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정비(9)
“대원황국(大元皇國)이라는 새로운 국호, 카라코룸 천도, 참의원과 민의원이라는 양원제 도입, 전부 나쁘지 않은 아이디어야. 아니, 오히려 마음에 든다고 해야겠지.”
황제, 루우는 그렇게 말하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러면서 생각한다. 해가 바뀌긴 했지만, 제위에 오른 지는 이제 겨우 몇 개월.
과연 방금 그 미소에 위엄이 있었을까? 관록이 붙어가고 있긴 한 걸까? 시간이 지나면 알아서 해결될 일일까? 아니면 다른 뭔가를 해야 하는 걸까.
미소 하나에도 그런 고민을 담으며, 루우는 서류에서 눈을 떼고 한재연을 바라봤다.
그녀가 아까와 같은 고민을 한 건, 눈앞의 소년에게서 이젠 제법 학자같은 느낌이 풍겼기 때문이다. 여전히 겉모습은 거의 소녀라고 해도 좋을 미소년이었지만.
소년, 한재연은 황제의 칭찬에도 그저 차분한 어조로 답한다.
“마음에 드셨다니 다행입니다만……”
말꼬리를 흐린다. 다분히 의도적이라는 게 느껴져 루우는 눈을 조금 크게 떴다.
“더 수정하거나 추가하길 바라는 부분은 없으신지요.”
“없어. 그런데……”
재미있는 걸 발견했다는 듯이, 루우의 눈매가 곡선을 그린다.
“이거 다, 한재연 네 생각인가?”
“……아닙니다.”
라고만 말했다가, 어차피 추궁당하게 될 테니 이 정도는 털어놓기로 한다.
“새 국호와 양원제는 제 생각입니다만, 카라코룸 천도는 주견하 국장의 생각입니다.”
“호오, 그렇다면 주견하 국장의 최측근인 너는, 카라코룸으로 천도하자는 주 국장의 의도가 뭐라고 생각하지?”
식은땀이 흐른다.
루우는 포기하지 않을 테니 자신이 들은 대로 말해야 할까? 하지만 그렇게 하면 재연은 루우가 감찰국에 심어 둔 첩자 노릇을 한 꼴이 된다. 만약 자신이 견하의 속내를 루우에게 다 털어놓은 걸 알게 되면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아직은, 견하에게서 자신을 지킬 힘이 없다.
그러니 유일한 방법은,
“모르겠습니다. 아시다시피, 주 국장은 자기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니까요. 특히 저처럼 한 번 적이었던 사람에게는.”
말을 해놓고 나서 어색하진 않았는지 돌이켜본다. 됐어. 그럴싸한 변명이다.
루우는 그 변명에 수긍한 건지, 아니면 오늘은 그냥 봐주기로 한 건지 모를 표정으로 다리를 꼰다. 가느다란 다리지만 제법 굴곡이 잡혀 있어 시선을 끌어당긴다. 재연은 방 한구석으로 눈을 돌렸다.
“어차피 들어봤자 짐의 생각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정도겠지. 말하지 않아도 상관없어. 주견하는 카라코룸 천도를 통해 민족 문제도, 권력 문제도 단숨에 해결하려는 의도겠지.”
그렇지만, 이라며 루우는 목소리를 낮췄다.
“조심은 해 두는 편이 좋을 거야. 주견하는 태사에게 절대적 충성을 바치고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본인 야심까지 제쳐두는 인간은 아니야. 태사에게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일을 추진하면서도, 자기 이익도 확실히 챙기고 있을걸.”
그녀의 말대로, 주견하는 태사의 권력을 다져나가는 선봉에 서 있으면서, 동시에 감찰국의 세력을 점차 확대해 나가고 있다.
그러고 보면 허동주를 죽인 것도, 태사 미리안이 정권을 안정시키는 데 도움을 줬지만, 동시에 주견하라는 이름이 정계에 퍼져나간 계기가 되었다.
견하는 재연 앞에서는 그 이야기는 꺼내지도 않고, 재연도 모르는 척하고 있지만, 언젠가는…….
재연은 거기서 생각을 멈췄다. 그 생각은 더 진전시켜선 안 된다.
“그럼, 폐하께서 새로운 조칙을 내리시기 전까지, 저는 일단 연구에 전념하겠습니다.”
그는 그렇게 말하고 예를 표한 다음, 뒷걸음질로 물러난다.
루우는 갑자기 뭔가 생각났는지 아, 하며 재연을 멈춰 세웠다.
