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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소녀는 대원수가 되었다-165화 (165/541)

부서진 붉은 존재(3)

구체에서 나오는 희미한 붉은 빛이 구름 밑바닥을 붉게 칠한다.

방금 공중으로 떠오른 하나만 있는 게 아니다.

구체의 모습과 지상으로 뱉어내는 파멸인의 모습에 집중하느라 미처 눈치채지 못했지만, 고개를 돌려보니 이미 곳곳에 구체들이 떠올라 파멸인을 쏟아내고 있었다.

시야 한켠에는 이제 막 떠오르는 구체들이 시선을 잡아끌려 안간힘을 쓴다.

저게 뭐야 대체, 하고 중얼거려봤자 답해 줄 인간은 아무도 없다.

그래서 대신 필요한 외침을 목구멍 밖으로 쏟는다.

“전원! 트럭으로! 방어선 안으로 후퇴한다! 일일이 잡으러 다닐 수는 없어!”

효윤은 자기도 모르게 그런 명령을 내려대고 있었다. 몽골 측 지휘관도 비슷한 말을 했는지 병력이 속속 철수 준비를 한다. 통신병들이 열심히 어딘가에 연락을 넣는다.

아마 주변 부대에 출동해서 방어선을 강화하라는 연락을 하는 거겠지.

“주민들은 어떻게 합니까?”

태주갑이 물어온다. 효윤은 그 남자의 얼굴을 올려다보다가 입술을 씹었다.

여기서, 리안이나 견하라면, 혹은 다른 지휘관이라면 무슨 선택을 할까.

고민에는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았다.

“저들은 저들의 운에 맡기는 수밖에요. 우리는 후퇴해서 전력을 보존하고, 방어선을 유지하는 게 먼저입니다.”

파멸인들이 집 안에 숨어있는 이들은 건드리지 않기를. 그리고 집 안에 숨은 주민들에 비축 물자가 충분하기를.

파멸인이 수도나 전기 시설을 파괴하지 않는 게 그나마 다행이다.

태주갑은 별다른 이의제기 없이 끄덕이곤 병력을 통솔해 차량에 탑승했다.

황제…… 루우는?

고개를 돌리자 여전히 그 자리에 멈춰 서서,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는 소녀의 모습이 보였다.

효윤은 루우에게로 뛰어가 팔을 잡아챈다.

“뭘 하는 거야? 황제가 지금 정신 놓고 있으면 어떡해?”

그제야 간신히 정신을 차렸는지, 효윤이 잡아끄는 대로 달려 트럭에 오른다.

오르면서, 효윤은 루우의 희미한 중얼거림을 들었다.

“이건…… 생각 못 했는데.”

그 말에 효윤도 잠깐 멈칫한다. 루우에게 묻고 싶은 게 떠올랐지만, 일단 이 자리를 벗어나는 걸 우선하기로 한다.

“다 올라왔죠?”

효윤의 물음에 태주갑이 끄덕인다. 트럭은 출발했다.

한껏 속도를 높인 트럭의 덜컹거림에 몸을 맡기고, 효윤은 밤하늘을 올려다본다.

시야 한가득, 검은 하늘에 떠오른 붉은 구체들이 들어찬다.

붉은빛을 내는 그것들은 무수히 많은 붉은 눈동자 같고, 하얀 파멸인들은 눈물 같이 쏟아진다.

하늘에서 누군가가 눈물을 흘리며, 지상을 내려다보고 있다.

그 눈물은, 흡사 천상의 계시.

숭고하고,

장엄하고,

경건한 역겨움.

트럭의 흔들림과는 또 다른 흔들림이 효윤의 시야를 강타했다.

눈앞의 광경이, 마치 심하게 손상된 필름을 상영한 것처럼 구겨졌다.

보고 있는 모든 것들이 붉은 색조를 띤다.

그리고 한순간 스쳐 지나가는, 낯선 붉은 풍경.

당황스러움에 빠르게 눈을 깜빡이자 그 광경은 사라져 버리고, 아까까지 보고 있던, 붉은 구체가 떠 있는 하늘로 돌아온다.

좌우를 돌아보자 다들 그냥 자기 할 일을 하고 있다. 신기해서 계속 하늘을 쳐다보는 사람, 눈을 감고 조금이라도 수면을 보충하려는 사람, 혹은 생각에 잠긴 사람, 기도하는 사람, 옆자리 동료와 대화를 나누는 사람 등.

-나만…… 본 건가?

피곤해서였을까? 아니면 저 광경에 충격을 받아서?

그때, 루우가 슬며시 효윤의 손을 잡는다.

따뜻하게 느껴지는 건, 그만큼 자신의 몸이 싸늘하게 식어 있어서일까.

고개를 돌리자 금빛 눈동자가 시야 가득 들어온다.

“봤구나.”

대답을 못 하자 루우가 덧붙인다.

