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간의 도시(12)
게레센제는 개봉의 기차역에서 내리자마자, 먼발치에 있는 동생 울제이의 모습을 확인했다.
화해를 연출한다는 목적대로 꾸민 미소인지, 정말로 반가워서 짓는 미소인지는 알 수 없다.
울제이는 다가와 게레센제의 두 손을 잡는다.
“덥지요, 형님?”
유월도 중순을 넘겼다. 형제의 머리 위에는 제법 뜨거운 햇살이 내려꽂히고 있다.
“그렇군. 보채고 싶진 않지만 어서 시원한 데 들어가서 이야기를 나눴으면 싶구나.”
덩치 큰 동생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인다.
“가시죠. 이야기할 게 많습니다. 그만큼 대접해드릴 것도 많이 준비해뒀죠.”
이야기할 게 많다, 라.
그렇다. 칸발리크의 상황뿐만 아니라,
몽골 황위, 그에 얽힌 형제들과 조카의 신경전.
대공황과 관세동맹, 그 밖의 모든 나라를 둘러싼 경제 상황.
산동 총독 신수덕을 둘러싸고 일어났던 일들, 그리고 군정.
이 모든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아야 한다.
-군주는 모든 분야에 전문가가 될 수는 없겠지만, 전문가들의 이야기를 알아들을 준비는 되어 있어야 한다고 했던가.
어디서 들었던 것인지, 아니면 자신이 생각해낸 것인지 잘 떠오르지도 않는 격언을 마음속에서 되풀이한다. 그러면서 게레센제는 울제이의 궁궐로 향하는 차에 올랐다.
***
개봉.
옛 송나라의 수도였던 이래 ‘화북’의 중심 도시다.
그 화북은 지금은 ‘키타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개봉 황궁은 왕궁으로 격하되었지만.
“그러고 보면 여기도 참 파란만장한 역사가 펼쳐진 곳이지.”
본격적인 회담에 들어가기 전에, 궁궐 뜰을 거닐며 게레센제가 이야기를 꺼냈다.
“그렇지요. 송나라의 수도였던 것도 잠시, 거란인들이 이곳을 차지해버렸으니까요.”
거란에 의해 발해가 멸망하고, 고려 태조가 반격에 나서 그 왕위를 계승한 후, 두 나라는 밀고 밀리는 접전 끝에 영토 분할에 합의를 보았다.
부여성에서 압록강까지 이어지는 선을 경계로, 요동을 비롯한 서쪽 지역은 거란이 보유하고, 그 동쪽은 고려가 차지하기로.
그 후 거란은 서쪽과 남쪽으로 눈을 돌려 송나라를 쳤고, 고려는 거란의 공세가 자신들 쪽으로 향하지 않는 점에 만족하며 이를 묵인했다.
“송나라는 장강 남쪽으로 수도를 옮기고, 여기는 거란인들이 차지하고. 그렇게 해서 이 땅의 이름도 거란에서 유래한 ‘키타이’가 되었지.”
역사 이야기는 특별히 중요한 내용을 담은 건 아니다.
잠시 후엔 어떤 민감한 화제, 날 선 대화가 오갈지 모른다. 그 전에 충분히 대화 분위기가 ‘무르익었다’고 양측이 동의하기 위한 절차에 불과하다.
역사는 거기에 적합한, ‘교양과 품위가 느껴지는 화제’일 뿐이고.
“그때 송나라 황제들의 황궁을 그대로 거란의 황제들이 쓰고, 그게 무너지거나 소각되거나 하다가 다시 복구되고…… 이젠 네 집이 되었구나, 울제이.”
“태평천국이 있던 시절에는 고궁박물관 같은 거였다고 합니다만.”
그렇게 말하며 울제이는 하핫,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누군가의 집이었던 곳. 그곳에서 수많은 사람이 피를 흘렸다. 다음 주인은 전 주인의 가족을 쳐 죽이고 대담하게 눌러앉았다.
그러다가 박물관이 되어 생활의 흔적을 싹 걷어냈던 곳인데, 그걸 울제이가 차지하고 손보고 다시 집으로 삼았다.
지금 이 뜰도, 박물관을 관람하러 오는 사람을 위한 곳이 아니다.
이 집에 사는 사람을 위해 꾸며진 공간이다. 둘 사이에는 미묘한 차이가 있다.
“그래, 어떠냐. 옛 황궁에서, 키타이의 칸으로 지내는 것은.”
