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간의 도시(8)
카간을 알현할 기회는, 어찌 되었든 영광이다.
고려에서는 황제와 태사의 측근이고, 작년에 이미 루우와 함께 카간을 뵌 적이 있었지만, 효윤은 그렇게 겸손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경호원과 비서관의 안내를 받아 카간의 집무실에 들어서자, 시레문은 활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앉아서 맞이한다 해도 감히 나무랄 사람은 없으련만, 그렇게 파격적인 대우를 해주는 것이다.
경호원도 비서도 살짝 놀란다. 물론 효윤도.
“최효윤 중장은 고려를 대표해 왔고, 짐은 몽골의 국가 원수지만, 지금은 그런 격식을 따지지 않아도 좋네. 짐의 입장에선 딸의 친구를 대접하는 자리니까 말이야. 친구네 집에서 즐겁게 보내다 갔으면 좋겠군.”
효윤은 어눌한 몽골어로 아, 감사합니다, 라고 대답한다.
시레문 카간의 말대로다.
여긴 루우의 집이다. 루우는…… 친구라고 할 수 있겠지. 그러니 친구네 집이라는 시레문의 말은 틀리진 않았다.
황궁을 ‘집’이라는 겸손한 표현으로 부르는 게 괜찮을지는 모르겠지만.
“앉게. 함께 식사라도 했으면 하지만, 알다시피 업무량이 한계까지 치솟아 올라서 말일세. 다과밖에 준비하지 못해 미안하네.”
시레문은 아까 효윤의 몽골어를 들으며 대충 그 실력을 짐작한 건지, 배려하며 또박또박, 천천히 말한다.
“아닙니다. 몽골 황궁에서 대접받는 거라면 뭐든…….”
대화가 잠시 끊기고, 두 사람은 차를 홀짝였다.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꺼내야 좋을까, 혹은 상대가 무슨 이야기를 꺼낼까 생각하는 시간을 둔다.
시레문이 먼저 입을 열었다.
“루우 테무르는, 잘 지내고 있나?”
멀리 내보낸 딸의 안부를 묻는, 여느 아버지나 할 법한 질문이었다.
뭐라고 대답하면 좋을까.
예, 잘 지내고 있어요. 이런 간단한 대답이나 듣자고 묻진 않았을 것이다.
잠시 생각한 끝에 효윤은 답을 내놓는다.
“예. 그렇게 되고 싶어 하던 황제 자리도 꽤 적성에 맞는 것 같고요. 서류 업무는 조금 힘들어하지만, 그래도 나름 재미있다고는 해요.”
말을 마쳐놓고 생각해본다. 딸의 친구가 딸의 아버지에게 한 말로 꽤 적절했다.
시레문은 희미한 미소를 짓는다.
“그렇게도 되고 싶어 하던 황제라. 그래. 그 애는 그렇게 자기 꿈을 찾아서 갔지.”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한번 질문을 던진다.
“이웃 나라의 황제가 되었다 해도 어쨌든 딸이니, 이렇게 물어볼 수밖에 없군. 어떤가? 짐의 딸은, 좋은 황제인가?”
난감한 질문이다. 잘못 긍정하면 그냥 건성으로 대답하는 것처럼 들릴 테고, 그렇다고 부정할 수도 없는 질문. 모르겠다는 답도 좋은 대답이 아니다.
역시 시간을 들여 대답해야 한다.
“저는 루우의 통치에 대해 좋다 나쁘다, 그렇게 말씀드리기에 적절한 사람은 아닌 것 같아요. 그러기엔 지나치게 가까이 있으니까요.”
효윤의 말대로, 리안이나 루우 곁에 가까이 있는 그녀는 객관적인 평가를 내리긴 어렵다.
“하지만 우리나라 국민들 평가는 전해드릴 수 있겠죠. 모두가 루우를 좋아해요. 전장에 직접 나설 정도로 헌신적이고, 황족이라는 낭만에 취해서 거들먹거리지도 않고. 학교 친구들도 귀엽다고 좋아하고.”
시레문의 미소가 깊어졌다.
“‘루우’. 그렇게 줄여서 부르는 건가.”
효윤만 그렇게 부르는 것은 아니건만, 어째서인지 얼굴이 빨개졌다.
“그런 애칭으로 부르는 걸 보니 꽤 친한가 보군. 친한 친구들이 주위에 있다면 잘 지내는 거겠지. 다행일세. 알다시피 루우 테무르와 만나도 국가원수끼리의 공식적인 회담이 주가 되다 보니 이런 이야기를 물어보긴 어려워서. 고맙네. 안심이 됐어.”
효윤은 살짝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하고, 시레문은 다음 화제로 넘어갔다.
