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서진 붉은 존재(1)
루우는 칸발리크 역에 도착해, 일단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러고 보니 작년 유월에는 내전이 한창이었지.
허동주를 죽이고, 총선거를 치르고, 산동 토벌을 준비하던 시기.
산동 전투 후에는, 아버지와 대등한 군주로서 회담을 하기 위해 칸발리크를 방문했다.
황제로서 두 번째 방문.
그리고 ‘구조대’의 새로운 전투원인, ‘왕서라’ 개인으로서의 방문이기도 하다.
“안 그래도 손이 좀 모자랐는데 이렇게 보니까 반갑네.”
기차에서 내리는 황제를 이렇게 격의 없이 맞이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루우는 그 사람의 얼굴을 보고 웃었다.
조금 그을린 피부. 전투복이 아니라 정장을 차려입긴 했지만, 그 안의 몸가짐은 한창 전쟁을 치르는 전사의 움직임이다.
효윤과 루우 모두 평소에도 단련은 부지런히 하지만, 계속 실전 환경에 놓여 있는 쪽은 어딘가 다를 수밖에 없다.
한층 더 날카롭고, 한층 더 피곤해 보이면서도, 한층 더 건강해 보인다.
루우는 효윤의 모습을 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중장은 야전에서 구른 티가 나는걸.”
“야전이라기보다는 시가전이지. 여기는 늘 시가전이야.”
쓴웃음. 포위된 동명시를 둘러싼 시가전을 목격했던 효윤이 그렇게 말한다면, 틀린 표현은 아닐 것이다.
한 나라의 수도가 시가전의 현장이 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그 도시뿐만 아니라 나라 전체에 우울감을 심어준다. 외국인의 눈으로 보기에도 썩 좋진 않다.
루우의 귀여운 눈썹이 다소 비뚤어진다.
“심각?”
루우는 효윤의 옆을 지나쳐 걷는다. 효윤은 그런 루우를 따라 걸으며 대답했다.
“심각한 편이지. 도시의 기능 절반이 마비되고, 사람들은 집으로 숨기 바쁘고…… 아니, 그것도 옛날이야기지. 지금은 집에서도 떠나서 방어선 안쪽의 피난민 수용소로 어떻게든 들어가려고 난리니까.”
도시나 국가는, 각 부분의 기능이 조화롭게 결합한 유기체라 할 수 있다.
심지어 빈민가마저도 도시 경제에서 맡는 역할이 있다.
그런 기능 어딘가가 작동을 멈추면, 다른 부분들도 연쇄적으로 이상이 생긴다.
“방어선 안쪽 상황은 어때?”
“사람들이 시위라도 벌이지 않는 걸 감사해야 할 지경이야. 원래는 도시 전체에 넓게 퍼져 있어야 할 사람들을, 억지로 좁은 면적 안에 욱여넣은 셈이니까. 그렇다고 일반 시민들 집을 강제로 빼앗아서 거기다 분산 수용할 수도 없고……”
“그렇게 됐다면 물자 공급에도 문제가 있겠네.”
“원래대로라면 공장에서 생산됐거나 지방에서 운송된 물자가 도시 각 구역의 상가로 들어가고, 그걸 시민들이 구입한다는 정상적인 구조가…… 망가졌거든.”
물자의 공급량에 문제가 생겼다기보다는, 유통이 제대로 안 된다는 건가.
각자의 필요, 지닌 재화에 따른 구입이 아니라 국가가 직접 물자를 ‘보급’하는 구조에는 어딘가 문제가 생기기 마련이다.
국가가 아무리 선의를 갖고 임한다 하더라도, 국가 역시 ‘사람’의 집합체이고, 사람이 하는 일은 늘 그렇듯 불완전하니까.
“이럴 때 철도망마저 망가졌다면 정말 끝장이었을 거야.”
효윤은 카간의 어전에서 나왔던 이야기와 같은 이야기를, 루우에게 들려준다.
“우리도 이미 잘 알고 있지. 도시를 주변부와 연결하는 철도망의 중요성.”
“도시라는 심장에 피를 공급하는 혈관 같은 거지.”
루우는 효윤의 비유가 적절하다고 생각했다. 작년 고려의 내전 당시에도 태사 미리안을 비롯한 혁명군 사령부가 철도망 장악에 얼마나 신경을 썼던가.
허동주가 무너지기 시작한 것도, 철도망을 농락한 안세규의 계략 덕분이고.
“도시 분위기는 그렇다 치고, 뭐 경제적으로 안 좋다든가 그런 이야기도 나와?”
