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서진 붉은 존재(4)
조유관은 태주갑 중령이 보낸 전보를 만족스러운 얼굴로 훑어보았다.
-전투력은 이단 중에서도 매우 우수함.
-지휘보다는, 자신의 그러한 전투력으로 전투를 풀어나가는 방식을 선호.
-그러나 필요한 상황에서는 적절한 결단력을 발휘할 수 있음. 이는 태사나 주변 인물들에게서 학습한 것으로 추정됨.
이상은 태주갑이 곁에서 관찰한, 최효윤 중장에 대한 평가였다.
“생각할수록 마음에 드는군.”
실력으로 보나, ‘중앙’에 대한 연줄로 보나 조유관과 그 동지들에게 아주 유용한 사람이 되어 줄 사람이었다.
“일단 친해져 두면 중앙에서 격변이 일어나도, 우리의 방패막이로 쓸 수 있지.”
최효윤 중장이 태사에게 ‘서부군과 조유관 중장에 대한 숙군은 다시 생각해주십시오’라는 말을 넌지시 흘리기만 해도, 살아남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어떻게 목숨을 좀 구해볼까 싶어 전쟁성 장관한테 굽신굽신, 외무성 장관의 연락을 기다리며 발을 동동 구르는 일은 이제 그만 거절하고 싶다.
“안 장관은, 중앙의 정치에 너무 취해버린 게 아닌가 싶어. 그렇다면 우리도 알아서 살길을 찾아야겠지.”
물론 안세규에게도 생각은 있을 것이다. 당장 공화주의 혁명은 무리겠지. 그 전에 힘을 쌓는 것이 먼저다.
하지만 그날이 오기까지, 그렇게 힘을 쌓기까지 얼마나 시간이 걸릴 것인가.
그 시간 끝에, 안 장관이 처음의 순수함을 잃어버리지 않는다는 보장은 있는가.
제국 정부와 타협에 타협을 거듭한 끝에, 어느 순간 그저 제국의 정부 수반이 되어 나타나지 않는다는 보장이 어디 있단 말인가.
게다가,
“솔직히 지난 숙군 때 안 장관의 대처는 실망스러웠지.”
태사 미리안이 제시한 명분에 반론하지 못하고 속수무책. 그 때문에 자신도 꽤 타격을 입었다.
선출직 장교 제도를 도입한다는 것도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고려민국 임시정부의 수장이었다고는 하지만, 언제까지나 안 장관 입만 쳐다보고 있어선 안돼.”
고려민국 임시정부가 새로운 정부에 통합되어 사라진 지금, 임시정부에게만 복종했던 지금까지의 방식도 바꿔야 한다.
안세규를 필두로, 민주공화국을 건설해나간다는 것.
옛 임시정부의 군인들은 그런 정치가들의 손발이 되어 혁명 전선에 투신한다는 것.
이런 방침을, 변경할 필요가 있다.
조유관의 눈이 또 하나의 전보를 훑는다.
-몽골 내 혁명세력에 대한 지원을 지금과 같이 지속해 줄 것을 요청.
-키타이와 낭키아스의 접촉에 대한 정보를 외무성에 제공해 줄 것을 요청.
안세규가 보낸 전보였다.
이 중 두 번째 요청, 지금 개봉에서 접촉 중인 두 칸에 대한 정보는 얼마든지 제공해주겠지만…… 첫 번째 요청은 조유관을 망설이게 했다.
그리고 끝내, 조유관은 안세규의 첫 번째 요청을 묵살하기로 했다.
묵살할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몰래 범 알타이 인민동맹에 제공해오던 모든 지원을 중단하기로 했다.
“더는 나 혼자 위험한 줄타기를 감당할 수가 없어요, 장관님.”
그러다 반역 혐의로 몰리면 누가 목을 내놓으란 말인가? 안세규가 내놓을 것인가? 안세규가 그런 의리를 지킬 사람은 아니라고 본다.
“나만 도마뱀 꼬리처럼 끊어내고 말겠지.”
방침을 변경하기로 한 이상, 그런 희생을 감당해 줄 이유도 없다.
“앞으로 우리 편은 내 판단으로 고른다.”
칸발리크에서 올라온 또 다른 보고.
파멸인, 그 괴물의 대량 출현.
도시 포위.
위기에 빠진 카간과…… 마침 그 도시에 들어가 있던 고려의 황제 및 구조대원들.
“개입하기에 딱 좋은 명분 아닌가?”
예전에 전쟁성 장관 강태훈과 나눈 이야기. 숙군을 피해 살아남으려면, 충성과 쓸모를 증명해야 한다.
그리고 군인의 충성과 쓸모는 전공을 세움으로써 가장 잘 증명될 수 있다.
