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서진 붉은 존재(8)
고려의 군국화를 막고 내적 발전, 민주주의 공화국을 완성하겠다는 이상은…… 이렇게까지 힘든 길인가.
-물론 민주공화국을 만들겠다는 자가 당에서는 전제권력을 휘두르지 못해 안달 나 있는 그 모순, 그건 잘 알고 있다.
그러나 필요한 조치라고 생각했다. 제국입헌당이라는 거대한 세력과 싸워나가려면, 그리고 황제 체제를 당연하다 믿는 수많은 민중의 고정관념과 싸워나가려면, 힘을 하나로 결집해야 했다.
그렇게 해서 살아남았다. 세규 자신은 외무성 장관으로서 연합 정권의 주요 각료가 되었고, 고려국민당은 제국입헌당의 뒤를 이어 두 번째로 세력이 강한 정당으로 자리 잡았다.
내부로는 힘을 결속하고 밖으로는 기존 제국 정부나, ‘범 알타이 인민동맹’처럼 의심스러운 집단과 협상한다. 내적인 조치와 외적인 조치 모두, ‘현실’과 타협하는 한 방편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허나 이런 타협에 의구심을 품는 무리는 끊임없이 고개를 든다. 자기들이 하면 더 잘할 수 있을 텐데, 하면서.
조유관도 그런 쪽이겠지.
그렇다면 이상을 밀어붙이면 어떨까. 여기서도 이상에 반발하는 자들이 무자비한 진압의 채찍을 들고 기다린다.
루우는 안세규가 자기 앞을 가로막을 기색이 보이자마자 칸발리크로 떠나 이런 상황을 만들어냈다.
이상, 타협, 이상, 타협, 그 사이를 끝없이 오가며 균형을 잡는 묘기.
언제쯤 그런 일이 끝날지 알 수 없고, 이해해주는 자도 같은 편이 되어주는 자도 거의 없다.
그렇기에 세규는 ‘외로운 싸움’이라는 말을 입에 올릴 수밖에 없었다.
당수인 세규의 침통한 표현에 방 안의 모두가 말을 잃었다. 서로 눈치를 살핀다. 뭔가 위로의 말이라도 해야 할까? 격려로 기운을 북돋워 줘야 할까?
아니면 늘 그렇듯, 또다시 번뜩이는 지혜로 대책을 찾아내길 기다려야 할까.
당 간부들의 머릿속을 오간 세 가지 대책 모두 답이 아니었다.
누군가 회의실 문을 두드린다. 허락이 떨어지자 들어온 그 사람은 당수를 비롯한 간부들의 눈치를 잠깐 살피더니, 힘겨운 의무를 수행한다는 듯 말했다.
“태사께서 장관님과의 오찬을 제안하셨습니다.”
생각에 골몰해 있던 세규가 고개를 든다. 태사는 지금 무슨 이유에서 자기를 만나고자 하는 걸까.
현 사태에 관한 이야기가 나올 것은 확실하다. 그렇다면 태사는 파병, 즉 루우의 영향력이 확대될 군사 개입에 찬성하는 입장일까?
아니면 반대로 루우를 저지하기 위해 세규의 협조를 필요로 하는 걸까.
세규의 눈이 번뜩인다. 낮은 목소리가 뱃속에서 서서히 밀려나온다.
“여기에 돌파구가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
열차는 혹시 모를 파멸인의 습격에 대비해 칸발리크 외곽의 한 역까지 멈추지 않고 달렸다.
실제로 방어선 안쪽과 도시 외곽을 오가며 몇 번 습격을 당한 적이 있었기에, 열차에는 이단 몇 명과 일반 병사들이 탑승해 경비를 선다. 뿐만 아니라 기관총을 비롯한 각종 무장을 덕지덕지 붙여 두었다.
괴물이나 사람의 핏자국을 씻어낸다고 열심히 물을 뿌려대긴 했지만, 보급을 위해 계속 왕복해야 하는 사정상 꼼꼼히 씻어낼 수는 없었다. 결국 군데군데 핏자국을 묻힌 채, 밤공기를 가로지르며 달려야 했다.
거기에 더해 열차 표면에 남은 긁힌 자국, 뭉그러지거나 부러진 부속품들 때문에, 마치 어둠 속을 달리는 유령 열차처럼 보였다.
“유령보다 더한 게 나오는 도시지만…… 말이지!”
열차 지붕 위.
하늘에서 곧바로 내려온 파멸인 하나를, 거대한 박도가 가른다.