루우가 이번에 칸발리크에 온 이유와도 관련이 있다. 고려와 몽골의 경제 협력 문제. 몽골 측에 뭔가 절박한 사정이 있다면, 카간과 회담할 때 그걸 파고 들어볼 수 있을 테니까.
“나야 ‘구조대’로 온 거라서 자세한 이야기는 못 들었지만, 양수영이 돌아다니면서 이것저것 주워들은 게 있나 봐. 두세 다리 건너서 들은 이야기라 신빙성은 떨어지지만…… 좋지 않은 건 확실한 것 같아. 고려 측 제의를 받아들일까 말까 고민이 크다는 이야기도 있고.”
양수영. 견하의 부하 직원. 전 천손민족협회 출신. 나름대로 열심히 돌아다니며 정보를 모으는 모양이다.
루우는 끄덕이며 효윤의 말을 머릿속에 넣어둔다.
“아버지와는, 이야기 많이 나눠봤어?”
효윤이 오늘 정장 차림인 건, 카간을 만나러 가는 루우를 수행하기 위해서다.
작년처럼 다시 한번 최측근 수행원을 맡은 효윤에게, 루우는 미리 시레문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두려 한다.
“‘파멸인’에 대한 간단한 정보교환을 했지. 지난번에 동명으로 보낸 보고서, 황제도 읽어봤잖아?”
“그렇지.”
“우리 쪽 정보를 캐내려는 것보다는, 그쪽이 가진 정보와 일치 여부를 확인하는 절차였어. 그리고 생각보다 많은 이야기를 들었지.”
‘구체’의 죽음.
그 광경을 목격한 병사의 정신 붕괴.
칸발리크에서 파멸인을 오래 상대한 군인들이 꾸는 악몽.
루우는 혹시 효윤도 ‘붉은 꿈’을 꾸는지 물어보려다, 나중에 물어보기로 마음을 바꾼다. 지금 그걸 물어보면 너무 많은 것을 효윤에게 털어놓아야 할지도 모르니까.
효윤은 그러고도 뭔가 덧붙일 이야기가 있다는 듯이, 허공을 째려본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어떨지 모르지만, ……그냥 평범한 ‘친구 아빠’ 같은 느낌이었지.”
루우의 표정이 이상해진다. 표정 자체가 이상하기도 하고, 이상한 말을 들었다는 표정이기도 하고.
효윤은 변명처럼 덧붙인다.
“아니, 정말 그렇게 대우를 해주셨다고. 격식을 따지기보다는 친구네 집에 놀러 간 것처럼 편한 분위기를 만들어주시려는 게 느껴졌다니까.”
루우는 의외네, 라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부녀의 정이라는 게 그 사람에게도 있기는 한 걸까.
루우는 시레문을 상당히 냉혹한 사람으로 보고 있었다. 그녀 자신에게 냉혹했던 것도, 어머니에게 냉혹했던 것도 아버지를 그렇게 평가하게끔 했다.
그랬기에…… 작년 대관식에 시레문이 참석했을 때도 그렇고, 이번에도 그렇고, 부성애의 파편을 볼 때마다 루우는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로 일말의 부성애가 남아서인가, 아니면 그것도 전부 계산된 무언가인가.
지금으로선 모르겠다.
대신 루우는 훗, 하는 웃음으로 효윤의 변명에 답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최효윤 중장께서는 짐을 친구로 생각해주셨다는 거군.”
얼굴이 약간 빨개진다.
“헛소리 말고 황궁으로 가시죠, 황제 폐하.”
루우는 양손을 펼치고 예, 예, 일부러 느긋하게, 약 올리듯 답하며 걸음을 옮겼다.
***
“딸이기에 배려해 줄 수 있는 것도 있지만, 이는 다시 말해 딸이라 해도 배려해 줄 수 없는 게 있다는 말이란다. 무슨 뜻인지는 알겠지?”
“예. 저도 아버지와 대등한 국가원수의 자격으로 온 사람이니까요. 무슨 말씀이신지는 잘 압니다.”
부녀의 대화는 그렇게 막을 올렸다.
날 선 대화는 아니다. 시레문은 당연한 것을 평이한 어조로 말하고 있었고, 루우 역시 이 회담에 큰 기대를 걸고 오진 않았으니까.
시레문에게 루우는 딸인 동시에 이웃 나라의 황제다. 이웃 나라와의 관계, 자국의 이익을 저울질해 줄 것과 받을 것을 계산해야 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수도가 이 지경이 된 만큼 몽골의 경제 사정이 안 좋아지는 것도 당연한 이치다. 그러나 몽골이 그 정도로 무너질 나라도 아니고, 본래 지닌 국력과 현 수준의 경제 원조만으로도 충분히 버틸 수 있다.”
