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정비(8)
“뭐 이렇게 불개입 방침을 정했지만, 마냥 손을 놓고만 있을 수는 없어서 칸발리크의 현황을 계속 보고받고는 있지.”
그렇게 말하고서 리안은 의자에 등을 기댄 채, 피곤한 듯 고개를 돌렸다. 그 하얀 옆얼굴 위로, 머리칼이 명주실처럼 드리웠다.
날렵한 턱선이 반투명한 검은 커튼 뒤에서 보일 듯 말 듯 하다.
견하는 그런 리안의 얼굴을 감상하다,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지금 중요한 이야기하고 있는데 내 얼굴이나 감상하고 있는거야?’라고 묻는 듯한 웃음이 그녀의 입술 위로 떠올랐다.
소년은 얼굴이 빨개진 채로 리안의 말에 대응하는 적당한 질문을 만들었다.
“자세한 소식이 들어왔나요?”
아무래도 해외의 정보는 외무성이나 군의 정보망을 통해야 하기에, 국내 문제에만 간신히 손을 댈 수 있는 견하는 이렇게 물을 수밖에 없다.
리안도 진지한 표정으로 돌아가 대답한다.
“우리야 지하철 깊숙한 곳에서 시민들 모르게 괴물들을 처리할 수 있었지만, 칸발리크는 아니었던 모양이야. 대낮에 당당하게 거리 한복판에 나타났더라고.”
리안은 사진 한 장을 책상 위로 쓱 밀어냈다. 견하는 그 사진을 들여다봤다. 이제는 조금 익숙해진 괴물의 모습이 찍혀 있다. 찍을 때 흔들렸는지 초점이 어긋나있지만…… 틀림없는 파멸인이다.
파멸인 주변으로 흩날리는 ‘검은 무언가’는 희생자들의 신체나 피일까?
“이거 한 마리뿐이었나요?”
“처음엔 그랬지.”
‘처음엔’이라는 말에 견하는 눈살을 찌푸린다. 잔인한 일들에 익숙해졌다고 해서 상황의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대략 30명 이상의 시민들이 희생됐어. 그러고 나서야 군과 경찰이 출동해서,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한바탕 총알을 퍼부어 준 다음에야 저지할 수 있었지. 30여 명의 희생자들에겐 안된 말이지만, 이런 사태를 처음 겪는 것 치고는 빠른 대처였어.”
견하의 고개가 의구심으로 기울어진다.
“정말 파멸인과의 대면이 처음이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에요. 이미 우리처럼 ‘일반 국민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곳’에서 싸워본 적이 있고, 그에 따른 대응책 작성은 이미 마쳤을지도 모르니까요.”
리안은 기지개를 켰다. 작고 가는 체구라 그런가, 팔과 어깨의 움직임이 왠지 귀엽다. 물론 그녀도 자신의 그런 매력은 알지만, 내색은 하지 않는다.
견하를 유혹하고 그 반응을 보는 건 즐겁지만 때와 장소를 가릴 줄 알아야한다.
“견하 군 말대로 ‘알 수 없는 일’이니까, 그 추측이 사실이라 해도 우리가 대처할 방법은 없어. 그런 정보를 활용할 방안도 마땅치 않고.”
현재 태사부가 칸발리크 테러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경로에는 한계가 있다. 즉 주어진 정보를 바탕으로 ‘대처할 수 있는 일에만’ 대응책을 마련해 둘 수 있을 뿐이다.
몽골이 어떤 사건을 겪었고, 어떤 방식으로 대처했는지를 알아내는 건, 지금으로선 불가능하다.
“몽골에서도 이단 관련 사건이나 연구는 카간 직속이 아니면 알기 어렵다더라고. 그 말인즉, 카간이 관련 정보를 직접 관리하고 있다는 말이지.”
“그렇다면 시레문 카간이나 볼로드 타이시 정도가 아니면 그 정보에 접촉하긴 어렵겠네요.”
리안과 견하는 마주보며, 동시에 끄덕인다.
“그래도 지금까지 얻은 정보로 나름 추측해볼 만한 부분들도 있어.”
리안의 눈길이, 아까 전부터 입을 다물고 있던 효윤을 향한다. 효윤의 눈길은 다시 견하에게 향했다.
“칸발리크에 처음 출현했던 파멸인은 우리가 봤던 파멸인들과는 한 가지 차이가 있어. 거기서부터 시작해야 할 것 같아.”
“차이, 라…….”
