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서진 붉은 존재(5)
삼한반도의 어느 산 아래, 이른바 ‘진압군’이라 불리는 고려군이 포진했다.
산 자체를 공군의 폭격이나 포병 여단의 포격으로 태워버리자는 이야기가 나왔지만, 진압군의 지휘관은 그 안을 거절했다.
“지금 지휘하는 병력으로 산 주변을 포위하고, 포위망을 좁혀 나가는 것으로 충분하네.”
물론 지휘관 본인의 생각이 어느 정도는 반영되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참관’을 위해 수도에서 내려온 주견하 대령의 ‘건의’가 결정적이었다.
“태사께서는 우리의 ‘명분’이 올바르다는 인식이, 이번 작전을 통해 삼한반도 전역에 뿌리내리길 바라십니다.”
그리고 ‘내전’은 이미 공식적으로 종료되었기 때문에, 여전히 전쟁 중인 듯한 인상을 주변 주민들에게 줘서는 안 된다.
따라서 폭격이나 포격처럼 요란한 군사 행동, 그 결과 일어나는 대규모 산불 등도…… 가급적 피했으면 한다고, 견하는 말했다.
“동명의 뜻이 그러하다면, 알겠네.”
동명의 뜻, 태사의 뜻이자 전쟁성을 비롯한 중앙정부, 제국최고회의와 황제 폐하의 뜻.
그런 무거운 의사를 짊어지고 온 대령이라면, 아무리 장성이라도 함부로 대할 수는 없다. 계급 이전에 ‘권력’이 진압군 지휘관을 누른다.
“저들은 ‘군인’이어서도 안 되고, 한때 군인이었던 자들의 ‘잔당’이어서도 안됩니다. 이념만 다를 뿐, 정치 싸움에서 패한 ‘정치 세력’이어서도 안 되고요.”
소년 대령은 날카로운 눈을 빛내며 덧붙였다.
“저들은 어디까지나 ‘도적 떼’여야 합니다.”
그 누구도 저들의 주의, 주장에 귀 기울이지 못하도록.
혹시 저들이 옳았던 것은 아닐까, 일부나마 옳은 주장이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조차 들지 못하게 해야 한다.
“그거야, 어렵지 않을 걸세.”
허동주의 반란군, 그 잔당.
그들 중 일부는 지난번 동명역 쿠데타 시도에서 상당수가 쓸려나갔지만, 여전히 많은 수가 삼한반도에 남아 게릴라전을 벌이고 있다.
‘삼한반도에서 끝까지 미리안 정권을 괴롭히라, 혼란을 빚어내라, 공포를 심어줘라’라는 신수덕의 지령.
그 지령에 따라 이들은 활동 지역 일대의 주민들에 대한 약탈과 학살도 서슴지 않고 있었다.
“저런 식의 활동은 주민들의 반감만 살 뿐이지.”
지휘관이 폐허가 된 마을을 둘러보며 말했다. 마을 어귀, 나무에 걸린 어린아이들의 시체. 병사들이 불에 탄 그 시체들을 조심스레 잡아 내렸다.
간신히 도망쳐서 살아남은 주민들이 땅에 주저앉아 눈물을 흘린다. 통곡할 기력도 없는 듯하다.
“입으로는 한족을 몰아내자, 고려민족만의 나라를 만들자, 잘도 떠들어댔지만, 결국 말뿐이군요.”
“역적 신수덕도 분명 허동주 휘하에서 세계대전에 참전했을 텐데…… 어쩌다 이 지경까지 타락했는지 모르겠군.”
“어쨌든 저들이 말하는 동포니, 민족이니 하는 것도 결국 정권을 찬탈하려는 수단이었을 뿐입니다. 그게 이렇게 백일하에 드러난 거죠.”
“……사진 자료를 넘겨주도록 하지. 저들이 누구고 우리가 누구와 싸우고 있는지, 국민들이 알게 하는 건 중요하니까.”
상황이 이렇기에 지휘관은 ‘저들을 도적 떼로만 취급받게 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고 했던 것이다.
“감사합니다. 반드시 며칠 내로 특보가 나갈 겁니다.”
주견하는 미소와 함께 그렇게 감사를 표하며, 산등성이 쪽으로 눈을 돌렸다.
그런 소년의 옆모습을 보며 지휘관은 곤혹스러움을 느낀다. 눈으로 들어오는 정보와 뇌가 받아들이는 것 사이의 괴리가 너무 컸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3학년짜리 애한테 대령이라니. 그리고 거기에 감찰국 국장이라는 감투까지 씌워서 장성을 감찰하라고 보내다니.
역할 정도로 아니꼬웠지만, 그런 감상을 드러낼 수는 없었다.