“회담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지난번 회담에서 우리는 관세동맹뿐만 아니라 다른 부문에서도 서로 협력하기로 약속했었네. 특히 이단, 「쿠빌라이 문서」, 파멸인 같은 것들에 대해서.”
방 안의 분위기가 바뀐다.
환담의 시간은 지나가고, ‘일’ 이야기를 할 시간이 된 것이다.
“그래서 우리 쪽에선 여러 가지 자료를 제공했고, 마찬가지로 고려 쪽에서도 여러 자료를 제공받았네. 특히 이번 사태에 대해서도 중요한 조언을 받을 수 있어서 큰 도움이 됐지.”
자료 제공은 루우의 독단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정보를 보내기 전에 황제와 태사가 충분한 논의를 한다. 그렇게 해서 내놓을 정보와 감출 정보를 결정하고.
효윤에게도, 몽골에 파견되기 전에 그런 상황에 대한 숙지가 요구되었다.
“우리가 파악하고 있는 ‘파멸인’에 대한 정보와, 최효윤 중장, 즉 고려 측이 파악하고 있는 ‘파멸인’에 대한 정보가 얼마나 일치하는지 몇 가지 확인하고 싶은데.”
찻잔을 내려놓으며 효윤은 답했다.
“제가 대답할 수 있는 선에서라면. 그 점은 양해 부탁드립니다.”
“그러지. 군주 대 장군이라지만 어쨌든 짐은 외국인이니 말이야.”
마음 편히 있으라곤 했지만, 이 자리의 성격이 완전히 사사로운 것일 수는 없었다. 시레문은 몽골을 대표한다. 효윤이 고려 측 입장을 대변해 이 자리에 있는 것처럼.
시레문은 사진 하나를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폐하, 이건?”
“직접 보고 판단해주게.”
효윤은 사진을 집어 들었다. 흑백 사진이지만, 사진 속 방 안에 범벅이 된 검은 무언가가 ‘피’라는 것 정도는 구분할 수 있었다.
지름이 한 아름은 될 것 같은 눈알이 굴러다니는 방.
효윤이 알기로 이렇게 거대한 눈알을 지닌 물체는…… 하나뿐이다.
“설마 그, 파멸인을 뱉어내는 ‘구체’입니까? 아니, ‘구체였던’ 건가요?”
“그렇네. 원래는 최효윤 중장 자네도 아는 그 구체였지. 지금은 그렇게…… 죽었어. 반응과 활동을 완전히 중단했다고 하니 죽었다는 표현이 맞겠지.”
죽었다? 이렇게 터져서? 아니 파멸인이야 그렇다 치고 이 구체가 이런 식으로 죽을 수 있다고?
“짐이 받은 자료에 따르면 고려의 수도, 동명특별시의 지하철에도 이런 구체가 나타났다고 하던데.”
“네. 그랬습니다. 정확히 언제 나타났는지 특정할 수는 없지만, 비교적 최근에 나타나서 파멸인을 뱉어낸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 파멸인을 목격한 사람들의 증언을 따라 추적, 구체의 격퇴에 성공하긴 했습니다만……”
“격퇴했을 때, 그 자리에 있었나?”
“네. 저도 참가한 전투였습니다.”
“그 구체도 ‘이런 식으로 터져서’ 죽었나?”
“……아뇨.”
효윤은 그 전투를 떠올린다. 견하가 빨려 들어갔다가 팔이 이상하게 변해서 나온 그 전투.
구체는 열화된 파멸인 개체를 뱉어내며 발악하다가, 갑자기 공간 왜곡을 일으키며 주변에 있는 것들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제가 겪은 전투에선 이런 식이 아니었습니다. 어설프게 밖에 설명이 안 되겠지만…… 그, 구체는 둥글고 볼록하잖아요? 그런데 그게 마치, 오목해진 것처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구체에 대해서 밝혀진 바가 거의 없으니, 대체 왜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지도 알 수 없다.
다만 견하가 하얀 촉수들을 소환할 때, 마치 ‘공간을 도려낸 것 같은’ 뭔가를 만들어낸다는 걸 생각해보면…… 그런 현상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우리 측 이단이 구체를 베어내니, 하얗게 빛을 내다가 그대로 흩어져서 사라졌죠. 이런 식으로 터져서 시체를 남기진 않았습니다.”
“……완전히 다르군. 그렇다면 우리 측 사례가 특수 사례인가. 아니면, 고려에서 일어난 일이 특수 사례인가.”
“두 건뿐이니 뭐라 결론 내리긴 어려울 것 같아요.”
시레문은 손가락으로 이마를 문질렀다. 고뇌가 담긴 동작이다.