“붉은…… 꿈 말이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

카간의 황궁은 지금 벌어지는 일에 대처하려 바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루우가 카간과의 접견을 요청할 시간은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효윤과 수영이 머무는 숙소로 들어왔다.

침대에 걸터앉은 루우 앞에서 효윤은 초조하게 걸음을 옮겼고, 수영은 그런 두 소녀를 불안한 눈길로 바라봤다.

그러다 우뚝, 효윤이 멈췄다.

“다른 물어볼 것들도 많지만, 일단 이것부터 물어보고 싶어.”

루우는 뭔데, 라고 묻지도 않고, 멍하니 고개만 들어 효윤을 바라봤다.

“아까 ‘이건 생각 못 했다’고 했는데, 무슨 뜻이야?”

“……말 그대로야. 지금 벌어지는 일은 생각 못 했어.”

“그렇다면, 그 외에 다른 뭔가는 생각하고 있었다는 거겠지?”

루우는 입을 다문다. 하지만 효윤은 그녀가 답을 준비할 때까지 기다리지 않는다.

“황제, 루우 너, 네가 오면 테러범들을 자극해서 뭔가 행동을 일으킬 거라고 계산한 거 아니야?”

수영이 눈을 크게 떴다.

루우는 더는 멍한 얼굴을 하지 않았다. 초점이 뚜렷해진 눈으로, 똑바로 효윤을 쏘아본다.

“그래.”

효윤은 눈을 감으며 벽을 보고 섰다. 주먹을 날리고 싶다는 생각을 잠깐 했지만, 숨을 깊게 들이쉬며 억누른다.

“일은 일단 터졌으니 그렇다고 치자. 이번엔 다른 건데, ‘붉은 꿈’에 대해 이야기한 거, 대체 뭐야?”

이번엔 좀 더 순순히 대답이 나왔다.

“나와 견하는 알고 있던 거야. 몇몇 이단들은…… 새빨간 색으로 뒤덮인 세상이 나오는 꿈을 꾸거든. 오늘처럼 깨어있는데 눈앞에 환상으로 나타난 사례는 없었지만.”

“견하도 아까 내가 본 걸 봤다고?”

“구체적인 내용은 사람마다 달라. 안 꾸는 사람도 있고, 꾸더라도 희미한 기억만 남는 사람도 있지. 붉고 황량한 풍경만 나오다가 꿈이 끝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견하처럼 그 안에서 파멸인이 잔뜩 튀어나오는 꿈을 꾸는 사람도 있어.”

“견하가…… 그런 꿈을.”

이번엔 효윤이 입을 다물었다. 루우도 효윤이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주지 않고, 말한다.

“오늘 우리 두 사람 눈에 보인 것, 그리고 견하를 비롯한 여러 이단들이 꾸는 ‘붉은 꿈’ 혹은 붉은 광경…… 나타나는 양상은 달라도 본질은 분명 같은 걸 거야.”

“‘본질’이 같다면, 그 ‘본질’이라는 게 대체 뭔데?”

“그것까진 모르겠어. 하지만…… 네가 전에 보내준 보고서에 적힌 바로는 파멸인을 오래 상대한 병사들이 계속 ‘악몽’을 꾼다는 이야기가 있었지.”

“그래.”

“카라코룸에서 죽은 구체. 그 피를 뒤집어쓴 병사는 정신이 붕괴해 버렸고.”

“그 붉은 광경도 파멸인과 관련이 있다는 거야?”

“내 생각으로는. 효윤이 너한테는 지금까지 파멸인을 상대하면서 뭔가 ‘누적’된 것도 있을 테고, 거기다 오늘 우리 눈앞에는 최소 수십 개의 구체가 떠올랐지. 그 영향으로 깨어있는 상태에서도 ‘붉은 광경’을 보게 된 건 아닐까 싶어.”

“잠깐, 그 말은…… 우리 말고도 그런 영향을 받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이잖아.”

저렇게 하늘에 버티고 있는 구체들과, 쏟아져 내린 파멸인이 이제 뭘 할지는 모르지만, 그것들을 계속 상대하다 보면 누구든 악몽을 꾸고, 환상을 보게 된다.

그리고 끝내…… 카라코룸 사원 유적의 그 불쌍한 병사처럼, 정신 붕괴를 일으키는 사람도 나올지 모른다.

“대책은……?”

묻는 효윤도 그런 게 지금 당장은 없다는 걸 잘 안다. 루우는 그런 효윤의 예상을 확인해주듯 고개를 젓는다.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

수영이 가서 열어보니, 태주갑이 최대한 공손한 몸가짐을 보이려 노력하며 서 있었다.

“폐하와 중장님께, 몽골 정부의 공식 요청입니다.”

루우가 깊은 한숨을 내쉰다.

“지금 이 상황에서 저쪽이 요청할 건 하나뿐이겠지.”

