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서진 붉은 존재(7)
“내 불찰이야.”
집무실에 들어서자마자 마주한 태사의 얼굴엔, 오랜만에 피로와 짜증이 가득 차 있었다.
“황제가 칸발리크로 가겠다고 했을 때 그 의도를 짐작했어야 하는데, 판단력이 흐려졌었나 봐.”
그렇게 말하며 리안은 양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었다.
견하는 그런 그녀를 탓할 수 없었다. 연인이기 이전에, 인간인 이상 어쩔 수 없다. 대공황과 국내 경제, 국내 정치 세력 간 균형과 견제, 외교와 무역, 파멸인을 둘러싼 이해할 수 없는 사건들……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이 모든 것들을 스물한 살 여자애가 감당할 수는 없다.
반드시 빈틈이 생기기 마련.
거기다 견하도 ‘루우에게 뭔가 숨은 의도가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냥 입을 다물었다.
견하는 루우의 몽골 황위 계승을 통한, 리안의 권력 확대를 바라니까.
그러나 견하에겐 그 외에도 침묵할 이유가 또 하나 있었다.
-다소 여유가 있다면 부탁 하나 해도 될까?
-나중에 부탁할 거리가 생겼을 때, 들어줄 수 있는지 알고 싶은 거지.
작년에 루우에게 했던, 부탁 하나 들어주겠다던 약속.
루우는 그 약속을 꺼내 들었다.
결국 리안의 의향과 루우의 꿍꿍이가 충돌하는 자리에서 루우의 손을 들어준 꼴이지만, 그래도 견하는 그것이 최종적으로는 리안을 위하는 길이 되리라 믿는다.
그렇기에 루우의 ‘침묵해달라는 부탁’을 들어주는 데 망설임은 없었다.
“누나가 그렇게까지 자책할 일은 아니에요. 루우는 누나의 반대에 부딪히면 다른 수단을 밀어붙였을 테니까. 그게 어떤 수단일지는 모르겠지만요.”
리안은 훗, 하고 조금 지친 웃음을 흘린다.
“그것도 그렇네.”
견하는 화제를 지금 벌어지는 일로 옮기기로 한다. 대책을 논의하다 보면 리안의 기운도 돌아올 것이다.
“파멸인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서 칸발리크 황궁을 포위하고, 우리 황제는 마침 카간과 정상회담을 하러 간 와중에 거기 고립되어 있다. 제가 전달받은 현 상황은 이런데, 추가 정보가 있나요?”
여기서 ‘추가 정보’는 외부에는 알려지지 않은, 태사의 측근이나 다른 고위 관료에게만 전달된 사항을 말한다.
“시내를 관통해서 황궁 앞까지 이어지는 운하, 그리고 사방으로 통하는 철도는 제대로 장악하고 있는 모양이야. 이 ‘파멸인’들이 인간을 작살내기는 하지만 철도나 건물을 파괴하는 건 아니어서.”
“이상할 정도로 ‘인간’을 죽이는 데 집착하는 괴물이네요.”
“단순히 모든 인간을 향한 공격성을 드러내는 괴물이라고 볼 순 없어. 의도를 가지고 움직이는 괴물이지. 밤에 함부로 나다니는 민간인을 공격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공격은 여기,”
리안은 쌓여있는 서류 중에 칸발리크의 시가를 그린 흑백 지도를 꺼냈다. 책상 위에 펼친 지도에 손가락을 한 바퀴 돌렸다.
손톱 끄트머리와 나무 책상 사이, 종이가 마찰하는 소리.
듣기 좋은 소리라고 생각하는 견하의 귀에, 역시 듣기 좋은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방벽을 뚫는 데 집중되어 있어. 그다음으로 많은 수가 달려드는 쪽은 도시 외곽. 밖에서 진입하려는 몽골군 병력을 막고 있지.”
황궁과 중심가를 지키는 방벽.
그걸 공격하는 파멸인의 포위망.
그들을 바깥의 공격으로부터 지키는 파멸인 무리의 방어선.
그걸 또 포위한 몽골군 부대가 형성한 전선.
“……이런 농담이 적절할진 모르지만 마치 4중 성벽 같네요.”
“복잡하게들 얽혀 있는 4중 성벽이지.”
“안쪽에서 뚫는 건 무리라 하더라도, 밖에서는 왜 못 뚫는 거죠? 파멸인 수가 그렇게 많은가?”