“이건 카라코룸 근처에 있는 사원에서 찍은 사진일세. 거기에 우리가 소재를 파악한 유일한 ‘구체’가 있었지. 지금은 이렇게 됐지만.”
카라코룸 근처 사원. 고려의 도산서원 같은 곳인가.
“물론 몽골 내에 있는 유일한 구체는 아닐 걸세. 이렇게 칸발리크에 파멸인들이 나타나는 걸 보면 여기에도 확실히 있다고 봐야겠지. 위치만 파악이 안 될 뿐.”
시레문의 그 말은 효윤도 고민에 잠기게 한다.
역시 위치만 파악이 안 될 뿐. 고려에도 이미 어딘가에 구체들이 있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는 늘…… 이런 종류의 테러를 두려워하면서 살아가야 하는가.
혹시라도 한족 무장투쟁가들의 손에 파멸인 관련 기술이 들어간다면…….
“어쨌든 구체를 물리친 사례도 있고, 이렇게 죽은 모습도 확인할 수 있으니, 긍정적으로 봐야겠지. 아직 밝혀진 바는 적지만, 죽일 수 없는 무언가인 건 아니니까.”
시레문의 말에 효윤이 끄덕인 그 순간,
비서관이 문을 두드린다. 카간의 허락으로 들어온 비서의 눈길은 효윤을 향했다.
“송구합니다. 고려의 최효윤 중장께 드릴 말씀이.”
효윤 대신 카간이 묻는다.
“무슨 일인가?”
“파멸인 출현입니다. 지난번처럼 거대한 개체는 아니지만, 행동이나 외양이 또 다른 특수한 개체라고.”
시레문과 효윤은 마주 본다.
점심시간이 지나긴 했지만 아직은 낮이다.
“첫 번째 사례 같은 건가……!”
시레문이 낮게 깐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것과 동시에, 효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는 이만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예를 차리지 못함을 용서해주시길.”
시레문은 빠르고 짧게 끄덕였다. 그도 전쟁 경험이 있는 만큼, 시급한 일에 융통성이 필요함을 잘 안다.
효윤은 비서관의 안내를 따로 기다리지 않고 곧바로 달리듯 방을 나갔다.
***
‘탈’ 같은 얼굴은 전에 보던 파멸인과 같다.
전체적으로 좀 더 크고, 길쭉하다는 점이 다를 뿐.
그리고 턱이 좌, 우, 아래, 이렇게 세 갈래로 벌어진다.
울음소리는 그 기괴한 외양에 안 어울리게 여전히 새 울음소리 같다.
목구멍으로 추정되는 몸 안쪽에서 좀 더 크게 울리긴 하지만.
턱 안쪽은…… 눈알과 이빨로 가득하다.
그렇게 덕지덕지 붙어 있는 눈알도 징그럽지만, 더 역겨운 건 이빨.
“차라리 짐승 새끼들 송곳니처럼 뾰족하다면 그러려니 하겠는데.”
태주갑이 그렇게 불평한다. 효윤은 대답하진 않았지만 동의했다.
눈알들 사이사이에 붙어 있는 이빨은, 꼭 사람의 이를 크게 만들어 놓은 것처럼 생겼으니까.
“일단 사격부터 해본답니다. 제압이 되는지.”
전체적인 크기는 일반적인 파멸인과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에, 지난번처럼 포격을 날릴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몽골군과 거기 소속된 이단들도 와 있기에, 효윤을 비롯한 고려 측 ‘구조대’가 전면에 일은 없을 듯하다.
“하지만…… 역시 낮에 보니 기묘하네요.”
어둑한 지하 시설의 조명을 통해서 보거나, 밤에 골목에서 봤을 때와는 또 다르다.
대낮의 햇살을 받으며 기괴하게 몸을 비트는 파멸인은, 주변 풍경에 어설프게 합성한 사진 같다.
감상도 잠시.
몽골군이 사격한다. 상대적으로 소수인 고려 측 구조대에 비해 압도적인 화력이다.
한 차례 사격으로 세 갈래 턱 중 두 개가 떨어져 나갔고, 몸통 곳곳에 구멍이 뚫렸다.
움직임이 충분히 감소하는 것을 확인한 뒤, 이단들이 신중하게 접근해 도륙한다.
“……?”
뭔가 이상하다.
평소와는 다른데?
뭐가 다르지?
“중장님, 저건…….”
한 생명의 신체를 훼손하면 나오는 것. 그러나 지금까지 파멸인을 공격할 때는 나오지 않던 것.
그렇다. 지금까지 안 보이던 게 이상한 거다.
초여름 햇살 아래 붉게 반짝이며 튀어오르는 저것은,
“……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