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간의 도시(10)
추증.
죽은 사람이 생전에 세운 공적을 기려, 그 지위를 높여주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오늘은 조금 다르다.
오늘, 황제 루우는 죽은 미승휴의 태사 직위와 대원수 계급을 정식으로 승인하기로 했다.
그래서 각 정당과 정부의 주요 인사들이 이렇게 항전열사릉 앞에 모인 것이다.
루우는 이 자리에 처음 서 보고, 리안은 1년 만이다.
그날은 비가 왔지만 오늘은 맑다.
1년 전 그날과 다른 건 날씨뿐만이 아니다.
권력 핵심을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도 다르고,
그 사람들 주변에 도열한 병력 구성에도 차이가 있다.
“기갑사를 배치한다는 건 내 아이디어야.”
다소 자랑하듯, 견하는 옆에 선 지나와 익서에게 말했다. 재연은 이 자리에 부를 수 없었다.
“위압감을 준다는 효과는 확실하네요, 선배.”
“음, 그렇지. 외신들에도 신병기의 위상을 선전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내부적으로도 제국의 태사와 그 군대가 이런 전력을 갖추고 있음을 보일 수 있어.”
그것도 열병식처럼 주변국을 자극하는 행사가 아닌 방식으로, 라고 견하는 덧붙였다.
“국장님 말씀대로, 태사 각하와 우리 고려 제국군의 위상을 높이는 데에는 아주 적절한 배치인 듯합니다. 뿐만 아니라……”
익서는 제국입헌당 당원과 각료들 근처에 따로 도열한, 감찰국 직원들을 돌아본다. 이제 중고등학생들 외에도, 그가 모은 대학생들까지 다수 섞여 있어 무게감을 갖추었다.
그들 모두가 감찰국만의 제복을 걸치고 있다.
지난번 전당대회에 이어서, 감찰국은 오늘도 대내외적으로 그 존재감을 과시하는 것이다.
“당의 미래를 넘어서, 국가의 미래라는 인상까지 주는 거지.”
전당대회에선 당 내부에 앞으로의 핵심 세력으로 자란다는 인상을 준다면, 오늘 여기, 미승휴를 추증하는 자리에선 고려 전체에 그러한 인상을 심어준다.
견하의 그런 목표는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기에, 지나는 다른 질문을 던져본다.
“그런데 선배, ‘추증’이라는 거요, 돌아가신 분의 지위를 높여주는 거잖아요. 선대 태사 각하를 높여드리는 거면, 황제께선 대체 어떤 지위를 내리신다는 거죠?”
“아, 그건…… 오늘 추증은 조금 달라. 지위를 높여드리는 게 아니라, 지위를 정식으로 ‘승인’해드리는 거지.”
“‘정식으로 승인’이요?”
“뭐 선대 태사 각하의 집안에 방계 황족의 피가 섞였다면 옛날 신라에서 영웅 김유신을 흥무왕으로 추존했듯이 왕으로 추존해드릴 수도 있었을 테지만……”
아니, 그랬다면 애초에 미승휴가 황위에 오르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가 황제보다 격이 낮은 왕, 혹은 공을 칭하지 못하고 태사에 머문 것은 그 때문이다. 혈통의 제약은 거의 사라졌다지만, 남아 있는 곳에는 남아 있다.
루우도 황제가 되기 전에 ‘왕서라 공’으로 불리기 위해 신라국공, 백제국공, 낙랑국공, 발해국공 등을 겸하는 절차를 거쳐야 했다. 그런 위치인 만큼 미승휴가 접근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선대 각하가 제2제국 황실에서 받은 지위는 태사가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지금 우리나라엔 대원수보다 높은 계급도 없고.”
“아, ‘태사’는, 세계대전 중에 칭하신 거였죠.”
“그래. 황실이 궤멸했으니 나중에라도 인정받을 방법이 없었지.”
미승휴가 방계 황족 살해에 관계된 건 유지나나 이익서는 모르는 이야기다.
“그 ‘태사’ 자리를 물려받은 현 태사 각하도 마찬가지고.”
“그렇다면…… 지금 황제 폐하께서 즉위하시기 전에 두 분 태사 각하께서 임명한 모든 공직자 역시……”
“그래, 오늘 추증은 정권과 체제의 근간과 관련된 일이야.”
하극상 끝에 계급이고 뭐고 다 자칭한 초기 허동주와는 달리, 미승휴는 정부 관료들 끝자락이라도 붙들고 있어서 정통성 면에서 더 나았다지만……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이야기일 뿐이다.