“그런 측면도 있지. 애써 제거해도 공중에 떠 있는 구체들이 계속 파멸인을 생산해내니까. 그걸 제거하려고 몽골에선 공군도 동원한 모양이지만, 우리가 했던 것처럼 쉽게 제거되진 않는 모양이야.”
“하지만 물량을 퍼부으면 돌파구가 없진 않을 텐데…… 역시 ‘정치적인 이유겠죠?”
“경제적 이유도 있지. 두 이유가 명확하게 따로 분리되지 않기도 하고.”
이미 몇 번 ‘거대한 파멸인 개체’를 처리하기 위해 포격을 퍼붓기도 했지만, 그건 상대적으로 경제적, 정치적 중요성이 떨어지는 곳이거나 큰 도로 한복판에 한정된 이야기다.
혹은 방벽 주변의 긴급한 곳이거나, 나중에 빠르게 복구할 자신이 있는 곳이거나.
칸발리크는 태평천국에게 한 번 빼앗겼다 수복한 수도다. 그 수도의 부흥을 위해 바친 지난 20년 세월은 결코 짧지 않다.
외세의 침략도 아니고 내부에서 일어난 이런 테러 때문에 다시 전쟁터처럼 돌아간다는 건, 서민도 고위층도 받아들이기 힘들다.
“이미 그렇게 되어가고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무제한 군사 작전을 허가하는 건 망설여지겠지. 안 그래도 수도가 이런 지경이 되다 보니 경제적 타격도 점점 커지고 있는데, 아예 수도가 전쟁터라는 걸 인정해버리면…… 몽골이 간신히 유지하는 체면도 구겨질 테고.”
단순한 체면 문제는 아니다. 이미 몽골에서 외국인들의 투자가 빠져나가고 있다. 몽골 정부가 상황이 심각하다고 공식적으로 인정하면 그런 흐름은 더욱 빨라질 것이다.
“그런저런 이유로 제대로 된 해결책은 내놓지 못하고 있어.”
“하긴 우리도 그래서 ‘군인’들을 보내놓고는 ‘구조대’라고 내세워야 했죠.”
“어쨌든 방벽을 향한 파멸인의 공세는 상당한 듯해. 사람처럼 총 좀 맞는다고 죽는 게 아니라, 괴물이다 보니 방벽 가까이로 접근하는 개체도 많지. 그러면 이단이 나설 수밖에 없는데, 이단 전력은 어떤 군대든 늘 필요보다 부족하고.”
그래서 루우와 효윤을 비롯한 고려 측 이단들도 방어에 동원되고 있다. 당연히 교대도 제대로 못 하고 혹사당하는 상황.
“강력한 이단이라고는 해도 외국의 황제까지 전선에 동원하다니…… 상황이 급하긴 한가 보네요.”
“상황이 급해서 몽골 정부가 루우에게 전선에 나서 달라고 한 것도 맞지만, 루우도 노림수가 있어서 승낙했을 거야.”
그렇게 말하곤 리안은 다시 서류의 산을 뒤져서 신문 하나를 끄집어냈다.
이제 막 깨치기 시작한 몽골문을 더듬더듬 읽어나갈 필요는 없었다. 1면에 커다랗게 박힌 사진에, 루우의 모습이 보였으니까.
사진 속 루우는 오른팔…… 아니 오른팔로 잡은 총 혹은 대포로 보이는 무기에서 벼락을 뿜어내 거대한 파멸인 하나를 분쇄하고 있었다.
“노림수…… 라면 이렇게 파멸인 격퇴에서 활약하면서, 칸발리크 시민들의 민심을 사로잡는다는 거겠죠.”
“몽골 정부 입장에서는 검열하기 애매한 이야기기도 하니, 이런 보도가 나오는 걸 막을 순 없었겠지.”
“역시 ‘칸발리크 안에 고려의 황제가 고립됐다’는 상황도, 이런 의도의 연장선에 있겠네요.”
“루우가 지금 같은 위기 상황을 구체적으로 그려가면서 구상하진 않았을 거야. 하지만 그 정도 위기에 처할 거라는 계산은 하고 갔겠지. 그러면 조유관이 움직이리라는 것도 엿봤겠고.”
화제는 루우에게서 조유관 쪽으로 옮겨간다. 견하의 신경이 날카로워진다.
“역시 조유관이 움직였나요?”
“제안은 올라온 상태야.”
리안은 한숨을 내쉬며 머리칼을 한 번 쓸어넘겼다.
“‘황제 폐하의 위기라는 급변 사태를 맞아, 불가피하게 서부군 단독으로 구출 작전을 준비 중임. 다만 국경을 넘는 사안에 관해서는 군 최고 통수권자의 허가가 필요함’이라는 데, 뭐 이쯤 됐으면 국경을 넘을 준비는 끝냈다고 봐야지.”
