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간의 도시(7)
아즈텍의 옛 도읍, 테노치티틀란.
연방의 행정력은 말뿐, 도시 전역에는 ‘철혈의 꽃’이 뿌린 흉흉한 분위기가 짙게 깔렸다.
그 흉흉함이란 다름 아닌, ‘봉기’를 향한 꿈틀거림.
거들먹거리며 돌아다니는 철혈의 꽃 소속 청년들. 경찰조차 그들의 눈치를 보며, 그들이 저지르는 각종 폭력 사건에 미온적으로 대처할 수밖에 없다.
어슬렁어슬렁 나타나 형식적인 사건접수를 받으면 그걸로 끝이다.
들리는 말로는 시장이나 시의원들도 철혈의 꽃에 가입했거나, 그들의 영향력 아래 있다고 한다.
아마 뇌물이든 주먹이든 칼이든, 갖은 수단을 다 썼을 것이다.
“다들 바쁘군.”
신수덕은 철혈의 꽃 테노치티틀란 지부에서 사무실 하나를 배정받았다.
그 사무실로 가는 동안, 바삐 움직이는 청년들의 모습을 눈에 담는다.
현 정부에 대항하는 봉기. 그 준비를 위한 움직임이다.
민중들에게 철혈의 꽃을 홍보하는 단계를 넘어서, 이제 적극적으로 당원을 모집하는 단계로 나아갔다.
각종 전단을 뿌리고 거리를 행진하며 위세를 과시하고, 주요 도시에 있는 거점 간 결속을 다져나간다.
비슷한 성향의 단체들을 힘으로 억누르든, 교섭하든 해서 철혈의 꽃 산하로 끌어들인다.
마치 20년 전, 세계대전 때 신수덕이 허동주와 함께 했던 일과 비슷하다.
몰래 무기를 사들이거나 생산해 비축하고, 정권에 대한 적대감을 부추기며, 다가올 정면 대결…… 즉 내전을 향해 각오를 다져나가는 것까지도.
“20년.”
중얼거리면서 잠시 발을 멈춘다.
“20년이라…….”
다시 한번 같은 말을 뱉으며 발걸음을 옮긴다.
다른 이들은 신수덕을, 포유류의 감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파충류인 것마냥 대한다. 그러나 그에게도 감상적인 부분은 있다.
이렇게 옛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순간과 마주하면, 그도 잠깐은 추억에 잠기는 것이다.
“나도 어렸을 때는 저렇게 열정적으로 뛰어다녔지.”
증오스런 침략자들을 물리치기 위해. 전우들을 지키기 위해. 그리고 다시는 그 침략민족이 고개를 들고 하늘을 쳐다보지 못하게 만들기 위해.
그렇게 20년을 뛰어다니다니, 참으로 굴곡진 인생을 살았다.
밑바닥, 이등병부터 시작해 식민지 총독까지 맡으며 인생의 절정기를 누렸다.
그리고 작년에는 모든 걸 잃고 쫓겨나 망명객 신세.
“젊음은 부럽지만, 어렸을 때 이런 추락을 겪었다면 절대로 다시 일어서지 못했겠지.”
전쟁 경험의 장점 중 하나는, 목숨만 붙어 있다면 다시 일어서서 싸울 의지를 준다는 것이다.
사무실로 들어와 문을 닫는다.
산동 총독으로 근무하면서부터 신수덕은 군인보다는 관료에 더 가까워져 갔다.
“어렸을 때처럼 전장에 나서진 못하겠지만, 나이를 먹었을 때는 따로 할 수 있는 일이 있지.”
아직 고려에 남아있는 동지가 비밀리에 보낸 보고서. 방금 그걸 받아서 돌아오는 길이다.
책상에 앉아 정돈된 자세로 서류를 펼치고, 찬찬히 읽어내려간다.
그가 뿌린 ‘씨앗’이 어떻게 작동했는지.
“낭키아스의 게레센제든, 범 알타이 인민동맹이든, 둘 중 하나는 뭔가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역시였군.”
낭키아스의 게레센제에게는 자신을 도피시켜주는 조건으로 선물을 하나 안겨줬다. 바로 ‘기갑사’ 제작 기술이다.
하지만 게레센제가 기술만 차지하고 자신을 제거할 가능성이 있었기에, 보험으로 선물을 하나 더 준비했다.
에스파냐령 마카오로 넘어갈 때, 그 선물을 넘기자 게레센제의 얼굴은 의아함으로 가득 찼다.
이해하는 것조차 어려웠겠지. 이게 무슨 쓸모인가 싶기도 했을 것이다.
