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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소녀는 대원수가 되었다-164화 (164/541)

부서진 붉은 존재(2)

이웃 나라 황제가 된 딸.

그런 딸이 드러낸, 노골적인 경제적 침략 의도.

야망에 눈이 어두워 급하게 치고 들어오는 딸을 가르치기 위해서라도, 시레문은 엄하게 말해야 했다.

물론 몽골의 국가원수로서, 고려의 국가 원수를 견제하며.

“관세동맹을 네 야심을 충족할 수단으로 삼고 싶은 심정은 이해한다. 궁리도 많이 했겠지. 하지만 더 많은 요소들은 아직 헤아리지 못하는구나.”

시레문은 루우가 내민 사탕을 덥석 받아 삼킬 만큼 바보도 아닐뿐더러, 몽골인들 역시 돈만 준다고 고려인들 앞에 굽신거릴 사람들이 아니다.

“‘힘’이 곧 현실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힘’이 상대적이고 유동적이라는 사실을 간과하곤 한다.”

힘은 영원하지 않다. 세계를 주름잡던 식민 제국도 신흥 강국이 내민 ‘힘의 논리’ 앞에 어떻게든 조약을 유리하게 체결해보려고 애걸복걸하는 날이 온다.

신흥 강국이 힘의 논리를 앞세우며 뻐기다가 약소국이 지닌 ‘의외의 역량’에 형편없이 무너지는 경우도 있다.

주변의, 상대적으로 약한 나라들과 조화를 이룬 상태에서만 발휘될 수 있었던 ‘힘’이, ‘힘의 논리’를 앞세우며 휘둘러대기 시작하자 물거품처럼 사라져 버리는 일도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고려의 ‘힘’만 믿으면 반드시 그런 날이 온다. 저주나 예언이 아니야. 이것이 ‘힘의 현실’을 믿는 사람들이 간과하는 ‘또 다른 현실’이지.”

루우는 말없이 다리를 꼰다. 시레문의 말을 곱씹어보는 눈치다.

시레문은 루우에게 좀 더 깨달음을 줄 심산으로, 다른 정보를 들이밀었다.

“게레센제가 개봉까지 올라와서 울제이와 접촉했다.”

“게레센제 숙부가요?”

의외라는 듯 눈이 조금 커졌다가, 이내 어떤 의미인지 파악했다는 듯 원래대로 돌아간다.

“신수덕 사건 이후로 두 숙부 사이는 꽤 소원해진 줄 알았는데.”

“두 녀석도 정치가니까.”

이익 앞에서는 이합집산, 합종연횡을 반복한다. 힘이 영원하지 않은 것과 같은 이치다.

“게레센제와 울제이가 회담을 한다. 아마 칸발리크의 현 상황을 주시하면서 대책을 논의 중이겠지. 그런 그들 앞에 네가 노골적으로 몽골 흡수 통합, 황위 계승을 들이밀고, 내가 그걸 승인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더 이야기하지 않아도 알겠지.”

황위 혹은 왕위를 둘러싼 계승 전쟁 이야기는 세계 어느 곳에서나 찾아볼 수 있다.

근대를 지나 현대에 접어든 시점에서도 그런 전쟁이 가능할지는 알 수 없다. 국민들이 군주의 아주 사적인 야망에 동의해준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군주의 야망 달성을 통한 ‘민족국가의 영토 확장’에 열광하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다.

그리고 보르지긴은 이미, 카간 자리를 둘러싼 혈족 간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여러 번 거쳤던 가문이다. 한 회차 더 추가된다 해도 거리낄 사람들이 아니다.

어쩌면 가문에 흐르는 피가, 그런 상잔도 서슴지 않도록 만드는지도 모른다.

“최악의 경우 두 숙부의 동맹 대 저와 아버지의 연합이 대립하는 구도로 갈지도 모르겠군요. 아니, 아버지가 내 편을 들어주리라는 것도 지나친 희망인가? 어쩌실 생각인가요, 아버지?”

현실 분석. 그리고 다소 야유를 섞은 질문. 시레문은 답하지 않았다.

그런 아버지의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루우는 다리를 풀며 말했다.

기운이 빠진 듯, 포기한 듯한 목소리로.

“알겠어요. ‘경제협력’ 문제는 태사급 회담, 또는 외무성이나 재무성의 일로 미뤄두도록 하죠. 그보다는……”

왕서라, 보르지긴 루우 테무르는 의외로 순순히 물러난다. 시레문은 그런 딸의 모습에 안도하면서, 그녀가 꺼내는 다음 화제에 집중했다.

“여기, 칸발리크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서 좀 듣고 싶은데요. 아버지도 ‘아시다시피’ 저는 이단이니까 실전에서 파멸인을 더 관찰해보고픈 욕심도 있지만…… 주의사항은 충분히 들어둬야겠죠.”