시레문의 말은 사실인 동시에 자신감의 표출이다. 버틸 수 있다. 이 말은 때로는 만용이 되기도 하지만, 지도자가 국민들 앞에 당연히 보여줘야 할 모습이기도 하다.
국민은 정말로 물질적 한계에 이르렀을 때 무너지기도 하지만, 지도자가 한계를 느낄 때 정말로 끝도 없이 무너지기 시작하니까.
“고려의 기업에서 생산하는 물자들을 수입, 공급하고 있지. 그것으로도 상당한 자본이 고려로 흘러 들어간다. 고려 입장에선 그런 이익을 거두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할 수 있지 않니?”
왜 그 이상의 이익을 바라는가, 라는 물음이다.
“저는 고려의 황제이기 때문에 고려인들이 원하는 바를, 최소한 이야기는 꺼내 봐야 하는 처지라서요.”
어느 나라 사람들이나 다 그렇듯이, 고려인들도 부유해지길 원한다.
“고려 기업의 몽골 진출, 고려에도 이익이 되겠지만 지금 진행 중이신 카라코룸 개발에도 꽤 도움이 될 것 같은데요.”
루우는 말을 이으며, 견하가 카라코룸 답사 후 이야기해 준 것들을 떠올린다.
“‘조드 빈민’들이 카라코룸 주변에 점점 늘어난다면서요. 이 사람들이 황실과 정부에 반대하는 세력에 넘어가서 연일 시위가 일어나고…… 빈민 문제가 해결이 안 된다는 이야기는, 실업 문제가 심각하다는 걸 보여주는 것 같은데요.”
루우의 말에는 이런 뜻이 담겨 있다. 상대적으로 우월한 자본력을 갖춘, 고려의 기업이 몽골에 진출한다. 그렇다면 몽골의 실업 문제도 해소되지 않을까.
일단 임금을 받기 시작하면 입에 풀칠은 할 수 있다. 풀칠할 수 있다면 시위보다는 직장에 나가는 사람도 늘어나겠지.
풀칠마저도 할 수 없게 만드는 머저리 기업가나 파업을 끌어내니까.
몽골 사회도, 정권도, 황실도 안정을 꾀할 수 있다.
“제아무리 혁명을 꿈꾸는 세력이라도, 아무리 철저한 이론 무장을 했어도 지지해주는 민중 기반이 없으면 와해하기 마련입니다. 고려 기업의 몽골 진입을 승인하시면, 자연스럽게 이뤄질 일이기도 하죠.”
이미 대화는 부녀의 정담이 아니다.
달콤한 이익을 눈앞에서 흔들고, 그 달콤한 껍데기 속에 독이 들지는 않았는지 의심하는, 정치가들의 대화.
시레문은 한층 잠긴 목소리로 입을 연다.
“고려의 실업 문제는 우리 몽골의 실업 문제를 챙겨줄 만큼 여유롭나?”
“비교적.”
간략하게 대답한다. 비록 내전 후 많은 수를 사회로 돌려보내긴 했지만, 군은 전보다 비대해졌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을 빨아들였다는 뜻이다.
내전 후 복구 사업도 많은 인력을 필요로 했고. 사회주의자나 공산주의자들의 견제는 아이러니하게도 실업률을 강제로 낮추면서 다소 무리해서라도 경제를 돌아가게 만든다.
미리안 정권은 공산주의자가 될 순 없지만, 그들이 쓰는 유용한 방법은 얼마든지 가져다 쓰는, 제법 유연한 정권이다.
“또 몽골에 우리 기업이 진출하기 시작하면, 처음 공장을 짓고 인프라를 구축하는 데 고려인 노동자들이 해줄 일이 많거든요. 이것도 어느 정도는 고용 확대에 도움이 되겠죠.”
그러나 시레문의 회의론은 계속된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낸 물자는 누가 사지? 창고에 쌓아둘 셈인가? 아니면 다시 몽골의 도시 빈민들에게 팔 셈인가. 노동력, 자원, 이익 모두 몽골에서. 이것이 경제 식민지가 아니면 무엇이지?”
착각하지 말라는 듯 시레문은 고개를 저었다.
“몽골인들은 그런 처지로 전락했다는 이유만으로도 혁명을 일으키고도 남는 민족이다. 안일하게 생각하지 말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