“루우가 칸발리크로 갔을 때부터 준비해왔다가, 이런 사태가 터지니 기다렸다는 듯이 의견을 상신한 느낌이네요. 누나 말대로 역시 조유관은……”
“……‘위험한 사람’이지.”
“하지만 위험한 인간이라고 대놓고 말할 만한 여지를 안 주는 사람이에요.”
“‘황제 폐하의 구출’이라는 아주 명확한 명분을 내세웠지. 이걸 어떻게 트집 잡을 방법은 없고…… 그래서 생각한 거야. 아, 이거 완전히 당했군.”
“루우와 조유관이 연계되어 있을 가능성은?”
“조유관이 그 정도로 시건방진 시도를 할 사람은 아니라고 봐. 그랬다면 우리의 눈에 더 일찍 띄었을 텐데, 조유관은 그런 위험을 감수하진 않겠지. 어디까지나 루우가 ‘자신이 위기에 처하면, 조유관이 움직일 것이다’는 계산 하에 그의 움직임을 유도한 걸 거야.”
“그러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서부군을 움직이면 더 이상 ‘구조대’라고 발뺌할 수는 없을 거예요.”
군사 개입, 하실 겁니까? 견하의 눈은 그렇게 묻고 있었다.
리안은 또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눈가의 피로가 더 짙어진 느낌이다.
“시간은 멈추지 않고 흐른다지만, 그래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
***
-황제 폐하께서 칸발리크에 고립된 와중에, 그분의 안전을 위협하는 범 알타이 인민동맹 세력을 계속 지원할 수는 없음.
-범 알타이 인민동맹에 대한 지원을 중단하고, 황제 폐하의 구출 작전을 준비하겠음.
-이에 따라 서부군은 몽골 국경을 돌파할 준비에 착수함. 태사부의 허가가 떨어지는 즉시 행동에 옮기겠음. 외무성은 몽골 측과 충돌이 없도록 외교적 조율을 해주기 바람.
-현재 서부군이 확보한 전력, 내전을 통한 병사들의 숙련도를 감안했을 때, 키타이나 낭키아스의 개입이 이루어지기 전에 기습적으로 칸발리크에 도달할 수 있을 것으로 추정됨. 칸발리크에 고려군이 도달하면 두 칸은 개입을 포기하거나, 서부군의 역량만으로 개입을 저지할 수 있음.
조유관 이 새끼가.
고려국민당의 당수인 자신의 뜻을 정면에서 거역했을 뿐만 아니라, 군인이 멋대로 정치적 의견을 내세우고 있다.
그 정치가 국내 문제에 관계된 것이든, 국외 문제에 관계된 것이든 가리지 않고 폭넓게.
지금 태사부의 집무실에서 태사가 짜증을 내는 것처럼, 외무성 장관 안세규의 짜증도 극한까지 치밀어 오르고 있다.
지난번에 태사, 감찰국의 힘을 빌려 당내 반대 세력을 축출할 때, 역시 조유관도 날려버렸어야 했을까? 아니면 리안의 숙군 리스트에 은근히 조유관의 이름을 올렸어야 했나?
조유관을 대신할 고려국민당 측 장성들의 이름이, 세규의 머릿속을 빠르게 오르내린다.
“장관님,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조유관 대장의 말대로 범 알타이 인민동맹에 대한 지원을 중단할지, 아니면 다른 루트를 찾아볼지…… 결정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고려국민당 주요 간부들의 회의. 지난 숙청 이후 모두 안세규의 편이거나, 적어도 위험하지 않은 인사들만 앉아 있다.
다른 간부가 그 의견에 반대 의견을 내놓는다.
“이젠 너무 위험성이 커졌습니다. 그동안 범 알타이 인민동맹을 지원한 건 뭐 둘러댈 구실이라도 있었다지만…… 이젠 아닙니다. 명백히 국가원수의 암살을 사주한 세력으로 낙인찍힐 수 있어요. 우리를 지지해주는 국민들도 ‘반역’을 용서하진 않을 겁니다.”
그렇다. 반역. 그 어떤 열성 지지자라도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은 정당에는 결국 지지를 포기하고 만다.
황제에 대한 반역은 그 누가 생각해도 용납할 수 없는 선이다.
한참 만에야 간신히, 안세규는 의견이라고 할 수도 없는, 소감 한마디를 내뱉었다.
“……외로운 싸움이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