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서진 붉은 존재(6)
물론 견하의 이런 배치는, 재연도 별다른 말 없이 그냥 자리만 지키게 만드는 조치이기도 하다.
어쨌든 삼한반도의 반군 잔당 진압을 위해 내려오긴 해야겠는데, 자기를 수행해 줄 사람이 필요하긴 했다.
마침 수도에 내버려 두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사람이 있어서, 그 사람에게 수행원 자리를 맡겼다.
카라코룸에 갔을 때도 그렇고, 아즈텍에 갔을 때도 마찬가지였던 일이, 여기서도 반복된 것뿐이다.
견하의 통제를 벗어나, 황제와 단독으로 대면해서 「다이온 연방 창설 계획」을 작성한 것과 같은 일이 일어나진 않을까. 그런 우려도 있었겠지.
하지만 반대로 견하가 없는 틈을 타서 누군가 재연을 제거해버리는 것은 아닐까, 하는 우려도 있다. 예를 들어 「계획」에 반대하는 안세규가 손을 쓴다거나.
거기에 덧붙여, 조금 악랄하다고 할 수 있는 이유도 있다.
-옛 동료들을 참살하는 작전에 참여하라.
하나의 시험. 통과의례.
물론 재연은 허동주 잔당 중 온건파에 속한다. 즉 강경파인 신수덕 파벌에 속한 사람이 아니었고, 따라서 저 잔당들이 토벌당한다고 해서 슬퍼할 이유는 없지만…… 그래도 씁쓸한 기분이 들긴 한다.
의견을 달리해 갈라졌어도, 한때는 허동주라는 우상을 중심으로 뭉쳤던 사람들.
그들이 이렇게 최후를 맞는 걸, 이번에도 또 지켜봐야 한다.
견하가 재연에게 바라는 것은 두 가지일 것이다.
하나는 이런 일로도 감정이 동요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줘라.
다른 하나는 이런 과정을 통해 천손민족협회에 대한 미련을 완전히 끊어내고, 제대로 된 자기 사람이 되어라.
재연은 그 두 가지 요구 모두 나름 충족시켜 줄 생각이지만,
-어디까지나 그것도 부수적인 거겠지. 견하에겐.
재연에게 요구하는 것들은, 허동주 잔당 토벌전에서 거둘 몇가지 소득에 덧붙이는 덤일 것이다.
삼한반도의 산악지역에 숨어서 계속 말썽을 부리는 허동주 잔당에 대한 보고가 태사부에 올라온 것이 며칠 전의 일이다. 견하는 그 소식을 듣자마자 토벌 작전에 참여하게 해달라고 태사에게 요청했다.
현장을 살펴보고 싶다는 이유도 있었겠지만, 반쯤은 칸발리크에 파견해주지 않는 리안에 대한 항의이기도 하다.
지금 견하는 어떻게든 공을 세우고, 동시에 감찰국의 명성과 영향력을 드높이려 노력 중이다. 칸발리크에서의 활약은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었을 터.
태사와의 사이에서 정확히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는 알 수 없지만, 칸발리크로 보내주지 않는다면 대신 여기 남쪽의 전장으로라도 보내 달라고 강하게 요구했던 것 같다. 태사는 마지못해 승낙했고.
“포로들을 데려왔습니다.”
장교 하나가 지휘소에 들어오면서 그렇게 보고한다. 지휘관은 만족스럽게 끄덕이며 재연의 얼굴을 살폈다.
“함께 보러 가겠나.”
“예.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혹시 아는 얼굴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몇 가지 절차를 거친 후에 처형될 테니, 그 전에 얼굴이라도 봐두고 명복을 빌어주자.
포박당한 채 무릎 꿇은 포로 몇 명이 공터에 있었다. 지휘관은 그들을 살펴보다가 부하에게 몇가지 질문을 던진 뒤, 다시 재연 쪽으로 몸을 돌렸다.
재연 역시 포로들을 살펴봤지만, 아쉽게도 아는 얼굴은 없었다.
“주 국장이 지금 자리에 없으니 포로들의 처리 방식을 함부로 결정할 수가 없군. 어떻게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하나?”
지휘관 입장에서는 ‘감찰국 국장의 대리’로 여기 남아있는 재연의 의견을 물을 수밖에 없다. 재연도 견하의 의향을 추측해서 대답할 수밖에 없지만.
“주견하 국장이 포로들을 이용해서 사진 몇 장 찍고, 영상도 촬영할 겁니다. 그러고 나면 주민들에게 이 강도 떼를 잡았다고 알려야겠죠. 혹은…… 주민들의 ‘복수심을 약간 만족시켜 줄 수도’ 있고요.”
