을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으니까요. 즉 국가원수가 국가의 존속을 위해 ‘고도의 통치 행위’를 한다면…… 그것을 저지할 마땅한 방법이 없습니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지만, 법을 좀 더 보완하는 수밖에요.”

“그런다고 해도 ‘황제의 외국 군주 계승을 금지한다’는 법을 만들 수는 없죠. 그랬다간 그 법이 어떤 목적으로 만들어졌건 간에 내일 당장이라도 정권이 날아갈 겁니다.”

잊어선 안 된다. 지금 루우는 정말로 국민들에게 ‘사랑받는’ 황제다.

“일단은 서부군의 개입을 허가하고, 몽골 정부에 양해를 구하되, 제국최고회의에서는 ‘해외에서의 목적이 달성된 군은 즉각 철수하고, 그렇지 않으면 반역으로 간주하는’ 법을 입안한다든가…… 해야 할 겁니다.”

안세규는 한숨과 함께 덧붙였다.

“그리고, 군이 먼저 ‘정치적 이유에 따른 작전을 제안’하는 것을 엄격히 금지해야겠고요.”

리안은 그 제안에 끄덕이면서,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지난번 숙군, 제가 ‘정치적인 배려’로 조유관 대장은 제외했지만, 외무장관께서도 더 두고 볼 수는 없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세규의 눈에 힘이 들어간다. 그가 말한 ‘돌파구’가 바로 이것이다.

황제를 정면에서 막아설 수는 없다.

그러나 황제의 야심에 영합, 그 수족이 되어 자신의 야망을 채우려는 조유관 같은 인간은 제거할 수 있다.

황제는, 이렇게 간접적인 방식으로 저지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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