저 꼬맹이가 태사부에 찔러 바칠 말이 무섭기도 하지만,
꼬맹이 자체가 무섭기도 하다.
꼬맹이…… 라고 하기엔, 몇 번인가 본 적 있는 방첩 쪽 사람들 같은 인상이었으니까.
-동명역의 그 소문은 사실일까.
쿠데타군을 단신으로 진압했다, 반란군의 핏물이 역 바닥에 손가락 한 마디 깊이로 고였다, 내장과 사지가 역사 지붕까지 튀어 올랐다더라…… 등.
필요 이상의 잔인함과 냉혹함.
그런 게 소년의 눈에서, 피비린내처럼 확 풍겨왔다.
-겉모습은 어린애지만 속에 든 건 사냥개다.
미리안의 사냥개.
지휘관은 감각의 혼란을 떨쳐내고, 소년의 기백에서 느껴지는 것만을 믿기로 한다.
산, 적의 잔당이 숨어 있고, 저항 거점이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곳.
그곳을 계속 바라보고 있던 소년이 말을 잇는다.
“저들의 행동은 주민들에게 적개심을 불러일으키겠지만, 동시에 공포도 심어주겠죠.”
아무리 적대감이 커도, 상대가 압도적으로 강하고 흉포하게 느껴지면, 공포가 앞선다. 그 공포는 무력감으로 옮겨가고, 전의를 상실케 한다.
하지만 적대감은 여전히 남아 있다. 그 적대감은 누구를 향할 것인가.
“‘정부는 대체 우리를 안 지켜주고 뭘 하는가’, 이런 식의 생각으로 옮아갈 겁니다. 그건 곤란하죠.”
따라서 주민들의 공포를 덜어주고, 복수심을 만족시켜 주고, 정의가 실현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덜 요란한 방법을 택하긴 했지만, 그대로 병력을 동원해 산을 공략할 경우 인명 피해가 상당하겠죠.”
알면서 새삼 뭘. 지휘관은 그 말은 삼킨다. 그냥 주견하가 무슨 말을 하는지 듣기로 한다. 중앙의 ‘의사’가 내려온 이상 그의 재량권은 상당히 제한된다.
“저희 ‘감찰국’이 먼저 청소를 하겠습니다. 저희는 조용하면서도 인명피해를 줄일 수 있는 ‘확실한 수단’이거든요.”
***
아래에서 위로, 소년이 앞장서서 전진한다.
어느 골짜기에 적의 거점이 있는지는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사람’으로 빽빽하게 포위하고 좁혀 나가는 작전.
위치를 발각당할 우려가 있는 데다, 매복의 효과도 극대화하기 위해 적은 사격을 자제할 것이다. 그러니 그만큼 언제, 어디서 날아올지 모를 총알을 경계해야 한다.
하지만 주견하는 그런 건 신경 쓰지도 않는다는 듯, 지도상에 표시된 산의 중심부를 향해 나아간다. 마치 등산이라도 하듯이.
아니, 허리를 조금 굽히고, 한 걸음 확실히 미끄러지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 다음 걸음을 내딛는 그 여정은, 말 그대로 등산이다.
그렇게 꾸준히 오르고, 때론 내리길 수십 분.
첫 번째 총성이 울렸다.
하얀 촉수 수십 가닥은 소리보다 먼저 장벽처럼 치솟아 올라 견하를 지켜냈다.
“대령님! 괜찮으십니까?”
병사들이 바짝 긴장하며 총구를 들어올리고 그렇게 물었지만, 그 물음은 견하에게 닿지 않았다.
이미 머물던 지면을 박차고, 총알이 날아온 지점을 향해 직선으로 튀어 나갔으니까.
병사들은 조금 뒤에서, 멀리 떨어진 숲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요란한 총성과 비명만으로 상황을 파악해야 했다.
견하를 지원하기 위해 헉헉대며 달려 올라가 보니, 소년은 근처 작은 바위에 앉아서 쉬고 있고, 주변엔 시신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아니, 굵은 나뭇가지 위에 꽂혀 있는 몇 구를 제외하면 나머지는 아직 신음을 내는 산 사람들이다.
견하는 질문을 받기 전에 답한다.
“적당히 심문해봅시다. 적 거점의 정확한 위치를 알아내면 좀 더 수월해지겠죠. 못 참고 쏜 걸 보면 이 근처일 것 같긴 하지만.”
병사들은 끄덕인 후, 다친 포로들을 대충 묶어놓고 몇 가지 ‘심문 절차’를 밟았다.
욕설, 주먹이 뭔가를 두드리는 소리, 신음과 비명 몇 마디가 오가는 걸 들으며 견하는 수통에 든 물을 마셨다. 동명도 덥지만, 여기 삼한반도는 더 덥다.
턱이나 목을 타고 흐르는 땀을, 손등으로 쓱 닦아낸다.