재연이 덧붙인 말에, 지휘관의 얼굴에 의미심장한 웃음이 떠오른다.
“‘주민들의 판단에 맡기자’는 거군?”
“공식적으로는 우리가 현장에서 사살한 것이 되겠지만요. 뭐, 그래도 주견하 국장이 내려오는 대로 그렇게 해도 좋을지 물어봐야겠죠.”
감찰국의 명성과 영향력을 드높인다는 견하의 목표.
‘잔인하고 강력하다’는 평가는, 동명역 쿠데타 진압을 계기로 이미 널리 퍼져있다.
감찰국은 무섭다. 잔혹하다. 한 번 걸리면 뼈도 못 추린다.
공포는 좋은 감정이다. ‘절대로 적이 되어선 안 되겠다’는 위기감을 심어준다. 이런 위기감에 휩싸인 사람은 일단은 예의를 갖추고, 그 다음엔 친구가 되고자 하는 다정한 손길을 내민다.
하지만 공포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부분도 있다.
칼은 무서워도 어디까지나 도구일 뿐이다. 감찰국, 혹은 정치경찰실은 고려 사회 전반을 감시하고 지도하는 태사의 눈과 귀, 손이 되어야겠지만…… 거기에 만족하면 그냥 깡패집단이 되어버린다.
깡패집단의 유용성은 오래가지 못한다. 주기적으로 쓸모가 다하기 때문에 교체되는 일만 남는다. 좀 더 간략히 이야기하자면 숙청 대상에 이름을 올리게 된다.
감찰국이 생명을 지속하려면 그래선 안 된다.
감찰국은 직원들에겐 어깨 펴고 일할 수 있는 긍지를 주는 기관이자, 엘리트 코스를 밟고 싶은 유능한 인재들의 등용문이 되어야 한다.
그러려면, 감찰국은 공포 외에도 ‘도덕적 정당성’을 확보할 필요가 있다. 혹은 ‘정의’라 불리는 것을.
정의와 도덕을 낯간지럽고 유치한 것으로 치부하는 인간은 절대로 높이 올라가지 못한다.
실상이야 어쨌든 얼굴만큼은 정의롭고 도덕적이어야 한다. 그래야 사람이 모이고, 사람이 모이는 데에 따라 힘이 생기고, 더 높은 곳을 지향할 수 있다.
이번 토벌 작전은 감찰국이 ‘정의를 집행한다’는 인상을 심어주기 위한 절차다.
즉, 단순히 공포감만 주면 ‘무섭긴 하지만 더러운 일도 마다하지 않는 깡패집단’에 불과해지지만, ‘정의’를 확보하면 ‘무섭긴 하지만 어쨌든 죽어도 싼 놈들을 제압한 공권력’이라는 인상을 줄 수 있다.
명분을 확보한다.
그리고 그 명분은 영향력의 확대, 권력의 증대라는 실리를 가져온다.
명분은 실리에 앞선다.
명분은 실리를 낳는다.
따라서 명분은 눈앞의 작은 실리 따위보다 몇천, 몇만 배 더 중요하다.
이것이 아마 견하가 생각하는 바일 터.
포로들이 자해하지 못하도록, 군인들이 입에 재갈을 물린다. 그렇게 어딘가로 끌려가는 포로들을 보면서 재연은 태양의 열기가 내리누르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렇다면 나는 감찰국, 정치경찰실 안에서 어떻게 움직일 것인가.
***
태사는 향후 문하시중의 역할을 계승한 내무성 장관직을 신설한다고 했다.
견하는,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 자리를 차지하고, 더 나아가 리안의 태사 자리를 계승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결심한 견하의 생각은, 재연이 지금 추측하고 있는 바와 거의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견하는 미래의 일보다는 전장에서 받은 느낌을 정리하기에 바쁘다.
깊숙한 계곡 안쪽에는, 방향을 똑바로 잡고 접근하지 않는 이상 눈에 띄지 않는 적의 근거지가 있었다. 거기 있던 오두막들은 지금 모두 불타는 중이다.
그중 하나가 탄약고였는지 폭발음과 함께 불길이 확 치솟아 올랐다.
이 화재는 견하가 일으킨 게 아니다. 견하보다 조금 늦게 도착한 아군의 화력이 빚어낸 결과다.
“제때 도착해줘서 고맙습니다.”
견하가 감사를 표하자, 상사가 겸연쩍은 웃음을 지었다.
“아닙니다. 대령님이 몸소 활약해주신 덕분에 저희가 피해를 면할 수 있었습니다.”
