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간의 도시(1)
효윤은 머리카락을 묶으며 거울을 본다.
어깨와 허리의 맨살을 드러내는 상의.
피부는 몇 군데 흉터가 남은 걸 제외하면 깨끗하다. 혈색도 좋아서 마냥 창백한 것보다는 건강해 보인다. 그래도 이렇게 맨살을 훤히 드러내는 건 조금 부끄럽다.
그런 생각이 드는 한편으로, 그래도 격하게 움직일 땐 이게 제일 편하다, 고 위안 삼는다. 그나마 군살이 없어서 못나 보이진 않으니 정말 다행이다.
“음, 그래도.”
배에 살짝 잡힌 근육. 살짝 잡혔다고 믿고 싶다. 견하가 이걸 보면 징그럽다고 하진 않겠지…….
“아니 애초에 왜 배를 보여준다는 생각을……?”
얼굴이 조금 더워졌다. 서둘러 재킷을 걸쳤다.
묶은 포니테일을 가볍게 흔들어본다. 거울 안에서 찰랑이는 곡선을 그리며 움직인다.
마치 서양 기사들이 쓰는 투구의 술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만큼 맵시 있어 만족스러운 머리카락이다.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 효윤은 거울에서 눈을 떼고 문밖에 있는 사람을 향해 들어오세요, 라고 말했다.
들어온 사람은, 양수영이다.
견하의 감찰국에 소속된 요원. 천손민족협회 출신이고, 작년에는 효윤이 속한 반의 반장을 맡기도 했다.
그때는 저 강아지 같은 얼굴로 허동주의 하수인 노릇을 하고 있을 거라곤 생각도 못 했었는데.
하긴 지금처럼 견하의 하수인이 되어서, 자신과 함께 임무를 수행하게 되리라는 것도 상상하지 못했다. 좀 더 친근한…… 유지나를 보내지 않을까 싶었는데 그쪽은 견하가 곁에 두고 싶은 걸까.
양수영은 감찰국의 제복이 아니라, 군복에 가까운 활동하기 편한 복장을 했다. 그러고 보니 소총 정도는 다룰 수 있던가.
“준비는?”
짧은 물음이다. 두 사람은 견하를 중심으로 학교에서 자주 마주치는 편이지만, 이렇게 단둘이 이야기를 나눈 적은 거의 없었다.
긴 대화를 주고받기엔 아직 어색하다.
“다 됐어. 갈까?”
두 사람은 복도로 나와 걷는다.
어색한 사이, 어색한 침묵, 괴괴한 복도에 울리는 두 소녀의 발소리.
효윤은 그런 분위기를 좀 바꿔볼까 싶어 질문을 던졌다.
“견하가 맡긴 일은 잘될 것 같아?”
갑작스러운 질문에 수영은 잠깐 멈칫했지만, 이내 무난한 대답을 내놓았다.
“글쎄. 맡긴 일이니까 열심히는 해야겠지만…… 잘됐는지 아닌지는 주견하가 판단하는 거라.”
“역시 좀 까다롭나?”
“까다롭다기엔…… 일을 완전히 엉망으로 처리하지 않는 이상 별다른 질책은 안 해. 가져온 정보가 적다면 적은 대로 분석해서 나름대로 결론을 내놓는 사람이라. 확실히 머리는 비상하지.”
머리는 비상하다, 라는 말이 효윤의 가슴을 아프게 찌르고 들어온다.
그런 내색을 하지 않으려고, 효윤은 계속 대화를 이어나갔다.
“일을 엉망으로 처리한다면 어떤 식으로……?”
“예를 들자면, 이번에 주견하가 준 임무는 칸발리크에서 일어난 테러에 대한 조사야. 그 파멸인……? 인가 뭔가에 대한 것과 몽골인들 민심에 대한 조사. 그냥 가서 보고 듣고, 느낀 대로 주견하 앞에 가서 이야기하면 되는 일이야. 그런데 말이 앞뒤가 안 맞거나, 더 가서 조사해볼 여건이 충분한데도 안 했다면 폭풍이 몰아치는 거지.”
수영의 말에 효윤은 쿡,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 주견하가 막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거야? 상상이 안 되는데?”
“아, 언성을 높이진 않아. 조용히 타이르는 것 같은데, 듣다 보면 식은땀이 나지. 보통 남자애들이 동물처럼 날뛰는 거랑은 완전히 달라.”