“큰형님이 카간이 됐을 때, 우리는 그저 벌벌 떨 뿐인 황자들에 지나지 않았었죠. 그때도 전쟁에 휩쓸린 나라를 이끄는 큰형님이 참 대단해 보였는데, 제가 칸이 되어보니 더 대단하시다는 걸 알겠더군요.”
이 짓을 거의 30년 가까이 해오신 거잖아요, 라고 울제이는 덧붙였다.
“그래도 우리 역시 20년 동안 비슷한 일을 해오지 않았더냐.”
“뭐, 큰형님보다 나은 건 있죠. 저는 키타이 한어(漢語)를 어느 정도는 구사하게 됐으니까요. 형님은 어떠십니까?”
“나도 낭키아스 한어는 제법 할 수 있게 됐다. 가끔은 신민들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보여줘야 하니까.”
이제 울제이는 큭큭 거리며 웃는다. 무슨 말인지 공감이 간다는 웃음이다.
“그렇죠. ‘보여줘야’ 하니까.”
중세의 지배자들과는 다르다.
그저 일방적으로 군림하면서, 백성들에게 출세하고 싶거든 알아서 통치자의 언어와 문화를 배워서 오라고 하던 시절.
몽골문으로 된 공문을 못 읽어도 그건 평소 공부를 게을리한 네놈들 탓이라고만 하던 시절.
그래서 그 제국은 붕괴했고, 몽골인들은 쿠빌라이 시대의 영광을 뒤로한 채 북방으로 쫓겨났었다.
태평천국의 멸망 후 새로운 칸국, 울루스를 건설하면서 삼형제는 ‘그때의 교훈’을 잊지 말자고 다짐했다.
“통치는 일방적이어서는 안 되지.”
“한족이 우리의 통치에 적응하려 한다면, 우리 역시 한족을 이해하려 해야죠.”
물론 공식적인 자리에서 몽골 전통 의복만을 입는다든가, 각종 의식을 몽골어로만 진행하는 등의 관습은 버릴 수도 없고 버려서도 안 된다.
그러나 가끔은 한족의 옷을 입고 한족 시장에 타나 한족 상인과 이야기를 나누는 식의…… 친근감을 드러내는 연출은 필요하다.
“각 지역 실무직 공무원들은 자기네 말을 쓸 수 있도록 하되, 진급에는 몽골어 작문과 회화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둘 것을 요구한다. 이는 교육과 입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지. ……요컨대 생활의 편리와 출세에 대한 욕망을 적절히 조합하는 것.”
그것이 새로운 시대에 어울리는, 게레센제와 울제이가 고안한 식민 통치 방식이다.
“칸발리크의 볼로드는 우리의 이런 정책을 다소 우려하는 것 같더군요.”
뜰에 미리 준비된 의자에 앉자마자, 울제이가 칸발리크 이야기를 꺼냈다.
슬슬 본격적으로 회담을 시작할 때다.
“형님의 타이시가? 무엇이 우려된다는 거지?”
게레센제는 형의 재상을 떠올린다. 도통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던 사내.
“우리가 펼치는 정책으로 인해, 키타이와 낭키아스의 몽골인 집단이 정체성을 잃고 한족으로 동화되는 게 아닌가, 그래서 보르지긴 가문의 결속뿐만 아니라 다이온의 이상도 없어져 버리는 것은 아닌가, 하는 거죠.”
볼로드의 지적은 식민지 통치 민족이라면 누구든 겪는 고민이다.
식민지 원주민들과 잘 지내려다 보면 그들과 융화되어 본래의 정체성을 잃어버릴 수 있다.
정체성을 유지하려다 보면 식민지 원주민들에게 자신들의 문화를 강요하게 되고, 강압적 통치로까지 이어지기도 한다.
다이온의 이상은 한족을 잘 통치하되, 몽골적 삶의 방식을 잃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이기도 하다. 만일 몽골인들이 한족에 동화된다면 그것은 최종적으로 한족의 승리를 의미한다.
“그렇기에 우리도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균형을 잡으려 애쓰고 있지 않나.”
“하지만 볼로드 입장에서는 우리가 영 미덥지 못한 모양입니다. 큰형님께도 두 칸의 울루스가 별개의 국가로 완전히 분리해 나갈지 모른다, 는 식으로 말씀드린 듯해요.”
“……우리의 독립이라.”
왜 갑자기 그런 우려가 나왔을까. 생각해보자. 시레문 형이나 볼로드가 오래전부터 해오던 생각일까? 짚이는 구석은 없나?
……짚이는 구석, 있다.
“전에, 네가 형님께 ‘키타이는 독립하고 나는 황제가 되겠다’는 식으로 으름장을 놨던 걸로 아는데.”