아무래도 일정 수준 이상의 이단 연구가 진척된 국가여야, 그 쓸모를 짐작할 수 있을 테니까.
신수덕이 게레센제에게 준 두 번째 선물.
그것은 「쿠빌라이 문서」 중에서도 가장 비밀리에 보관되어 있던 것.
‘문의 개방’과 ‘파멸인 조종’에 관한 것이다.
“뭐, 가장 철저하게 감춰뒀다 해도, 600년이나 시간이 지나면 풍화되기 마련이지.”
그 시대에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했어도, 결국 사람이 한 일이다. 시간의 무게를 버틸 수 있을 리 없다.
어이없을 정도로 쉽게 비밀을 손에 넣었을 때의 일이 떠올라, 신수덕은 피식 웃었다.
“전략적으로 유용한 자원이라고 생각했지만, 문하시중 각하께선 쓰지 않으셨지.”
만약 이걸 썼더라면, 범람한 파멸인에 의해 어마어마한 사상자가 나왔겠지만, 내전에선 승리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허동주는 한족을 증오하는 것만큼 고려 민족을 사랑했다. 굳이 그렇게 하지 않고서라도 내전에서 승리할 자신도 있었을 것이다.
허동주도, 신수덕도 예측하지 못한 변수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그렇게 됐을 것이다.
“……후회는 시간 낭비다.”
자신에게 충고하듯 한마디를 뱉고, 수덕은 그 생각을 털어버렸다.
어쨌든 허동주는 죽었고, 거기서 파멸인을 동원해 발악해봤자 판을 뒤집을 수는 없었다.
“목표를 명확히 해야 한다.”
그의 목적은 단순한 복수가 아니다. 물론 미리안이나 그 몽골년에겐 허동주의 목숨값을 받아내겠지만, 수덕은 그 이상을 생각하고 있었다.
“복귀.”
평생 자기들을 위해 헌신한 남자를 죽게 만든 우매한 동포들에게, 뭔가 놓친 것은 없는지 돌아보게 만드는 것.
문하시중 허동주의 사상이, 가르침이, 이 시대 고려에 정말 필요한 것이었음을 깨닫게 하는 것.
신수덕이 만드는 혼돈은 허동주의 동지와 제자들이 고려에 복귀하는 데 필요한 수단이다.
혼돈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아즈텍에서, 그리고 지금 몽골의 칸발리크에서 일어나는 혼돈 끝에, 고려인들이 스스로 틀렸음을 깨닫고 자신들에게 손을 내밀게끔 해야 한다.
“게레센제도 그 혼돈에 일조했으면 했는데 말이야. 모든 계획이 다 예정대로 돌아갈 수는 없는 게 이치라지만.”
게레센제는 기껏 받은 선물을 쓰지 않고, 그 시점에서 몽골이나 고려에 협력적인 태도로 전환했다.
하긴 낭키아스 입장에선 관세동맹 등에 협조하는 게 국가적으로 이득이다. 신수덕을 빼돌린 혐의로 손상된 외교 관계를 회복하는 데에도 좋고.
하지만 수덕은 그런 무난한 결말을 바라지 않는다.
그런 식으로 가면 미리안과 루우 정권의 안정이 기다리고 있다.
따라서 살짝, 혼돈을 불어넣을 다른 요인을 준비했다.
“게레센제는 자기한테만 준 줄 알았겠지만, 글쎄. 일단 내가 살아있는 이상 누구에게든 줄 수 있지.”
그래서 신수덕은 범 알타이 인민동맹에도, 게레센제에게 줬던 것과 같은 선물을 주었다.
내전 시기 이전에 이미 교류가 있었기에, 산동 정벌전 직전에 간신히 건네줄 수 있었다.
“파멸인을 통한 혼돈의 확산…… 생각보다 잘 해내고 있군.”
칸발리크 전역에 대규모 파멸인을 풀어놓고, 도시 자체를 무너뜨리는 것도 한 방법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범 알타이 인민동맹은 그런 파괴적 혼돈보다는, 계산된 혼돈을 추구하고 있다.
조금씩, 조금씩 내놓으면서, 그 수위를 높여나간다.
자신들이 얼마나 잘 통제할 수 있는지, 또 이 파멸인들로 어떤 일까지 가능한지, 연습해가면서.
몽골 황실과 정부의 반응을 유도하며, ‘통제된 혼돈’ 속으로 몰고 들어간다.
신수덕이 선호하는 방식과 비슷한 전략이다. 수덕은 이 집단이 하는 짓이, 확실히 마음에 들었다.