미승휴가 허동주에게 준 문하시중이나 원수 계급을 포함해서, 제3제국 정부에서 공직에 임명된 모든 인간의 합법성과 정통성은, 오늘 추증 의식에 달렸다.
미승휴가 정식으로 태사의 자리와 대원수 계급을 인정받으면, 그가 임명한 사람들의 정통성 역시 보증된다.
마찬가지로 미승휴의 후계자인 미리안의 정통성도.
“뭔가 순환 논리 같지만, 황제 폐하의 정통성은 그런 신하들에게 추대받았다는 식으로 다시 보강되지.”
황제와 태사, 두 사람은 항전열사릉 깊은 곳까지 들어간다. 여기서부터는 아무리 견하가 리안의 측근이라고 해도 따라 들어갈 수는 없다.
루우가 주는 훈장이며 정식 임명장이며 하는 것들을 안치하는 건, 조카이자 후계자인 리안의 몫이다.
“그런데 왜 하필 지금…… 인 거예요?”
폐하께서 즉위하신 직후에 할 수도 있었던 일 아닌가? 지나는 그렇게 묻고 있었다.
“표면상의 이유로는 내전이며 대공황이며 뭐며, 틈이 없어서라고 할 수 있겠지만, 진짜 이유가 따로 있긴 하지.”
뭐 굳이 이런 의식을 치르지 않아도, 황제로 즉위한 것도 태사가 된 것도 기정사실인데 그냥 넘어가는 게 어떤가, 하는 생각도 들긴 한다.
“하지만 한 번 정도는 기강을 잡아줄 필요가 있거든.”
쓸데없는 이의제기. 발목잡기. 그런 걸 방지하려면 조금이라도 더 신중해질 필요가 있다.
루우의 칸발리크 재방문을 앞둔 지금 시점에서는 더더욱.
그렇기에 어떻게든 짬을 내서, 이 의식을 치르는 것이다.
“아, 다시 나오시네요.”
지나의 말에 다들 조금 흐트러졌던 자세를 바로 했다.
***
슬픔, 까진 없었다.
슬픔은 백부께서 더는 회생하실 수 없다는 걸 알았을 때, 그때 이미 다 흘려보냈던 것 같다.
게다가 오늘 일은 뭐, 백부의 헌신적 삶에 정당한 보상…… 같은 것도 아니고, 그저 리안 자신의 정치적 계산에 따른 것일 뿐인지라.
하나 해냈군, 하는 것 외에 다른 감상은 없었다.
다만.
의식을 마치고 나오면서, 도열해 있는 ‘권력 핵심’들을 볼 때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 면면들은 작년 4월 1일과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다. 죽어서 없어진 자, 감옥에 들어가거나 유배를 가서 오지 못한 자, 망명한 자, 실종된 자, 파면당하고 낙향한 자…… 그런 사람들을 다소나마 떠올려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새로운 얼굴들도 있다. 주로 구 민국정부를 구성하던, 고려국민당, 사회민주당, 공산당 사람들.
이 사람들은 구 제국정부 사람들과 어색한 거리를 두고 서 있다. 그게 묘하게 재미있다.
-하긴 자기들을 탄압하던 사람의 추증 의식에 참여한 셈이니까.
탄압 정도가 아니다. 미승휴는 구 민국정부를 상대로 흉계를 꾸몄고, 파멸로 몰고 갔다.
-그런 사람의 정통성을 인정해주는 자리에 모였으니 입장이 미묘할 만도 하겠지.
이를테면 미승휴의 과오에 대한 비판을 할 수는 있지만, 그 집권 자체를 부정하는 일은 이제 불가능해진다.
과오도 ‘그때는 그런 일이 있었지’ 수준의 일이 될 테고.
미승휴의 뒤를 이은 미리안 정권 자체를 뒤엎고, 제국입헌당을 갈기갈기 찢어놓을 정도의 급변 사태가 생기지 않는 이상은 어려울 터.
다른 당수들도 그렇지만, 고려국민당의 당수이자 외무장관인 안세규도 묘하게 시선을 피한다.
황제체제라는 봉합수술을 거친 이상, 뭐라고 대놓고 반기를 들거나 할 수는 없고…… 그렇다고 리안과 악수를 나누기도 좀 그렇다.
-그 점은 너그럽게 넘어가 줘야겠지.
어쨌든 이 자리는 반역자를 선별하는 자리가 아니라, 다시 한번 ‘봉합수술’의 결과를 확인하는 자리니까.
리안은 조금 앞서 걷고 있는 루우를 흘끔, 바라봤다.