***

루우에게 시레문과의 회담은 하나의 확인 절차에 지나지 않았다.

어차피 루우도 그런 노골적인 경제 침략은 가능성이 적다고 봤다. 재무장관 차무룡이 제안한 여러 제안 중 하나일 뿐인 데다, 정작 차무룡 본인은 바라트와의 무역 재개에 더 집중하는 눈치였으니까.

그러니까 그녀는 오늘, 자신이 몽골 카간 자리를 계승하는 데 방해가 될 요소, 반발할지도 모를 사람들에 대해 충분히 들어두는 선에서 만족하기로 했다.

“쉽진 않겠지.”

그런 결론을 얻었지만, 조급하지도 않다.

이제 고작 고등학교 3학년이다.

태사 미리안이 자신이 아직 20대 초반임을 자각하고 장기적인 권력 확대를 내다보는 것처럼, 루우도 자신의 야망을 달성할 날을 먼 미래 어디쯤엔가 두고 있다.

다만,

“조금 돌아가야 할지도.”

게레센제와 울제이가 건강하게 살아있는 이상 카간 자리까지 직진하긴 어려울 것 같다.

“루우!”

반쯤 졸면서 생각에 잠겨 있었기에,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놀라며 일어난다.

효윤이다.

“나타났어.”

뭐가, 라고 물으려다 멈춘다. 정신이 또렷해지기까지 수 초. 그러다 자신이 두 눈으로 직접 보고 싶어 했던 칸발리크의 실상이 ‘나타났다’는 말임을 깨닫는다.

침대에서 일어나 뛰쳐나가려다 속옷 차림을 지적하는 효윤의 손가락질에 멈춰서 옷을 갖춰 입는다.

“태사 언니랑 비슷한 면이 참 많아.”

효윤과 함께 달음박질쳐 고려 측 ‘구조대원’들이 집합한 곳으로 향한다.

‘황제 폐하’를 향한 구조대원들의 경례를 받으면서, 특별히 더 조심스럽게 운전할 생각인 운전병에게 현장까지 빠르게 가 달라고 주문한다.

대원들과 섞여 같은 트럭 뒤편에 올라탄다.

덜컹대는 트럭이 시야를 불쾌하게 흔들고, 그럴 때마다 난간에 부착된 딱딱한 나무 의자는 엉덩이를 호되게 때려댄다.

“황제라고는 해도 군에서의 계급은 없으니까 너무 상관처럼 대할 필요는 없어요.”

군 통수권은 대원수인 태사에게 있으니까. 루우의 가벼운 농담에 태주갑이 부하들 분위기를 풀어줄 겸, 역시 농으로 답한다.

“저희는 그런 민간인이 더 무섭습니다. 민원이라도 들어오면 곤란하니까요.”

가벼운 웃음이 트럭 위를 지나간다.

방어선에 설치된 검문소를 지날 때, 루우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전선 정도의 분위기는 아니지만, 방어선은 한 도시의 이편과 저편을 철저하게 가르는 장막이 되어 있었다.

방어선 밖 도시는 괴괴하다.

완전히 유령도시.

물론 방어선 안으로 대피하지 않고 밖에서 계속 지내려는 주민들도 있으니, 어딘가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낮에는 돌아다니며 지루한 일상을 보내겠지.

하지만 밤인 지금, 조금이라도 괴물을 이목을 덜 끌어볼까 싶어 불을 끄고, 커튼으로 창문을 가린 채, 모두 숨죽이고 있다.

“낮에도 첫 사례처럼 출현하기 시작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밤에 출현하는 빈도가 더 크거든.”

효윤이 옆에서 설명한다.

이윽고 도착한 현장엔, 이미 많은 몽골 군경이 출동한 상태.

고려의 황제가 직접 온다는 소식은 미리 전해졌는지, 몽골 측 현장 책임자가 와서 경례를 올린다.

그리고 병사들 사이에서 퍼져나가는 술렁임.

-루우 테무르 공주님……?

-고려의 황제 폐하시다!

-진짜로? 고려는 황제 폐하가 전선까지 직접 나선다는 게 헛소문이 아니었던 건가?

효윤도 그런 술렁임을 대충 알아듣고 속삭인다.

“이걸 노린 거였어?”

몽골의 수도 칸발리크에서 민심을 장악한다. 어쨌든 높은 사람, 고귀한 신분의 누군가가 고생을 마다하지 않는 이야기는 감동을 자아내기 마련이니까.

시간은 걸리겠지만 오늘의 일화는 몽골 전역으로 퍼져나갈 것이다.

“그 밖에도 노리는 건 있지만.”

그 노림수는 아직 효윤에겐 말하지 않는다. 대신 몽골 측 지휘관을 보며 묻는다.