“바라던 전장이 서쪽에 있다.”
친애하는 대원수 각하께 몽골에서 일어난 급변 사태에 대해, 서부군의 개입을 상신하자.
태사의 허락이 떨어지는 대로 달려가 적을 물리치고, 카간과 황제 폐하를 구출해 온다.
그렇게 하면 최효윤 중장뿐만 아니라 황제 폐하와도 연이 닿게 된다.
“원수 진급뿐만 아니라, 전역 후 장래까지도 생각해볼 수 있겠지.”
중앙과의 인연을 통해 중앙 ‘정계’로 진출.
강태훈처럼 전쟁성 장관 자리를 노려볼 수도 있겠고, 제국최고회의 의원에 출마해볼 수도 있겠다.
그때는 제국입헌당에 입당해도 좋고, 고려국민당에 들어가도 좋겠지. 고려국민당에 들어간다면, 안세규와 맞서서 그 당수 자리를 빼앗아올 자신도 충분히 있다.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든, 어쨌든 중앙에 진출해서…… 최종적으로는 태사가 되는 거다.
안세규에게 의존하는 방식이 아니라, 나, 조유관이 직접 움직인다.
그렇게 태사가 되면 민주공화국이라는 옛 동지들의 오래된 꿈도 실현할 수 있다. 아, 그때는 새롭게 탄생한 고려민국 정부, 그래, 임시정부가 아닌 정식 정부의 ‘통령’이라 불리게 되겠지.
권력을 향한 야심과 이상을 향한 희망 사이에서, 조유관은 코웃음을 한 번 던진다.
그는 언제까지나 몽상에 잠겨 있을 몽상가가 아니다.
전략을 생각해냈으면 실행에 옮기는 전략가다.
그는 종이와 펜을 꺼내 한편으로는 안세규를 위한 정보를 적으면서, 동시에 태사에게 보낼 의견을 작성해나갔다.
***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웅얼거림에 효윤은 눈을 떴다.
병사들에게서 들려오는 소리는 아니다.
교대로 방벽에서 보초를 서는 그들은, 근무 시간이 끝나면 돌아와 효윤처럼 곯아떨어지기 바쁘다. 언제 다시 전투가 시작될지 모른다는 긴장감이 피로를 배가시킨다.
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찾아 효윤은 시선을 돌렸다.
조금 멀리 떨어진 곳, 얼마 전에 들어온 피난민들이 모닥불 주변에 모여있다.
이제는 피난민을 수용할 공간이 모자라기 때문에, 저렇게 방벽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어도 어디로 가라고 할 수도 없다.
아니, 공간이 모자란다기보다는 공간을 확보할 행정력이 부족하다고 하는 게 맞겠지.
그 피난민 무리가, 웅얼거리고 있다.
아니, 단순히 대화를 주고받은 웅얼거림이 아니다. 어찌 들으면 희미한 노랫가락 같기도 하고, 불경을 읊는 소리 같기도 하다.
“종교의식……?”
“그런가 봐.”
혼잣말에 대답하는 소리에 효윤은 고개를 들었다. 얼음이 든 음료수 잔을 들고 루우가 옆에 다가와 있었다.
그녀는 앉아서 두 잔 중 하나를 효윤에게 내밀었다.
“마셔.”
“고마워.”
달콤 시원한 음료수. 오렌지 맛이다.
긴급 사태이기 때문에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이단을 방어선에 보내면서 루우도 이 고생을 하고는 있지만, 그래도 일국의 황제이자 카간의 딸이다. 이런 음료수가 제공되는 것도 그 덕분이다.
음료수를 삼키며, 효윤은 계속 그 피난민들의 의식에 시선을 던졌다.
“무슨 종교인지 모르겠어.”
효윤의 말에는 반쯤 물음이 담겨 있었다. 루우 너는 알아? 라는.
“나도 모르겠어. 크리스트교도, 불교도 아니야.”
“무슨 옛날 몽골 전통 종교나, 한족들 민속 종교 같은 것도 아니야?”
“그런 것까지는 잘 모르기도 하지만…… 느낌상 그런 것도 아닌 것 같아.”
그럼 뭘까. 신흥종교라도 되는 걸까?
효윤과 똑같은 결론에 이르렀는지, 루우가 중얼거린다.
“신흥종교일지도.”
신흥종교라면 대체 뭘 믿는 걸까. 생긴 지는 얼마나 됐을까. 지금 이 사태가 빨리 끝나기를 기도하는 걸까?
“몽골도 이제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는 국가니만큼, 사회적으로 문제를 일으키지만 않는다면 탄압하진 않겠지만…….”
루우가 삼켜버린 말은 뭘까.