그 말에는 효윤도 동의했다. 견하는 또래 남자애들과는 다르다. 어떨 때는 연상처럼 느껴지기도 하니까.
“그러면 이번 칸발리크 임무, 어떻게 해 볼 생각이야?”
“파멸인이나 이단에 대해서는 내가 아는 게 너무 없으니 큰 성과를 기대하긴 힘들고…… 널 따라다니면서 칸발리크 민심이나 분위기를 파악하는 데 집중해야겠지.”
효윤은 수영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수영의 방침이 대략 정해졌다면 일은 좀 더 수월해진다. 어떻게 손발을 맞춰야 할지 가늠해볼 수 있으니까.
“알았어. 같이 전투를 수행하라고는 하지 않겠지만, 자기 몸은 돌보면서 따라와. 나도 네 안전은 최선을 다해 볼 테니까.”
***
위기에 처한 칸발리크 시민들, 특히 도시 어딘가에 고립되었을지도 모를 사람들을 돕기 위해 ‘구조대’를 파견하고 싶다.
이런 고려 제국 측 의사가 몽골 대사를 통해 전해졌지만, 응답이 오는 데에는 시간이 좀 걸렸다.
그러자 고려 측은 ‘동명특별시 지하철에서 파멸인과의 교전이 있었다’는 정보를 슬쩍 흘렸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고려의 구조대 파견을 받아들이겠다는 응답이 왔다.
물론 여기엔 고려의 파멸인 교전 경험을 배워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섞여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몽골 내에서 일어나는 상황을 고려인들이 다소 알아간다 해도 감수할만하다는 계산을 했을 테고.
즉, 고려와 몽골 모두, ‘구조대’는 겉치레에 불과하다는 걸 충분히 인식하고 이번 일에 합의했다.
효윤과 수영은 그런 사실을 각자의 상관에게서 충분히 전달받고, 서부군 사령부로 향했다.
***
조유관은 자신의 집무실에서 두 소녀의 경례를 받으며 기묘한 감상에 사로잡혔다.
고등학생들의 군대 체험 캠프에, 이래 봬도 한 방면을 맡은 사령관의 집무실을 내어준 기분.
물론 두 소녀는 진지한 얼굴이었기에, 조유관은 시답잖은 농담을 던지지는 않는다.
대신 복장을 본다.
최효윤은 그냥 그 또래가 입는, 활동하기 편한 차림을 했다. 태사부 직속인 데다, 원래 이단들은 좀 자유분방한 성격이니 이런 옷차림에 간섭할 수는 없다.
양수영은…… 감찰국의 제복을 걸치진 않았지만, 군복을 입지도 않았다. 군복 비슷한 느낌을 주는 옷을 걸쳤을 뿐이다. 다른 장교가 봤다면 군기가 빠졌다고 한마디 했겠지만, 조유관의 눈에는 다르게 보인다.
저건, 양수영은 군 소속이 아니라는 무언의 표시.
만약 지금 양수영의 옷차림에 대해 잔소리를 늘어놓거나, 군복을 입으라 강요하면, 곧바로 감찰국 국장에게 보고가 올라갈 것이다.
감찰국 국장…… 그 ‘호전적인 소년’이 얼마나 노발대발할지는 안 봐도 뻔한 일.
게다가 주견하는 지난번 숙군과, 쿠데타 진압에서 비중 있는 역할을 한 인물이다. 다음 숙청 대상에 ‘건방진 군인들’을 올려놓고 마음껏 휘저어놓으리라는 것 정도는 얼마든지 예상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조유관은 침착하게 경례를 받아준다.
“두 사람이 머물 임시 숙소를 준비했네. 편히 쉬도록 하게. 태사부에서 전달받은 대로 칸발리크 임무에 투입할 인원 후보도 미리 선정해뒀는데, 이건 잠시 뒤에 최효윤 중장이 같이 검토해주지 않겠나?”
최효윤은 양수영을 향해 눈짓했고, 양수영은 장교의 안내를 받으며 집무실을 나갔다.
집무실에는 최효윤과 조유관만 남았다.
“지금 바로 후보 목록을 검토해 볼 수 있겠습니까? 태사께서 긴급을 요하는 일이라고 하셔서.”
조유관은 미소를 지었다. 미인이 자신이 남들에게 어떻게 보일지 잘 알듯이, 조유관은 자신의 인상이 얼마나 너그럽게 보일 수 있는지 잘 안다.