“동명시 지하철에 나타났던 파멸인들은, 처음엔 민간인을 공격하지 않았어. 하지만 칸발리크의 파멸인은 나타나자마자 무차별적인 공격을 시작했다고 해.”
“지난번 파멸인과의 차이점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도산서원에서 본 파멸인과의 공통점이라고 볼 수도 있겠군.”
“……그래.”
도산서원 파멸인도 어마어마한 희생자를 냈었다.
“어떤 경우엔 공격 없이 지켜보기만 하고, 또 어떤 경우엔 먼저 공격을 해 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어.”
“그렇기에 이 파멸인의 출현을 우연히,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재해일 가능성을 배제하진 못해.”
리안의 말이었다. 그녀의 말대로 이런 문제는 신중하게 판단해야 한다. 아무리 작은 가능성도 치워둘 수는 없다.
“칸발리크 테러가 아니라, 그냥 칸발리크에서 일어날 사고일 가능성도 있다는 말씀이신가요?”
“어디까지나 ‘가능성’ 문제야. 하지만 나는 지난번 지하철 사건 때 확실히 느꼈어. 파멸인에게 의사가 있든지, 아니면 누군가 자신의 의도대로 파멸인을 조종할 수 있다고.”
근거는 없어, 그냥 직감이야. 라며 리안은 양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효윤이 다시 말을 잇는다.
“그 외에도 이상한 일들이 계속 일어나고 있어. 매일 밤, 최소 한 마리 이상의 파멸인이 칸발리크 시내 어딘가에서 나타나. 주로 으슥한 골목 같은 데서. 그래서 수는 적지만 피해자는 계속 나오고 있고.”
“그건…… 일반적인 테러와는 좀 다르지 않나? 보통은 사람이 많은 곳에 대량으로 파멸인을 풀어서 큰 피해를 주려고 할 텐데 말이야.”
“그래서 이상하다는 거야. 아까 언니 말대로 ‘우연히’ 일어난 사고라, ‘그냥 칸발리크 자체가 그렇게 파멸인이 출현하는 저주받은 땅이 되어버린 건 아닌가’ 싶기도 해.”
“하지만 ‘으슥한 골목만 골라서 나온다’는 건, 역시 ‘의도’가 개입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데.”
“어쨌든 그런 일들이 반복된 결과, 지금 칸발리크는 몽골의 수도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괴괴한 도시가 되어가는 모양이야. 다들 외출도 자제하고.”
지금은 밤에, 으슥한 골목에 나타난다지만, 첫 등장은 낮, 사람이 많은 거리 한복판이었다.
밤이든 낮이든 돌아다니다가 언제 그런 끔찍한 최후를 맞이할지 알 수 없으니, 그냥 집에 머무는 게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할밖에.
“어쨌든 여기서 우리가 내릴 결론은……”
“……이 이상 뭔가를 추측해내기엔 정보가 너무 부족하다는 거겠지.”
효윤과 견하의 눈길이 리안을 향한다. 리안은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꺼냈다.
“지금 우리 태사부가 몽골 관련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경로는 크게 네 가지가 있어.”
첫째는 몽골 대사관에서 ‘공식적으로’ 전해준 정보. 이미 확정된 일이라 시기적으로 늦은 정보거나, 치부를 드러내고 싶지 않은 몽골 정부의 손길을 가장 많이 탄 정보다.
둘째는 외무성에서 독자적으로 입수한 정보. 몽골 정계 깊숙한 곳에서 나온 이야기들까지 알 수 있지만, 역시 외무장관 안세규가 그 정보에 어떤 편집을 가했을지 알 수 없다는 문제가 있다.
셋째는 군의 정보당국에서 캐낸 정보. 이는 몽골의 군사적 움직임에 대해서는 다른 경로의 정보보다는 많은 걸 알려준다.
특히 이번 칸발리크 사태에 군이나 경찰이 어떻게 움직이는가를 잘 알 수 있다. 다만 정계 깊숙한 곳의 의중까지 접근하긴 어렵다.
넷째는 루우에게서 나오는 정보. 루우는 몽골 카간과 독대가 가능한 몇 안 되는 사람이기에, 가장 민감한 이야기를 내놓을 수 있다.
다만 루우가 몽골의 모든 사정을 낱낱이 파악할 수는 없다는 점, 정보를 즉각 얻지는 못한다는 한계가 있다.
루우 본인을 얼마나 믿을 수 있는지도 문제다.
“네 가지 경로 모두 각각 장단이 있지. 그래서 나는 이번에 다섯 번째 임시 경로를 확보해보려고 해.”
