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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소녀는 대원수가 되었다-159화 (159/541)

카간의 도시(9)

황제 루우의 소집.

이런저런 논의를 위해 자연스레 모인 적은 있지만, 황제가 측근들더러 급히 소집하라는 칙령을 내린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칸발리크 사태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겠다고 전화가 와서, 견하는 유지나만 데리고 황궁으로 향했다.

한재연에게는 공개할 수 없는 정보니까. 언젠가 양수영을 통해 간접적으로 전해지겠지만, 제한을 둘 필요는 있다.

루우의 집무실에 들어가자, 이제는 익숙한 고려 전통 갑주 장식에 눈이 간다. 황제의 격에 맞추기 위한 각종 기법이 들어가 무척 화려하다.

소녀 황제의 몸에도 꼭 맞도록 만들어졌지만, 아직 저걸 입고 공식 행사에 나선 적은 없다.

“혹시 혼자 있을 때 입어보기도 하는 거야?”

견하의 물음에 루우는 빤히 바라보다, 배시시 웃었다.

“비밀.”

곧이어 태사 리안도 방으로 들어왔다. 무척 피곤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하얀 얼굴은 더 창백해진 것 같고, 눈 밑에는 검은 그늘이 드리웠다.

“몽골과의 경제 협력 문제도 골치 아픈 데 또 무슨 골치 아픈 일이 생긴 거야…….”

그런 불평을 구시렁대고 있다.

“일이 잘 안 풀리나 봐, 타이시?”

“몽골 측도 바보는 아니니까 ‘고려가 앞으로 몽골 경제를 잠식해나가다가 잡아먹겠습니다’ 하면 ‘아이고 그러십시오’ 하지는 않겠지. 어려운 부분은 차무룡 장관이 해주고 있지만, 장관은 장관이야. 그 권한을 넘는 일은 내가 처리해야 한다고.”

하품 한 번.

“일단 간신히 고려 기업에서 생산한 물자의 수출량을 늘릴 순 있을 것 같아. 그걸로 칸발리크 시민들의 생활용품을 공급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거든. 기업들 숨통은 트였다고 봐야지. 몽골 시장을 얼마나 장악할 수 있는지는 각 기업들 역량에 달린 거고.”

그렇게 말하며 기지개를 켜고, 비로소 묻는다.

“그래. 황제 폐하께서 들고 오신 긴급한 안건은 대체 뭐지?”

“방금 최효윤 중장을 통해 들어온, 몽골 측 정보야.”

견하와 지나는 루우의 입에 집중한다. 리안 역시 불평하던 기색은 싹 사라지고, 이야기를 들을 준비를 한다.

루우는 사진을 포함한 서류 뭉치를 꺼냈다.

사진은…… 시레문 카간이 효윤에게 보여준 그것이다.

시레문이 했던 설명, 효윤이 추측한 내용이, 이 자리에서 루우의 입을 통해 반복된다.

“터져서 죽었다고?”

견하가 제일 먼저, 그렇게 한마디를 던졌다.

지나를 제외하고 여기 있는 모두가 안다. 그들이 본 ‘구체’는 그런 식으로 사라지지 않았다.

“확실히 이상한 현상이긴 해.”

리안도 굳은 얼굴로 그렇게 중얼거린다.

“누가 무슨 사고를 쳐서 저렇게 된 것도 아니고?”

“목격자가 있다고는 하지만 무슨 충격을 받았는지 제대로 된 증언은 불가능한 상황이래. 그렇지만 카라코룸에서 일어난 이 일…… 지금 칸발리크에서 벌어지는 사태와 관련이 있겠지.”

“그렇겠지.”

정리해보자면 이렇다.

칸발리크에서는 매일 밤 파멸인이 출현한다.

그 형태는 처음엔 일정했으나, 지금은 점점 기괴해지고 있다.

그런 와중에 카라코룸에서는 파멸인을 쏟아내는 구체가 죽었다.

“태사는 이 파멸인들이 누군가의 ‘의도’로 움직인다고 추측했지.”

“카라코룸에서 구체가 죽은 것도 누군가의 의도다, 그렇게 보는 건가 황제?”

“혹은 카라코룸에서 구체가 죽음으로써 ‘다른 의도’를 달성하려는 건지도 모르고.”

리안은 고개를 갸웃한다. 다른 의도라?

“이것 봐봐.”

루우가 가리킨 것은 칸발리크 시가의 지도였다.

“카라코룸에서 구체가 죽은 것, 그리고 칸발리크에서 파멸인이 계속 나타나는 것, 그 둘 사이에 어떤 직접적인 관련성이 있는지 지금은 규명할 수 없어. 그러기엔 자료가 부족하니까. 하지만…….”