사회적으로 문제를 일으키는 종교집단이라면 탄압해야 한다, 뭐 그런 내용이었을까?
궁금증은 금세 해소됐다.
“만약 저런 종교가 밖에서 퍼지고 있다면, 그것도 이 사태를 기점으로. 별로 좋은 현상은 아니라고 봐.”
단순히 사회문제를 일으킬 염려가 있으니까, 하는 차원이 아니다. 그건 현 정부의 행정력이 회복되는 대로 두들겨 패주면 해결되는 일이니까.
“진짜 큰 문제는, 방벽 안으로 들어온 피난민 중 저 정체불명의 종교를 믿는 사람이 상당히 많다는 거야. 검문소 쪽 장교한테 직접 들었어.”
그렇게 말하며, 루우도 음료수를 한 모금 마신다.
방벽 안에는 최근까지 없었고, 방벽 밖에는 갑작스레 많아진 정체불명의 종교활동.
“이번 사태를 계기로 태어났든지, 아니면 소규모 종교였지만 이번에 세를 불렸든지, 둘 중 하나겠지.”
이 사태의 성격을 생각해보면 더더욱 수상하다.
사람들이 평소에는 보지 못하던 기이한 광경이 하늘 위에 펼쳐지고, 도시 전체가 괴물들과의 전쟁터로 변한 칸발리크의 상황.
“뭔가 ‘이상한 것’을 섬기는 건 아닌가, 그걸 걱정해야 할 거야.”
“‘이상한 것’?”
“분명히 밖에도 그 붉은 악몽을 꾸거나 환상을 보는 사람이 있겠지.”
방벽 안 군인들 사이에서도 그런 악몽이나 착란을 호소하는 사람이 점점 늘고 있다.
“그것 때문에 사람들 정신에 문제가 생겼다면? 뭐 예를 들어서 저 구체나 파멸인을 신의 사자, 혹은 신 그 자체라고 주장하는 종교가 세를 불려나갔다면?”
“지나친 생각 아닐까. 그런 종교라면 방벽 안으로 들어올 이유가 없잖아. 밖에서 그냥 괴물들이나 섬기면 되지.”
“신의 뜻을 전파한다며 들어왔을 수도 있지. 아직 본색을 드러내지 않은 것일 뿐.”
두 소녀는 입을 다물었다. 바깥의 상황은 확실히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요령껏 괴물의 습격을 피해 살아남았지만, 그렇게 살아남아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어떤 지옥도가 펼쳐져 있을지 상상하기 어렵다. 루우의 추측이 유사하게라도 들어맞는다면, 몽골 정부가 앞으로 행정력을 회복하더라도 큰 문제가 생길 것이다. 그걸 어떻게 감당하겠는가.
혹은……, 이것도 하나의 추측이지만.
“그 종교 자체가 테러리스트들이 배후 공작을 펼친 거라면? 이 모든 혼란과 함께 몽골 제국 정부를 겨냥한 거라면?”
효윤의 추측에 루우는 끄덕인다.
“나도 같은 의견이야. 조사해 볼 필요가 있겠어.”
“어떻게 할 건데?”
“얼마 전에 들어왔던 보급 열차 하나가 오늘 밤에 다시 나갈 거야. 그 열차 호송에 이단들이 필요한데 우리도 거기 끼자. 나가서 실상을 한번 살펴보자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효윤은 몸을 일으켰다. 그렇다면 좀 더 제대로 된 침상에서 수면을 취해 둘 필요가 있었다.
그런 효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루우는 약간의 죄책감을 씹었다.
자신은 일국의 황제고, 그런 만큼 움직임 하나가 큰 파문을 일으키리라는 것 정도는 예상할 수 있었다.
그녀가 칸발리크로 오자, 자극을 받은 적들은 대규모 공격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녀는 적의 공격만 유도할 생각으로 여기 온 것은 아니었다.
안세규와 미리안, 두 사람이 겉으로는 루우에게 협조적이지만, 결정적인 부분에서는 내심 반대하고 있다는 걸 루우도 안다.
결정적인 부분, 즉 루우의 몽골 황위 계승에는 두 사람 모두 회의적이다.
그러니 판을 뒤흔들어 기회를 만든다.
판을 흔들기 위해, 루우는 목숨을 판돈으로 내놓고 칸발리크에 왔다.
적이 공격해온다. 고려와 몽골 양국 우호를 위해 칸발리크로 간 황제는 고립됐다. 이런 자극이, 누군가를 움직여야 할 텐데.
-특히 조유관 대장…… 숙군에서 벗어난 안정과 출세를 바라는 자라면.
이런 일에 말려들게 한 모든 사람들에게 미안해하면서도, 루우는 그 모든 사람들을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