“우리가 직접 칸발리크에서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보고 온다는 거죠?”
“그래.”
또 해외 파견인가, 견하는 쓰게 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최대한 빨리 출발할 수 있도록 준비할게요. 이번에도 한재연이랑 같이……”
“아니.”
단호하게 떨어진 리안의 말에 견하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멈출 수밖에 없었다.
“견하 군은, 고되겠지만 이번엔 감찰국 업무와 동시에 내 경호를 맡아줘. 칸발리크에는 최효윤 중장이 간다.”
네? 하고 되물으려다 말고, 견하는 일단 자리에 다시 앉았다. 눈을 깜박이며 생각해본다. 무슨 의미지?
“제가 효윤이랑 공을 다투는 건 아니지만, 왜 제가 가지 않고 효윤이가 가는지 알 수 있을까요?”
“효윤이는 지난번에 황제 폐하를 수행해서 칸발리크에 한 번 다녀왔으니까 익숙할 거다…… 는 이유도 있지만,”
리안의 턱짓이 견하의 왼팔을 가리켰다.
“그 팔 때문이야. 한동안은 국내에서 안정을 취하면서 지켜봐야겠어.”
상박 가운데부터 그 아래가 기계처럼 변한 왼팔. 남들에게 함부로 보일 수 없는 노릇이라, 지금은 소매와 장갑으로 가렸다.
유일한 고민은 하복을 입을 계절이 오면 어떻게 하는가였는데.
지금 이렇게, 리안이 자신에게 제동을 거는 이유가 될 줄이야.
통증이 있는 것도 아니고 감각이 망가진 것도 아니다. 별다른 이상은 없다고 봐도 좋다. 그러나 일단은 지켜봐야 한다는 리안의 말…… 에 대해서는 무조건 아니라고 반박할 수도 없다.
이상한 상태긴 하니까. 누가 그 핏덩어리 구체에 빨려 들어갔다가 이런 기계 팔을 달고 나왔겠는가?
“누나 말대로 다소간 위험성은 있을지 모르지만, 이건 그런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제가 가봐야 할 일이라고 생각해요.”
리안은 대답하지 않는다. 긍정하지도 않고 부정하지도 않는다. 그저 견하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볼 뿐.
“거기서 이단에 대한 자료들, 특히 제 몸 상태에 대한 정보들을 더 얻을 수 있을지도 몰라요. 위기에 처한 우방국 시민들을 구조한다는 윤리적인 명분으로 가면, 고려의 국위선양도 되고 몽골인들의 민심도 얻을 수 있겠죠.
장기적으로 봤을 때 그런 민심은 중요한 자산이 될 거예요. 뿐만 아니라, 지금 개입에 반대하는 안세규에게도 압박을 넣을 수……”
견하는 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리안이 무겁게 고개를 가로저었기 때문이다.
“감소할만한 위험이 아니야, 견하 군.”
리안은 짐짓, 조금 화가 난 표정을 짓는다. 눈물이 고일까 봐 그런다는 걸 소년은 알까.
“최효윤 중장은 지금 아주 건강한 상태지. 칸발리크 파견 임무에서 자기 몸 하나 정도는 건져올 수 있어.
그런데 주견하 대령은? 겉으로는 멀쩡해 보일지 몰라도 속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아무도 몰라. 칸발리크에서도 또 구체를 마주치면, 이번엔 살아 돌아올 수 있겠어? 장담할 수 있어?”
상관으로서 부하에게, 임무의 위험성에 대해 엄격히 다그친다.
하지만 굉장히 사적인 의도가 섞여 있다는 걸, 그녀의 소년은 알고 있을까.
“감찰국 국장 주견하의 생환 가능성이 낮은 임무야. 주 국장의 신변에 이상이 생겨서 정치경찰실과 감찰국 업무가 마비되는 것, 내 정권 핵심인사가 사라져서 권력에 공백이 생기는 것, 나는 둘 다 감당할 수 없어.”
그러니 허락도 할 수 없다. 리안은 그렇게 말을 마쳤다.
견하도 그렇게 말을 쏟아내는 리안의 얼굴을 똑바로 들여다보다, 고개를 푹 숙인다.
“알겠어요. 하지만 저희 쪽 사람 하나를 같이 보내서 정보를 수집하는 것 정도는 괜찮겠죠?”
“그건 허락할게. 그리고 견하 군 아이디어도 하나 채택하고. 이번 칸발리크 파견은 시민들을 위한 ‘구조대’라는 명분을 내세우자. 이런 명분이면 몽골도 거절은 못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