황제의 손가락이 지도를 짚는다. 파멸인의 출현 지점이 도시 외곽을 따라 빼곡히 들어차 있고, 그 안쪽에는 굵은 선으로 표시된 몽골 군경의 방어선이 있다.

“그런 사태에 대해서 인간이 어떻게 반응하는가, 그걸 관찰하고 분석할 수는 있겠지.”

태사라면 알겠지? 라며 루우는 리안의 얼굴을 본다.

리안의 얼굴에서 의아함이 사라지고, 미묘하게 의미심장한 표정이 된다.

“파멸인을 역포위하듯, 증강된 부대로 도시를 포위하고 있군.”

“파멸인이 평상시 인간처럼 도로를 따라 움직여준다는 보장은 없으니까. 전쟁터에서도 그렇듯이, 도로뿐만 아니라 산과 들을 가로질러 전진할 수도 있다고 본 거지.”

“칸발리크 중심가를 공격하는 게 아니라, 반대로 방향을 돌려서 몽골 전체로 퍼져나갈 걸 우려하는 건가.”

“그때는 수도 방위가 문제가 아닐 테니까.”

리안은 지도를 흘끔거리며 서류를 넘긴다. 그러다 잃어버린 조각을 찾은 듯, 어떤 페이지에서 멈췄다.

“이건 또 뭐야. 원래 카라코룸 유적지 주변에 있던 병력도 칸발리크로 옮긴다?”

“카라코룸을 수비하는 병력은, 물론 몽골의 제2 도시에 맞는 방위 임무를 맡고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임무는 파멸인류의 폭주에서 도시를 지키는 것이었나봐.”

“그런데 이번에 구체가 죽었기 때문에 그렇게 많은 병력을 배치할 필요성은 줄어들었다는 건가.”

“그렇지. 차라리 동원할 수 있는 역량을 최대로 쏟아 넣아서 칸발리크 문제를 해결하는 편이 효율적이라고 본 거야.”

합리적인 판단이기는 하다. 이런 비상 상황에서는 다른 문제가 아무리 중요하다고 해도 ‘더 중요한’ 문제를 선별해내고, 거기에 집중해야 한다.

하지만, 뭔가가 마음에 걸린다.

“태사께선 파멸인이 누군가의 ‘의도’로 움직인다고 하셨죠.”

또다시 반복되는 말. 견하에게서 나온 말이다.

“만약에, 지금 이 몽골군의 움직임이……”

“……테러를 저지르는 자들의 의도대로라면, 이라는 건가.”

국경과 주요 도시, 거점을 제외하고 상당한 수의 몽골군 주력이 칸발리크에 몰려 있는 상황.

게다가 리안은 이 테러의 배후에 몽골에서 ‘혁명’을 일으키려는 세력이 있다고 봤다.

“칸발리크에 주력을 묶어두고, 군의 감시가 허술한 어딘가에서 혁명을 시작할 생각일까?”

방 안의 분위기는 무겁게 가라앉는다. 그렇다면 대체 어디서?

“일련의 상황 속에서 가장 경계가 느슨해진 도시겠죠.”

“역시 카라코룸인가.”

리안이 그 이름을 떠올리자마자, 루우가 부연설명한다.

“최근엔 빈민가 일대뿐만 아니라 도시 전체에 시위가 만연했다더군.”

시위. 견하는 아즈텍에 파견되었을 때를 떠올린다. 쿠아우테목에서 시위를 하던 사람들. 단순히 생활고를 호소하는 시위일지도 모르지만, 그게 혁명을 꿈꾸는 자들과 연결된다면…….

리안은 견하의 눈을 본다. 소년의 눈빛이 말하는 바는 명백하다. 변화하는 상황 속, 군사적 개입도 생각해 두긴 해야 한다고.

“우리 고려가 개입하기 전에 상황을 최대한 조용히 끝내는 방법이 하나 있지.”

의외로, 개입 외의 다른 수단은 황제의 입에서 나왔다.

“‘구조대’의 추가 파견이야. 그것도 현 상황을 아주 잘 이해하고, 몽골 고위층과도 언제든지 적극적인 교섭이 가능한 자. 더불어 전투 능력도 갖추면 더욱 좋지.”

“그 정도 조건에 맞는 사람은……”

리안은 다시 견하의 얼굴을 본다. 보내야 하나?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다.

소년의 왼팔. 손가락 끝까지 붕대를 감은 그 팔에는 아직 불안한 요소가 많다. 만약 이번에 보냈다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리안은 버틸 수 있을까?