사실 이 자리는 황제의 돌발 행동을 견제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칸발리크 재방문을 앞둔 이 시점에, 조금이라도 그녀를 바쁘게 해서 엉뚱한 짓을 못하게 막는 것.
미승휴를 추모하는 이 자리에서 ‘자신의 몽골 황위 계승 야심’이나 ‘다이온 연방’ 같은 걸 선전하진 못할 것이다.
어쨌든 이걸로 미리안 정권과 제3제국 체제는 다시 한번 결속을 다졌고, 루우가 잠시 칸발리크에 나갔다 오는 사이에 리안은 몇 가지 조치를 더 취해 둘 생각이다.
-그러려면 안세규와 이야기를 나눠봐야겠지.
이런저런 계산들을 평온한 표정 아래로 감추며, 리안은 계속 걸었다.
***
루우도 그 정도 꿍꿍이는 파악할 수 있다. 어쨌든 그녀도 칸발리크에서 궁중 생활을 해 본 사람이고, 재위도 만 1년을 채웠다.
안 그래도 업무에 허덕이느라, 남자친구와 가끔 손 한 번 잡아보는 것 말고는 데이트도 제대로 못 하는 태사가 이런 행사를 의미 없이 벌였을 리는 없다.
“그러고 보니까, 작년 여름 말인데,”
고개를 돌리며,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말을 꺼냈다. 리안은 눈썹을 조금 들어 올렸다.
“다 같이 해수욕이라고 하러 가자는 이야기는 어물쩍 넘어갔었지.”
“아, 워낙 일이 많았으니까.”
신수덕 토벌이며 뭐며…… 심지어 태사의 휴가는 도산서원 근처 비밀 연구시설을 둘러보는 걸 겸했었다.
“올해는 꼭 함께 갈 수 있었으면 좋겠어, 타이시.”
정치적 꿍꿍이를 넘어서, 이 말은 진심이다.
리안도 마주 웃어준다.
“그래, 그러자.”
이 약속은, 여름이 다 가기 전에 이번 사태를 진정시키겠다는 다짐이기도 했다.
***
류성일은 자신의 입장이 참 미묘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일단, 제3제국을 기획한 사람이다.
그러나 선대와는 의견 충돌을 빚고 정계에서 물러나 있다가, 미리안 집권과 함께 돌아왔다.
이렇게만 보면 구 제국 정부 사람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대학 시절을 제1대학에서 보낸 구 민국정부 인사 중, 류성일의 보호를 받은 사람들도 꽤 있다.
안세규를 비롯한 고려국민당 뿐만 아니라, 공산당과 사회민주당에도 류성일을 보면 일단 공손히 예를 갖추는 사람이 즐비하다.
자신의 지위와 인맥을 이용해 그들을 제국 정부의 탄압에서 보호해 주었기 때문에, 그들 입장에서 류성일은 ‘은사’라 부르기에 손색이 없는 인물이다.
고려의 정계를 크게 둘로 나눴을 때, 두 계파 모두의 호의를 받는 사람.
법무성 장관.
그리고 원로.
심심찮게, 차기 ‘태사’는 류성일이 되어야 하지 않나, 하는 이야기가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내심 흐뭇하긴 하다.
오늘 미승휴의 ‘추증’ 의식을 통해 제3제국의 초대, 2대 태사의 ‘승계’ 구도가 제대로 자리를 잡았다.
그렇다면 류성일은 보다 안정적인 ‘3대 태사’ 승계를 꿈꿔볼 만도 하다.
전에 안세규가 와서 한 이야기도 있고.
하지만…… 마음에 걸리는 것도 있다.
류성일의 눈길이, 하얀 제복을 걸친 소년 소녀, 혹은 청년들에게 향한다.
감찰국.
그 수장인 주견하.
류성일은 그에게 원죄가 있다.
류성일 본인의 안전만 생각한다면 주견하를 견제하고, 나아가 제거하는 것이 맞을 터이다.
그러나 미리안이 물러나고 류성일이 3대 태사가 되는 과정에서, 미리안의 승인이나 지원이 없을 수가 없다. 미리안과 주견하의 사이, 게다가 주견하가 매일같이 키워나가는 영향력을 생각해보면,
주견하 제거 시도는…… 미리안과의 전쟁을 의미한다.
그리고 지난 1년간 느낀 거지만, 저 어린 계집아이와 전쟁을 벌이면 류성일이 반드시 무참하게 패배할 것은 확실하다.
게다가 감찰국을 비롯한 미리안 측근들의 지지 없이 황궁, 동명특별시 안에서의 활동은 불가능할 테고.
-가능한 한 영원히 감출 수는 없을까.
그런 고뇌가, 깊어져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