아래에서 위로 올려 치듯이 검광이 지나간 뒤엔, 흩뿌려진 피가 달리는 열차 표면을 따라 길게 늘어진다. 두 조각난 파멸인의 시체 중 한 토막은 철길 저편으로 사라졌지만, 다른 한 토막은 열차 지붕 위를 퉁, 하고 두드리며 뒤쪽으로 굴러간다.
“열차가 파멸인의 습격을 받지 않는 날도 있다고 해서 은근히 기대했는데, 하필 오늘은 날이 아닌 것 같아!”
루우도 그렇게 외치며 언월도로 열차 오른편에서 달려드는 파멸인 하나, 그대로 휘돌아 왼편에 달려드는 파멸인 하나를 벤다.
짐승처럼 울부짖기라도 하면 싸움에 맛이라도 있겠지만, 이 파멸인들은 어찌 된 영문인지 지금도 높게 갈라지는 새 울음을 낸다.
“……소름 끼쳐.”
칼날에 묻은 피를 떨쳐내며, 효윤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떨군 핏방울들이 바람에 흩날려 열차 뒤편으로 멀어진다.
효윤의 긴 포니테일도 바람에 깃발처럼 흔들린다. 루우는 그 광경을 보다가 밤의 어둠, 그리고 하늘 위에 떠 있는 구체들을 노려본다.
“먹구름이 걷히질 않아.”
이렇게까지 먹구름이 계속 도시 위를 덮고 있다면, 일반적인 기상 현상으로서의 먹구름은 아닐 것이다. 분명, 지금 이 상황과 관계가 있겠지.
이제는 먹구름 너머의 하늘이 그리울 지경이다. 대체 저건 정체가 뭘까.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 온 도시가 우울증에 시달리겠는걸.”
총기들이 불과 소음을 내뿜는다. 또 시작이다. 멀리서 열차를 노리고 달려드는 괴물들.
루우와 효윤, 두 소녀를 비롯한 이단들도 각자 무기를 고쳐잡았다.
“……단순 괴롭힘, 이겠지 이거.”
열차나 선로를 완전히 파괴해서 보급을 끊겠다는 생각으로 덤비는 게 아니다. 그랬다면 지금쯤 선로 보수 공사에 매달리느라 정신이 없어야 하니까. 보급선이야 당연히 끊어졌을 테고.
요컨대, 그저 ‘보급이 끊어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끝없이 심어주기 위한 움직임.
황궁을 중심에 둔 방어선을 공격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나라가, 황실이 위협받고 있다는 그 ‘느낌’을 위한 행동이다.
그러면서도 방어측의 희생자는 끊임없이 나오는데, 공격하는 쪽의 인명 피해는 전혀 없다. 아니 애초에 무슨 방법으로 이런 일을 벌이는지, 대체 누가 벌이는 건지도 전혀 알 수가 없다.
쯧.
루우는 혀를 찼다. 기관총을 맞고서도 결국 열차까지 근접해, 놀라운 속도로 달리는 괴물이 보인다.
다시, 정신없이 베어 넘겨야 할 때다.
***
열차는 어쨌든 무사히 칸발리크를 빠져나와, 외곽 쪽 한 역에 도착했다.
여기는 몽골군이 장악하고 있어서, 조금은 긴장을 풀어도 된다.
사실 여기서 루우를 비롯한 고려 측 일행만 호위를 받으며 빠져나가 귀국해도 되지만, 루우는 그러지 않았다.
그녀가 노리는 바는 그게 아니었으니까.
계속 칸발리크에 머물며 그녀를 ‘구출’하겠다는 고려 측 움직임을 기다려야 한다.
그리고 한편으로, 오늘은 방어선 바깥에 머무는 시민들의 민심을 살피는 것이 목표다.
화물 열차에 짐이 실리는 걸 보다가, 루우는 효윤에게 손짓했다.
두 소녀가 역을 떠나려 할 때, 장교 하나가 정말 괜찮겠냐고 물었다.
“중요한 작전이다. 방해하지 말아줬으면 좋겠군.”
이 두 마디 말로 장교를 입 다물게 하고, 루우와 효윤은 골목의 어둠 속으로 잠겨 들어갔다.
으슥하고, 인적 없는 골목을 상상했는데, 생각보다 사람이 많았다.
그렇다고 붐비는 건 아니지만, 드문드문, 사람들이 여기저기 웅크리고 있었다.
“……왜들 이렇게?”
루우가 의문에 차 중얼거리자, 효윤이 조용히 추측을 내놓는다.
“큰길에는 못 나가니까 그런 거 아닐까. 황궁 쪽으로 집중 공세가 시작된 이후엔 골목이 아니라 좀 널찍한 길에서 파멸인이 나오잖아.”
그건 그렇다. 골목에서 나타나는 것과 큰길이나 공원 등지에서 나타나는 것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한참 그렇게 골목을 걸어도 별달리 이상한 광경은 보이지 않는다.