“다만, 시레문 카간도 바보는 아닐 테니 아예 막대한 물량을 투입해 해결을 보려고 할 텐데…… 어떻게 대응할 셈이지?”
수도 주변으로 속속 모여들고 있다는 몽골군 부대들. 수덕은 보고서의 그 부분부터 몇 줄 더 아래로 읽어내려가다, 다시 한번 피식 웃었다.
“설마, 의도된 건가?”
그렇다면 생각보다 일이 빠르게 진전되겠군.
신수덕은 책상 서랍에서 성냥을 꺼냈다. 다 읽은 서류에 불을 붙여, 특별히 주문한 쓰레기통 안에서 태운다.
연기는 창문을 활짝 열어 한꺼번에 날려 보내고, 남은 재는 변기에 흘려보낸다.
누군가 여기에 들어오면 텁텁한 냄새와 쓰레기통에 남은 그을음을 알아차리겠지만, 무엇을 태웠는지까지는 알아맞히지 못할 것이다.
이건, 이제 아즈텍 대륙에서는 신수덕만 아는 일이 됐다.
환기를 마친 방 안의 공기를 들이마시며, 신수덕은 중얼거린다.
“여기선 내전이 일어나는 것까지만 보고 떠나야겠어. 귀국 일정을 앞당겨야 할지도 모르니.”
***
칸발리크 인근. 옛 사원 주변의 경비를 책임지고 있는 투글룩 소장은, 부하의 보고를 받고 허겁지겁 사원으로 향했다.
지금까지 없던 보고였고, 그런 보고가 올라올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으니까.
사원 안에서 대기 중이던 다른 부하들의 경례를 받는 둥 마는 둥 하면서 묻는다.
“사실인가?”
“앞장서겠습니다.”
“필요 없네.”
부하를 지나쳐, 발을 재게 놀리며 나아간다. 반쯤 구보하는 듯한 걸음이다.
이윽고 현장에 도착했을 때, 투글룩은 긴 신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구체’를 격리 중이던 방 안이 온통 피바다였다. 구체는…… 그 징그러운 눈알이라든가 각종 기관을 바닥 여기저기에 흘려놓았다. 이미 구체라 말할 수 없는 상태였다.
피냄새도…… 어마어마하다. 적어도 구체를 유지하고 있을 땐 피냄새가 이렇게 진동하진 않았는데.
“사상자가 있나? 아니면 이 피는 구체가 허물어지면서 나온 건가?”
“사상자는 없습니다. 말씀하신대로 이 피는 구체의 것입니다.”
“어떻게 된 거지? 누가 수류탄이라도 던졌나?”
“아닙니다. 최초 목격자의 말에 따르면 구체가 끓어오르듯이 일그러지다가, 갑자기 터져나가면서 이렇게 됐다고 합니다.”
“그 ‘최초 목격자’라는 놈은 어디에 있나?”
부하는 다시 자기 부관에게 고개를 돌렸다. 턱짓하며 ‘데려오게’라 말하자 부관이 뛰어간다.
잠시 뒤, 병사 둘이 활동복 차림의 병사 하나를 데려온다. 머리카락에 방금 감은 것처럼 물기가 있다.
군복이 아닌 점, 그리고 비누 냄새로 보아…….
“구체가 터지면서 그 피를 다 뒤집어쓰는 바람에…… 씻겨 오느라 시간이 걸렸습니다.”
투글룩은 병사에게 다가갔다. 병사는 기본적인 차렷 자세조차 제대로 잡지 못하고 있었다.
“자네가 저 구체가 망가지는 걸 본 최초 목격자라던데?”
병사는 대답하지 않는다. ‘휘우우우우우이이이이이’하는, 말이 되지 않는 괴상한 소리만 냈다.
“어지간히 충격적이었던 건가. 정신을 놓아버렸군.”
“따귀나 오금을 갈겨보기도 했습니다만…… 돌아오질 않고 있습니다.”
이 병사와 같은 사례는, 투글룩 이하 장병들에겐 처음 겪는 일은 아니다. 구체가 눈으로 보이는 곳에서 지나치게 오래 근무하면 누구나, ‘붉은 악몽’을 호소한다.
그렇기에 근무 시간 배정에는 철저히 신경을 썼건만.
“일단은 쉬게 하게. 전역을 시키더라도 이 녀석이 본 건 어떻게든 들어둬야 해.”
부하는 병사를 내보냈고, 투글룩은 몸을 돌려 다시 구체를 바라봤다.
죽은…… 건가?
투글룩은 코를 만지며 카간께 대체 뭐라고 보고해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