“아. 그건…….”
울제이는 말끝을 흐린다. 그도 그제야 그 일이 떠오른 모양이다. 그 일이 계기라면 볼로드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는 것도 이상하진 않다.
그리고 울제이가 격한 어조로 그런 말을 했던 건, 신수덕 문제로 게레센제와 갈등을 빚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물론 그 외에도 여러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했겠지만.
“그 이야기는 그만하죠. 관세동맹을 체결하면서 신수덕 문제는 불문에 부치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음.”
“더 중요한 이야기가 남아 있습니다. 볼로드는 시레문 형님께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어떤 제안을 하나 했는데……”
거기서 다시 울제이는 말을 삼킨다. 게레센제는 다그치지 않고, 역시 말없이 울제이의 얼굴만 바라본다.
“……형님과 저의 울루스, 즉 키타이와 낭키아스를 폐지하고 몽골 제국, 카간 울루스가 직접 통치하는 방식으로 전환하자는 제안이 나왔더군요.”
게레센제는 동요하지 않는다.
젊고 경험이 부족했을 때는 격노해서 일어났겠지만, 지금은 차분히 주변을 돌아볼 줄 안다.
“그게 가능한 일인가. 적지 않은 인구와 경제규모를 지닌 나라들인데.”
“몽골인에 의한 통치기반 자체는 확립되어 있으니까요. 우리가 했죠.”
“행정적으로는 가능하다고 쳐도, 외교적으로는…… 주변국이 가만히 있을까?”
“일본공화국이 항의한다 해도 힘이 부족하죠. 아즈텍은 대공황뿐만 아니라 내적으로도 혼란 상이 가속화되는 중이라…….”
“고려는?”
울제이가 게레센제의 눈을 들여다본다. 아는 것을 왜 묻는가, 그런 눈빛이다.
“루우 테무르가 고려민국, 아니 지금의 고려제국 외무장관 안세규를 따라가도록 한 사람이 볼로드라는 이야기가 있더군요.”
그 이상의 이야기는 필요하지 않았다. 둘 다 대충 머릿속으로 어떻게 된 일인지 그림을 그려볼 수 있었다.
“형님이 키타이와 낭키아스를 통합하고, 고려의 루우 테무르가 카간 자리를 이으면 옛 다이온의 강역은 거의 완성되지. 볼로드는 그런 계산을 하는 걸까?”
“큰형님의 묵인 없이 볼로드 혼자 그런 일이 가능할까요?”
두 사람 사이에 말이 끊긴다. 문제 상황은 충분히 들었다. 이제 각자 대응을 생각할 때다.
한참 만에 게레센제가 먼저 입을 열었다.
“너는 어떻게 할 생각이냐.”
“어떻게, 라고 하시면?”
“받아들일 생각이냐? 영지를 내놓고 칸발리크로 돌아오라고 한다면.”
“거부하면 전쟁…… 까지는 아니더라도 상당한 불이익이 있겠죠.”
“관세동맹은 몇 개월 동안이긴 해도 대공황의 충격을 상당히 줄여줬지. 키타이에서도 마찬가지였겠지?”
“예.”
그 이익에서 배제되는 것만으로도 키타이의 경제는 휘청인다. 이미 관세동맹을 통해 대공황이라는 폭우를 피한 국민들에게, 다시 거리로 나앉으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
실제로 전쟁까지 가지 않더라도, 이런 경제적 보복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여기서 게레센제는, 외교 전선에 변화를 주기로 한다.
지금까지 루우 테무르 및 시레문에게 협력적으로 행동했다면, 이번엔.
“만약 나도 본국의 영지 몰수를 거부하고 너를 지원하겠다고 한다면, 어떻겠니?”
울제이의 눈이 빛난다. 작은형이 오로지 순수한 우애만으로 그를 돕는 건 아니겠지만, 도움은 거절하기보다는 이용하는 편이 낫다.
“그런 동맹을 제안해주신다면, 저도 좀 더 용기를 내 볼 수 있겠죠.”
“상황이 여의치 않아서 영지를 내놓고 칸발리크로 돌아가게 된다고 해도, 우리가 동맹을 맺고 몽골 정계 내부에서 영역을 확보해 나가도 좋겠지.”
“그렇다면…… 일단은 칸발리크의 사태를 관망해 볼 수밖에 없겠군요.”
형제의 결론은 다시 칸발리크로 향한다. 몽골의 대처, 고려의 움직임, 이 둘을 모두 주시하면서, 키타이와 낭키아스의 다음 행보를 결정하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