덥수룩한 수염과 눈썹 사이로 웃음 지으며 눈을 감추면, 그야말로 인자한 할아버지가 완성된다.
“최효윤 중장은 기민한 사람이군. 얼마든지 보시게. 나도 일 처리는 확실한 편이 좋으니.”
조유관은 효윤에게 목록을 넘겨주면서, 앉아서 읽을 수 있도록 소파 쪽으로 손짓을 했다.
“감사합니다.”
소파에 앉아 종이를 넘기는 소녀. 저 종이 위에는 조유관이 나름 신경 써서 고른 군인들의 신상 정보가 적혀 있다. 성격, 공적, 전투 스타일 같은 정보까지도.
최효윤의 어설픈 지휘를 받아도 스스로 판단하고 성과를 낼 수 있을만큼 감각이 좋은 사람들이면서, 동시에 성격들도 둥글둥글하다. 저런 사람들과 함께 임무를 수행하는 것만으로도 ‘장교’ 최효윤은 크게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소녀를 위한 배려는 다 했으니 이제 자신의 용무를 꺼내도록 할까.
“그런데, 내가 아무래도 변방에 있다 보니 동명 소식은 영 어두워서 말일세. 이번 칸발리크 파견 임무, 그렇게 중요한 것인가?”
소녀는 잠깐 고개를 들어 조유관의 물음에 답한다.
“어…… 예. 자세하게 말씀드릴 순 없지만, 고려와 몽골 사이의 외교나 경제 문제도 걸려 있으니까요.”
‘자세히 말씀드릴 순 없지만’이라. 명확하게 선을 긋는군. 역시 태사의 최측근이라 그런지 상당히 조심스러운 태도다.
조유관도 조심하면서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태사의 뒤를 캐내려고 집요하게 물어본다는 인상을 주면 안 되니까.
“그렇지. 동맹국의 수도에 그런 난리가 났는데 보고만 있다면 양국의 우호에 큰 손상이 가겠지. 관세동맹 문제도 걸려 있고. 나야 나라에서 꼬박꼬박 월급 주는 군인이라 잘 느끼지 못하지만, 민간인 친구들은 요즘 경제 사정이 영 말이 아닌 모양이야.”
“……네. 그래서 각료들도 관세동맹에 많은 신경을 쓰는 듯합니다.”
“수도에서 그런 난리가 났으니만큼 몽골 경제 사정도 안 좋아질 것 같은데, 어떤가? 심각한가?”
칸발리크에서 괴물들이 나온다는 첩보는 조유관도 이미 들었다. 그게 어떤 이름으로 불리는지까지는 아직 알지 못하지만, 조유관에겐 전후 맥락을 연결할만한 머리가 있다.
바로 얼마 전에, 황제와 태사, 감찰국 국장까지 전부 동명시 지하철에 투입됐던 사건.
그 안에서 구체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까지는 알지 못하지만, 그 정도 고위급 인사들이 달려들었다면 큰 사건이었음은 분명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일어난 칸발리크 테러.
이상할 정도로 기민한 태사부의 대처.
연결 지어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제가 경제 전문가는 아니지만, 분위기가 좋지 않다고 들었습니다.”
“분위기가 정말 안 좋긴 한 모양일세. 오죽하면 그…… 무슨 괴물이 골목에 나온다는 이야기도 들리고 말이야.”
효윤의 손가락이 아주 잠깐 멈춘다. 조유관의 눈은, 그 찰나의 정지를 놓치지 않았다.
“황당하긴 하지만, 제국의 군인으로서 ‘만에 하나’ 그런 소문이 사실일 경우도 생각해두지 않을 순 없었네. 그래서 이단 몇 명도 뽑아뒀지. 유능한 친구들이니까 도움이 될 걸세.”
“배려 감사합니다. 확실히 마음이 놓입니다.”
효윤의 대답은 예의상 하는 말 같지만, 어느 정도는 ‘괴물’에 대한 소문을 인정하는 것이라고도 읽을 수 있는 말이다.
떠보기는 여기까지. 계속 인자한 할아버지를 연기하자.
“부족하면 얼마든지 증원을 요청하게. 인원이든, 장비든. 국경 바로 너머에 이 조유관이 있음을 잊지 말라는 말일세.”
씨앗을 심어둔다. 태사의 최측근과의 친교. 친절한, 언제든지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어른이라는 인상.
반드시 요긴하게 쓰일 날이 온다.
효윤은 그 또래다운 활짝 핀 미소로, 조유관의 친절에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