“적 거점에서 이단 두 명이 튀어나왔을 때는 솔직히 죽는 줄 알았거든요.”
“하하…….”
정말이다. 견하가 내세운 촉수들을 능숙하게 베어내면서 거리를 좁혀왔을 땐, ‘허동주도 이렇게……?’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
다행스럽게도 아군이 더 능숙하게, 두 이단을 저격했다.
견하는 자신의 전투력을 과신하지 말아야겠다고 반성한다. 이런 데서 죽으면 정말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
야망도, 리안에 대한 자신의 마음도, 부모님의 복수도 모든 것이 무(無)로 돌아가니까.
상사가 말을 돌린다.
“그래도 이제 이 주변은 깨끗해졌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더 이상 주민들을 괴롭히는 놈들도 없을 테고, 억울하게 죽는 사람도 없어질 테고…… 대체 놈들은 왜 그런 짓을 벌인 건지.”
혀를 차며 고개를 돌린다. 분노가 차올라 욕설을 내뱉고 싶지만, 상급자 앞이라 참는 눈치다.
“……그러게나 말입니다. 게릴라전을 벌인다면 주민들 민심을 확보하는 게 우선인데.”
그래야 자신들의 정당성도 확보하고, 오래 숨어다닐 수 있었을 텐데. 친한 주민들 중에는 일부러 그들의 행방을 숨겨주는 사람도 나왔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학살과 약탈로 스스로를 고립시켰다.
“어차피 끝내 토벌될 것을 아니까, 마지막 발악을 한 걸까요?”
상사가 그렇게 추측하자, 견하도 동의했다.
“그런 의도였다면 제국 정부를 철저하게 괴롭혀주고 죽겠다, 뭐 그런 거였겠네요.”
“그리고 복수심도 있었겠죠. 그런 걸 감안해도 지독한 놈들이긴 합니다.”
지독하다. 그렇다. 누구도 항복하지 않았다. 포로도 전부 전투 수행이 불가능해져서 어쩔 수 없이 잡힌 것이지, 항복해서 포로가 된 자는 아무도 없다.
-뭐지, 대체?
신수덕은 외국인이 아니다. 내전, 즉 정치권력 투쟁에서 패배해 떠난 사람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작게는 ‘사면’이나 ‘복권’ 등을 노리고, 크게는 정계 복귀를 지향해야 한다. 아니면 아예 이런 싸움에 정나미가 떨어져서 외국인으로 조용히 살아가든지.
-복수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나.
허동주에 대한 복수, 죽어간 전우들에 대한 복수, 신수덕 암살 시도에 대한 복수.
하지만 아무리 복수가 중요하다고 해도…… 장기적인 전략까지 망쳐버린다면 의미가 없다. 신수덕은 그 정도 안목밖에 없는 인간이었을까?
-아니면 ‘우리가 있다’는 강렬한 인상을 남겨두는 걸 우선한 걸까?
악행도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한 방법이다. 어쨌든 사람들은 악당의 이름을 기억한다. 언젠가 고려 제3제국에 큰 위기가 찾아왔을 때, 신수덕이라는 사람이 있었지, 하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런 분위기를 타고 복귀할 생각일까?
말이 안 되는 것 같겠지만, 사람들은 악당의 강렬한 인상은 기억해도, 의외로 그가 저지른 악행은 ‘과거의 일’로 묻어버린다.
아마 ‘허동주도 잘한 게 있었어’, ‘신수덕도 학살은 했지만 훌륭한 면도 있었어’, 이런 식으로 여론을 선동하려 들겠지.
여기에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 과거는 용서하자’라든가, ‘공과 과를 공평하게 평가하자’같은 헛소리를 좀 첨가하면 신수덕이 돌아올 무대는 완벽하게 준비된다.
-그렇다면 그럴 여지 자체를 남기지 않는, 철저한 탄압만이 답이다.
끝없이 잔당을 색출하고 처형하자. 허동주 및 신수덕과 완전히 선을 그어버려야, 그들의 귀환을 막을 수 있다.
그렇게 결심하고, 견하는 이만 산에서 내려가자고 상사에게 말하려 했다.
하지만 통신병 하나가 그런 그의 말을 가로막는다.
“지휘소에서! 대령님 앞으로 연락이 왔습니다.”
“……? 무슨 일이죠?”
“수도에서, 즉시 대령님을 복귀시키라는 명령이 내려왔다고 합니다.”
“더 자세한 내용은?”
“극비라고 합니다. 즉시 복귀하라는 명령뿐……”
견하는 더 말을 듣지 않았다. 그는 상사에게 눈짓 한번 하고 홀로 산을 달려 내려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