“이번에 칸발리크로 파견될 구조대의 책임자는 최효윤 중장이라지?”
“……예? 아, 예. 그렇습니다.”
“주견하 국장이 아니라?”
재연의 얼굴이 질문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듯 멍해졌다가, 이내 날카롭게 굳었다.
“주견하 국장이 파견을 자원했었습니다만, 태사가 반대했다고…….”
“흠. 알겠어. 물러가 봐.”
재연은 비로소 방을 나갔다.
소녀 황제에겐 비로소 생각에 깊이 잠길 시간이 왔다.
“무슨 꿍꿍이일까.”
주견하는 마음에 드는 소년이다. 잘생겼고, 언변도 성격도 좋다. 확실히 이성으로서의 호감이 든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권력 문제에 있어선 확실히 주의해야 할 사람이다.
루우의 숙부들이 조카 루우를 사랑하는 감정과, 국가 지도자로서 자신의 의무를 구분하듯.
사랑하는 조카를 배려하기보다는 자신의 막료들과 신민들을 우선했음을, 루우 역시 본받아야 한다.
주견하는 안세규와 달리 자신의 몽골 황위 계승을 반대하진 않는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자신의 권력이 태사 미리안을 침범하지 않도록 끊임없이 견제할 것이다.
“굳이 칸발리크에 가 보려 했던 것도 그 일환이겠지.”
물론 견하에겐 그것 말고도 또 눈앞에 놓인 문제가 있다.
기계처럼 변해버린 왼팔.
그 왼팔에 대해 깊이 이해하려면, 이단에 대한, 파멸인에 대한 더 많은 지식이 필요하다.
“태사는 그런 주견하를 저지했고.”
일단은 견하를 자신의 그늘에서 보호하겠다는 방침일까. 그렇다면 루우가 견하와 직접 대면하는 것도 태사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살짝, 질투가 난다.
그러면서 권력이든 예쁘고 잘생긴 사람이든 뭐든 가지려는 자신의 욕심에, 어처구니가 없어 웃음이 나왔다.
또 한편으로 이번 사태에는 개입하지 못하리라는 예감에 살짝, 짜증도 난다. 리안은 황제가 직접 테러 현장 한복판으로 가는 걸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복잡한 감정이 가슴 안에서 섞이지만, 루우가 이걸 해결할 방법은 시간을 보내는 것 말고는 없다.
“한동안은 지루하겠네.”
새끼손가락으로 귀를 후비며 루우는 어좌에서 일어났다.
낮잠이나 자야겠어.
***
“구조대에 편성할 인원 몇 명을 내어달라고요?”
서부군 사령관 조유관은 그 수염에 어울리는 걸걸한 목소리로 되묻는다.
전쟁성 장관 강태훈은 그 수염을 보고 어떻게 저렇게 털이 얼굴 대부분을 덮을 수 있는지 신기해하다, 퍼득 정신을 차렸다.
그러곤 조유관의 말에 답한다.
“예. 현장 책임은 최효윤…… 중장이 맡기로 했답니다.”
최효윤, 이라. 조유관은 그 이름을 머릿속 기록에서 찾아본다. 태사의 경호원이었지.
그 계집아이…… 아니다. 역시 권력 핵심이다. 중장이야 어차피 태사의 대원수 계급과 격을 맞추기 위한 것이겠지만.
“그 최효윤 중장이라는 사람, 주견하 대령과 비교해보면 어떻습니까?”
서부군 사령부에서 동명시로 올라온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조유관은 수도의 정세를 어느 정도는 파악하고 있었다.
얼마 전 제국입헌당 전당대회에서 태사의 최측근이라는 위상을 뽐냈던 걸 들은 모양이다.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건가, 생각하며 강태훈은 답한다.
“주견하 대령, 즉 감찰국 국장 주견하처럼 두각을 나타내는 건 아닙니다만, 여러 정황상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을 지닌 인물인 건 확실합니다.”
“구체적으로는 어떤……?”
“작년, 태사를 암살 시도에서 구해냈을 뿐만 아니라, 허동주 주살 작전에서도 태사의 경호를 맡았었죠. 그 후에는 황제 폐하를 모시고 칸발리크를 방문……
들리는 말로는 최효윤 중장을 통하지 않고는 두 분께 접근하기 어렵다고 합니다. 태사와 폐하 모두 최효윤 중장에게 마음속 깊은 고민을 털어놓는다고도 하고요.”