불안하게 흔들리는 리안의 눈빛을 진정시키려, 견하가 입술을 떼려는 순간

다시 황제가 말한다.

“타이시, 역시 불안하겠지. 주 국장을 보내는 건.”

“……그래.”

“다행스럽게도 우리에겐 조건에 맞는 사람이 하나 더 있어. 게다가 이 사람은 지난번에 최효윤 중장과 함께 칸발리크에 다녀온 적도 있지.”

리안의 눈이 커졌다.

“황제가 직접……?!”

루우는 아까 견하에게 그랬듯이, 배시시 웃었다.

“다시 한번 몽골 카간과 정상 회담을 한다는 명분이면 충분해. 그리고 아까 타이시가 말했잖아. 경제 협력 문제가 잘 안 풀린다고. 그걸 빌미로 한 번 다녀오면 될 거야.”

두 손을 모으고, 어좌에 기댄다.

“가서 직접 보고 들으면 뭔가 길이 보이겠지.”

***

태사 미리안은 길게 고민한 끝에, 구조대의 증원 겸 정상회담이라는 명목으로 황제가 몽골을 방문하는 데 동의했다.

다들 물러가고 루우 혼자 남은 방 안.

이곳에서 홀로 허공을 노려보며, 생각에 잠기는 일이 많아졌다.

아니, 몽골의 공주이던 시절에도, 왜 자신은 카간의 자리를 승계할 수 없는지 분해서 씩씩대며 천장을 노려본 적이 있지 않나.

지금 생각해보면 웃음이 나온다.

“여하튼.”

혼잣말과 함께 추억을 정리하고, 눈앞의 문제에 집중한다.

루우가 몽골 방문을 결정한 건, 단순히 카라코룸에 있던 구체가 죽어서가 아니다.

건물 크기의 거대한 파멸인 개체가 나타나서도 아니고,

인간의 내장 비슷한 뭔가를 드러내거나, 이와 턱을 지닌 파멸인이 나타나서도 아니다.

루우의 신경을 건드리는 요소는 두 가지.

“……붉은 꿈.”

예전에 견하에게 한 번 ‘그런 꿈을 꾸지 않았는가’하고 물어본 적이 있다. 붉은 꿈은 인위적으로 양성된 이단에게서 전반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 꿈에서 나타나는 붉은 공간이 대체 어디인지는 아직 밝혀진 바가 없다.

“하긴 남의 꿈을 영화처럼 들여다볼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즉 후천적인 이단뿐만 아니라, 선천적으로 이단인 자들도 드물게 그런 꿈을 꾼다.

루우 본인이 그렇다.

하지만 루우가 보는 것은 정말로 새빨간 세상뿐이고, 견하처럼 파멸인이 가득 나온다든가 말을 건다든가 하는 일은 없다.

견하는 특수 사례다. 그렇기에 루우가 계속 지켜보는 것이다.

“그리고 ‘피’.”

이번에 잡은 파멸인은 형태도 형태지만, 상처에서 피를 흘렸다고 한다.

지금까지 없던 일이다.

“크기를 제외하고 생각해보면, 점점 더 기괴해지는 것 같지만.”

그 기괴함은 인간과 이질적이어서 느끼는 게 아니다.

오히려, 인간과 가까워지고 있어서 그런 느낌이 드는 것이다.

팔다리도, 턱이 생겨 입을 여닫을 수 있게 된 것도, 내장이 드러나는 것도, 그리고 마침내…… 피를 흘리는 것도.

“점점 인간에 가까워진다, 그렇게 생각하는 건 설레발인가.”

그럴지도 모른다. 단순히 루우가 모르는 새로운 뭔가가 튀어나오는 것일 뿐, 파멸인의 모습이 점점 인간에 가까워져 간다는 느낌은 착각일지도 모른다.

아니, 그렇지만, 퇴계 이황과 성리학자들은 왜……

파멸‘인(人)’이라는 이름을 붙인 거지?

머릿속 책장을 덮듯, 생각을 중단한다. 여기서 계속 생각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

“직접 가서 보는 수밖에.”

가서 보고, 자료를 모으자.

그러다 운이 좋으면 이단과 「쿠빌라이 문서」에 대한 단서도 얻을 수 있을지 모른다.

그 외에도 루우가 노리는 것들이 몇 가지 더 있었지만, 그녀는 가슴 속에만 담아두기로 했다.

준비하러 가볼까.

루우는 어좌에서 일어났다.

다시 한번 고향으로.

자신이 아직 모르는 진실을 마주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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