이윽고 포로들을 심문하는 소리가 그치고, 병사들이 다시 견하 곁으로 다가왔다.
“대령님, 알아냈습니다.”
그러면서 땀이 약간 묻은 지도를 꺼내, 알아낸 적의 위치를 손으로 가리킨다. 견하는 그 위치들을 외워뒀다.
“그리고 포로들은……?”
처리할까요? 라는 생략된 물음이 이 선임 병사의 눈에 담겨 있다. 견하는 고개를 저었다.
“주민들에게 보여줘야 할 ‘전리품’입니다. 신문사에 보낼 사진도 찍고, 영화관에 보낼 영상도 찍어야 하고…… 내려보내서 간단한 치료 정도는 받게 해주죠.”
“알겠습니다.”
병사는 이해하고 포로들 쪽으로 돌아간다. 높으신 분들의 필요가 그렇다면 이제는 조심스레 다뤄야 할 ‘운송품’이다.
견하는 몸을 일으켰다. 병사가 지도 위에 가리켰던 위치와 주변 지형을 비교하고, 가장 가까운 지점 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견하 자신은 먼저 짓쳐들어가 한바탕 휘저어놓는다. 그리고 뒤이어 아군이 들어와 마무리를 짓는다.
포로들이 불지 않은 적의 거점도 있을지 모르니, 기습은 바짝 긴장하면서 대비하자. 어쨌든 자신이 먼저 공격받으면 충분히 방어도 가능하고, 역으로 위치까지 알아낼 수 있으니까.
적 쪽에도 이단이 있다면 조금 애를 먹겠지만, 그래도 후속으로 들어오는 아군이 어떻게든 해줄 것이다.
이렇게 몇 가지 방침을 정해놓고 움직이는 ‘토벌 작전’.
난장판이었던 산동 싸움이나, 정말로 죽을 수도 있었던 신환도역 전투에 비하면 상황은 훨씬 낫다.
그 전투들보다는…… 야별초 본부 제압 작전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이 더위와 습기만 좀 어떻게 할 수 있다면 더 낫겠지만.
견하는 약간의 불평을 중얼거리며 땅을 박찼다.
***
“‘확실한 수단’이 본인을 말하는 거였나.”
지휘관은 쓴웃음을 지으며, 일선 병사들에게서 들어오는 보고를 차곡차곡 정리한다.
여기, 자신의 지휘소에서 보기엔 확실히 ‘조용한’ 처리 방식이다. 현재까지 발을 접질렸다거나 하는 것 말고는 별다른 부상 보고도 없다.
지휘관의 곁에는 감찰국장 주견하가 자기 부관이라며 데려온 또 다른 소년, 한재연이 차를 마시고 있다.
한재연의 얼굴에는 대충 이렇게 돌아갈 줄 알았다는 듯한 희미한 미소가 감돈다. 지휘관은 그를 보며 소감을 말했다.
“자네 상관은 참 우수하군.”
“아, 예, 뭐.”
그렇게 얼버무리며 고개를 두 번 까닥인다. 주견하와 달리 이 녀석은 그냥 민간인. 계급 차이를 지적할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태도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
상관의 위세에 기대서 자기도 잘난 듯 날뛰는 부류인가. 아니면 뭔가 이유가 있어서 쓰는 사람일까.
얼핏 보기엔 고등학생끼리 분수에 맞지 않는 권력을 우연히 얻어, 그냥 놀고 있을 뿐인 것 같다.
그렇다면 나라 꼴이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건가…… 개탄하겠지만.
단순히 고등학생한테 감투를 씌워놓은 것이라면, 주견하는 이 한재연이라는 소년을 자신의 숙소에서 놀게 해도 된다.
굳이 주견하가 자신을 대신해서 지휘소에 남겨놓고 간 것은, 분명 의미 없이 한 행동은 아닐 터.
-주견하 같은 위압감이 느껴지는 건 아니지만, 주의해서 살펴볼 필요는 있겠군.
이 소년도 뭔가 감추고 있는 사람이라면, 조심스럽게 다뤄야 한다.
숙군 작업이 종결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았고, 이 토벌 작전도 자신의 충성을 증명하는 자리다.
주견하는 힘을 쓰는 쪽이고, 정말 ‘중앙’에서 보낸 끄나풀은 한재연일 가능성도 있다.
***
재연은 자신의 눈치를 보며 이것저것 계산하는 지휘관의 모습에 쓴웃음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그냥 나를 여기 심어놓는 것으로 지휘관을 통제하려 하다니, 짓궂은 수작이야.
한재연이 하는 일은 실상 아무것도 없지만, 주견하는 그를 활용해 현장 지휘관이 살얼음을 걷는 기분을 느끼게 만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