“단순한 경호원이 아니라, 나름대로 정치 문제에도 간섭하는 건가. 태사께서 아직 후계자로 계시던 시절에는, 그저 경호원으로 배치된 이단 여자아이 정도였다고 들었는데. 정치를 헤아릴만한 능력이 있겠습니까?”
“기본적으로 머리는 있을 겁니다. 선대께서 그 정도도 안 되는 아이를 후계자의 최측근에 배치하진 않으셨을 테니까요.”
태사를 처음 봤을 때도 그랬지만, 조유관은 자신이 느낀 첫인상은 최대한 무시하고 보는 사람이다. 그는 10대, 20대 아이들이 중앙 정부에 앉아서 소꿉놀이하듯 나라를 주무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중요한 점은 실제로, 지금, 얼마나 잘 주무르고 있는가, 이다.
결과로 드러난 일, 눈앞에서 진행되는 일, 그걸 수행하는 사람의 능력.
그걸 꿰뚫어 보지 못했다면 조유관은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없었을 것이다.
지금도 조유관은 자신이 이끄는 서부군과 최효윤 사이에 어떤 연결점을 마련할 수 있지 않을까 모색하고 있다.
겉으로는 술잔을 기울이고 있지만.
“요즘은 분위기가 꽤 나아져서, 이렇게 사적인 술자리에서 그다지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니 살만합니다.”
“아, 정말 그렇군요.”
간단한 대답과 간단한 미소를 돌려준다. 뇌의 반쪽은 다른 생각을 열심히 굴리는 데 써야 하니까.
“최효윤 중장은…… 아직까지 ‘지휘 경험’은 없겠죠?”
“그렇겠죠, 아무래도…….”
강태훈은 ‘중장은 그냥 격을 맞추기 위한 계급이니까’라는 말은 삼킨다.
반면에 조유관은 그 점에 주목했다.
“이번 기회에 서부군 사령부에서 잠깐, 간단하게나마 장교로서의 안목을 길러주는 것도 좋을 것 같군요.”
“그래도 괜찮을까요?”
강태훈의 물음은 그러다 최효윤의 심기를 거스르면, 태사의 눈 밖에 나지 않을까하는 우려다.
“괜찮을 겁니다. 최효윤 중장과 친목도 다져두고.”
아, 그런가. 조유관은 이번에 최효윤 중장을 통해 태사부에 선을 댈 생각인가.
조유관과 그가 이끄는 서부군, 즉 구 극북방위군은 고려 제국의 군대가 아니라 고려국민당의 사병이 아니냐는 식으로 입방아에 오르곤 한다. 그렇다면 머지않아 또 다른 숙군의 대상이 되겠지.
조유관은 이번 기회에 그런 처지를 모면해 볼 생각인 듯하다.
지난번 반란 진압 축하연 자리에서 조유관은 ‘실력을 입증해서라도 군부 내에서의 입지를 다지겠다’고 했었는데, 이게 그건가.
그러나 조유관의 속내는 강태훈이 들여다본 것과는 좀 다른 곳으로 뻗어나가고 있었다.
-안세규 장관은 비밀리에 몽골 혁명을 지원하라고 했다. 그 결과 혁명이 일어나면 안세규는 불간섭 입장을 내세울 것이다. 그게 민주공화정을 향한 길이라고 생각하겠지. 허나…….
조유관의 물리적 힘이 태사에게 먼저 쓸려나간다면, 고려국민당은 그런 꿈조차 꿀 수 없다.
-그러므로 어느 정도, 제한된 규모의 전쟁터가 필요하다. 이번 칸발리크 사태 같은.
여기서 최효윤을 제대로 보좌하며 실력을 입증하자. 그러면 태사부에도 쓸모가 있다는 인식을 심어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태사의 최측근과 친분을 다져둘 수 있다.
-다들 주견하 쪽에 판돈을 건다면, 나는 최효윤 쪽에 판돈을 걸지.
그리고.
-지휘 역량이 없는 장교는 지휘 역량을 길러주면 된다.
조유관은 최효윤을 지휘관으로 기를 대략적인 구상을 떠올렸다. 그렇게 해서 최효윤을 자기 사람으로 만들면, 아니, 조유관이 최효윤의 사람이 되면, 적어도 안전은 확보된다.
더 나아가 최효윤을 통해 권력 핵심에 접근, 옛 동지들의 이상도 이룰 수 있을지 모른다.
안세규도 나름 이상을 향한 길을 찾고 있지만,
조유관 역시 자기 나름의 길을 모색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