“파멸인이 보이는 지점까지 안내를 부탁할게요.”

“알겠습니다. 하지만 너무 가까이는 안내해드리기 어렵습니다.”

지휘관의 그 말은 한 귀로 흘려버릴 생각이었지만, 그럴 필요는 없었다.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거대한 파멸인이 건물 사이로 고개를 내밀고 있었으니까.

“아니 저것도 파멸인이라고 부를 수 있는 건가?”

지금까지 본국에서 받아 본 사진, 진술들과는 또 다른 형태의 파멸인이다.

머리에는 수없이 많은 촉수들이 머리카락처럼 붙어 있다. 그렇다. 좋게 봐준다면 머리카락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 광경이다.

머리카락 끄트머리에 손이 하나씩 붙어, 최소 수백에 이르는 그 손가락들이 꿈틀대는 광경을 보고 있노라면…… 소름이 돋는다.

하회탈 같은 얼굴, 그 ‘웃는 눈매’ 안쪽에는…… 이제 제대로 된 눈알이 굴러다닌다.

말 그대로 ‘굴러다닌다.’

그리고 안와 하나당 눈이 하나씩 들어 있는 것도 아니다.

점점 더…… 인간을 닮아간다는 가설.

그 가설이 신빙성을 얻길 바란 건 아닌데.

“지휘관, 포격은 필요 없어요. 이쪽에서 포를 준비했으니까.”

“예? 고려 측에서 말입니까?”

의아해하는 지휘관 앞에서 루우는 언월도를 소환했다가, 형태를 변화시킨다.

용의 머리를 닮은 총열…… 아니 크기로 보아 포열이라고 불러야 할 그것은, 예전에 견하에게 한 번 보여줬던 것이다.

“저는 다른 이단들하고는 좀 다른 공격 수단이 있거든요.”

자신감을 담은 동시에, 조금이라고 빨리 저 괴물을 없애버리고 싶다는 어조였다.

장교들의 만류를 무시하고 앞으로 나아간다. 그리고 포구를 들어 올려, 괴물의 몸통 한복판을 겨냥한다.

루우의 포라고 불러야 할 그것은, 탄환을 쏘지 않는다.

벼락을 입힌 거대한 빛줄기가 포구에서 터져 나오듯 발사된다.

귓가를 아프게 하는 굉음.

거대한 극장의 조명처럼, 그 주변을 집중적으로 밝히는 빛.

한순간 뿜어져 나오는 데 그치지 않는다. 벼락과 빛줄기는 괴물의 몸을 걸레짝으로 만든다. 그 열기 때문에 ‘피’가 그 자리에서 까맣게 익어버린다.

루우는 포구의 각도를 세심하게 조절하면서, 괴물의 몸을 ‘긁어버렸다’.

벼락과 빛줄기는 괴물의 몸을 꿰뚫고도 끝까지 이어져 나가, 칸발리크의 하늘 저편을 덮은 먹구름마저도 꿰뚫는다. 주변 구름의 밑바닥도 빛을 반사해 윤곽을 드러낸다.

괴물의 몸이 긁힌 것처럼, 구름 밭에도 긁힌 자국이 남았다.

용의 일격.

그렇게밖에 볼 수 없는, 압도적이고 신성한 공격이 순식간에 괴물을 찢어버렸다.

루우는 한껏 멋을 내며 돌아선다.

“오늘 밤은 이놈이 처음인가요?”

“……예? 아, 예.”

“보기엔 화려하지만, 하루에 한 번만 쓸 수 있다든가 하는 기술은 아니에요. 몇 번이고 쓸 수 있으니까, 부담 갖지 말고 써 주세요.”

몽골의 공주, 고려의 황제가 말하는 유창한 몽골어는 주변 병사들에게 또렷하게 전해졌다.

모두가 환호성을 지른다. 공포의 시간은 갔다. 이제 용을 닮은 이단이 괴물들을 장난감처럼 쓸어버리고 도시를 구원할……

찬물을 끼얹은 듯 환호가 가라앉았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효윤을 보니, 얼굴이 사납게 굳었다.

시선은 방금 죽은 파멸인도 아니고, 루우도 아닌, 더 먼 하늘로 향해 있다.

루우도 돌아본다.

처음에는 누군가 불꽃놀이라도 하나 생각했다.

붉은 빛줄기가, 어딘가 먼 지면에서 수직으로 치솟아 올랐으니까.

하늘 한가운데 자리 잡고 붉은빛을 뿜어내는 저것은-

루우의 얼굴도 사납게 굳었다.

좀 멀리 떨어져 있다 해도, 붉은 핏덩이, 각종 역겨운 신체 기관이 넘실대는 그 ‘구체’를 알아보지 못할 리 없다.

구체는 산란이라도 하듯, 하얀 무언가를 끝없이 쏟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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