참으로 송구하다는 듯, 이 덩치 큰 남자는 황제의 말에 답했다.

“예. 방어선 지원 요청입니다.”

***

내전 당시, 전선의 참호들이 이러했을까.

루우가 직접 참여해 본 참호전은 산동의 신수덕 토벌전이 전부다. 그때는 4개국 연합군의 압도적 화력 때문에 이렇게 처절한 방어전이 반복되지는 않았었다.

한 번 방어전을 치르더라도, 그대로 아군의 화력을 등에 업고 적을 돌파하는 일이 반복됐을 뿐.

그때 적들을 베어내면서 힘들다고 느꼈던 건, 그냥 어리광이었나.

쉴 틈 없는 방어전을 치르고, 쪽잠을 자길 반복한다.

파멸인의 특성상 땅속으로 파고들어 간 참호가 아니라, 우뚝 솟은 성곽 같은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그 위에 화기를 설치했다.

그 화기로 온갖 크기와 모양의 파멸인을 짓뭉개더라도, 수가 너무 많아 살아남아 성벽까지 접근하는 놈이 반드시 생긴다.

그런 놈들이 성벽을 넘어 뛰어 들어오면, 혹은 성벽 위의 군인들을 위협하면 그땐 이단이 나서서 베어버리는 방식이다.

하지만 성벽 위까지 올라올 때쯤 되면 이미 그 뒤로도 다른 파멸인이 밀려든 상황. 곧바로 정신없는 백병전이 이어진다.

-이젠 노골적으로 황궁을 노리고 몰려드는군.

황궁과 도시의 주요 지역들을 감싼 방어선. 그중 몇몇 곳에만 공격이 집중된다면 좋겠지만, 적의 집중 공세는 매번 위치를 바꾼다.

때문에 쪽잠을 자면서도, 언제 어디로 이동해야 할지 항상 긴장해야 한다.

한 가지 다행인 점은, 적이 모든 방향에서 대규모 공세를 펼치는 건 불가능하다는 점일까.

박도를 아무렇게나 바닥내 팽개쳐두고, 무릎을 웅크린 채 잠을 청한 효윤. 루우도 그런 그녀 옆에 언월도를 적당히 세워두고 앉았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 어깨를 기대고 짧은 잠을 청한다.

우르릉, 하고 어딘가에서 천둥 치는 듯한 소리가 들린다. 포격 소리다.

저 소리를 낸 포는 또 어딘가에 흔적을 남겼겠지.

그런 흔적이 방어선 바깥쪽에 또 다른 검은 띠를 만들었다고 들었다.

들었다는 건 들려준 누군가가 있다는 말이다.

하늘 위로 무언가를 갈아대는 듯한 소음이 지나갔다.

전투기. 그렇다. 몽골 정부는 이제 공군까지 동원했다.

하늘 위에 떠 있는 붉은 구체를 처리하기 위해.

방어선 바깥의 ‘검은 띠’ 이야기는 그들에게서 들은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성과는 그리 좋지 않다. 도대체 이 녀석들은 동명시 지하철에서 마주친 것과는 뭐가 다른 건지, 잘 죽지 않는다. 잠깐 파멸인의 생산을 멈출 뿐이다.

대공포를 갈겨대도 마찬가지.

하지만 그런 소음보다 더 힘든 건, 콧속을 가득 채운 채 떠날 줄 모르는 피비린내다.

-분명 처음엔, 하얀 괴물이라고만 부르던 시절엔 이렇지 않았는데.

기관총으로 벌집이 되든, 이단의 공격을 받아 찢겨나가든, 파멸인은 이제 대량의 피를 쏟아낸다.

방벽 위뿐만 아니라, 그 앞으로 멀리까지, 파멸인의 시체와 피로 온 거리가 더럽혀져 있다.

-비가 내려서 핏물이 하수도로 쓸려 내려가면 좀 나을 텐데 말이지.

하지만 먹구름은 끝내 비를 내리지 않은 채, 칸발리크의 하늘을 밤처럼 계속 뒤덮고 있다.

새벽과 저물녘에 잠깐 도시를 비추고 사라지는 햇빛만으로, 간신히 하루가 지나갔음을 알 뿐이다.

그러나 온몸을 늘어지게 하는 습한 더위는 여전하다.

눈앞을 어지러이 흔드는 붉은 빛, 뭔가가 썩어가는 견딜 수 없는 악취도.

이 도시는, 대체 어떻게 되어버린 걸까. 이 세상에서 완전히 떨어져 나가, 끝없이 반복되는 괴물들과의 싸움터 어딘가로 옮겨 온 걸까.

-언제까지 이렇게 버텨야 하는지.

혹은, 언제 이 상황을 타개할 대책이 나올지.

루우는 지친 눈꺼풀을 내리 닫은 채 그런 생각에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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