밭은기침 말고는 거의 소리가 들려오지 않는 골목. 싸우거나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도 들려오지 않고, 눅눅한 공기만 피부에 들러붙는다.
골목이 너무 후미진 탓일까? 두 사람은 조금 넓은 길로 나가보기로 한다. 파멸인 한두 개체쯤 마주쳐도 처리할 자신은 있으니까.
그렇게 걷다 보니, 한참 만에 루우와 효윤이 발견하고 싶어 했던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밤은 한층 깊어졌지만, 새벽이 오려면 아직 멀었다. 그러니까 저기 저렇게, 공터 구석에 모여 있는 사람들은 일찍 일어나 종교행사에 참여하고 있는 게 아니다. 명백히 ‘밤’에 이루어지고 있는 행사다.
“주변 사람들 눈에 안 띄려고 밤에 저러는 거라기보단, 그만큼 열성적인 신도들이라는 의미겠지.”
전날 방어선 안쪽에서 본 의식은 낮에도 치러지고 있었으니까, 특별히 시간에 제약을 둔 종교는 아닌 듯하다.
“……방어선 안쪽의 모임보다는 규모가 좀 큰데?”
효윤의 말대로 다섯에서 여섯 배 정도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다.
뭔가…… 웅얼대면서.
여러 사람이 한꺼번에 웅얼대는 말이라 소리 자체는 컸지만, 빨라서 효윤은 알아듣기 어려웠다.
“루우, 뭐라는 건지 해석 좀 해줄 수 있어?”
루우는 눈살을 찌푸리고 귀를 기울인다. 잠시 뒤, 루우의 입에서 저들의 웅얼거림이 고려어로 번역되어 나온다.
“기도문 같은데 이거…… ‘우리가 물질에 지나지 않음을 고백합니다, 우리에게 영혼이 없음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영혼을 갈망하는 탐욕에 휩쓸리지 않도록 우리를…… 우리의 피를 양식으로 삼으사…… 모든 생명에 신성(神性)이 없음을 알고 우리의……’?”
루우가 고개를 갸웃한다.
“번역은 할 수 있겠는데 전체 문장이 무슨 의미인지는 잘 모르겠어.”
“그냥 나오는 대로 지껄이는 걸까?”
“그럴지도 모르지. 기도에 깊이 몰두한 나머지 혀랑 의식이 따로 노는 사람들도 있으니까.”
종교 의식을 치르는 사람들 중에, 어떤 남자가 비틀대며 일어난다. 비척비척, 그대로 몸을 돌려 골목 안으로 사라진다. 누구도 그런 남자를 제지하지 않는다.
루우와 효윤의 눈이 모두 그 남자를 향해 있다가, 서로를 바라본다.
“쫓아가 보자.”
루우의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두 소녀는 달렸다.
남자는 멀리 가지 않았다. 비틀대는 걸음이니 당연했다.
그러나.
루우와 효윤이 골목 안으로 들어오자 흘끔, 고개를 돌려 그녀들을 바라보고,
그 역시 뛰기 시작했다.
“저 사람 무슨……?”
방금까지 비틀대던 모습은 대체 뭐였는지, 이단 같은 다릿심으로 달린다. 아니, 이단 같은 게 아니라 이단인가?
이런. 까딱하단 놓치겠어.
골목의 어둠 속으로 자꾸만 숨어드는 남자를 필사적으로 뒤쫓는다. 시야에서 놓치면 그대로 놓치게 된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남자가 달리는 속도가 떨어졌다.
남자는 ‘쿠겍, 크엑’하는 이상한 소리를 내며 허리를 굽히고 멈춰 섰다.
어두워서 잘 보이진 않지만, 구토하는 듯하다. 바닥에 액체성의 뭔가가 추적추적 떨어진다.
“이봐, 우리는 경찰도 뭣도 아니야. 그냥 묻고 싶은 게 좀 있어서……”
루우는 그렇게 말하며 천천히 다가가려다, 말과 걸음을 동시에 멈췄다.
돌아선 남자의 시뻘겋게 충혈된 눈이, 골목의 얼마 안 되는 빛 속에서도 보였기에.
그리고 입가를 검붉게 물들인 저건…….
“피잖아.”
“아저씨, 몸이 안 좋으면 병원에 데려다줄게. 우리는 그만한 돈도 있으니까. 신원도 보증해 줄 수 있어. 다만 몇 가지 말을 좀……”
남자가 왼손을 들어 올린다. 검지 하나를 세운다.
손가락 끝이 가리키는, 골목의 좁은 하늘에는
붉은 구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