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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소녀는 대원수가 되었다-148화 (148/541)

재정비(7)

“제 생각도 태사 각하, 외무장관과 같습니다. 정치적인 이유도 있겠습니다만, 그보다도 군사개입을 할 여력이 없다는 현실적인 이유에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전쟁성 장관 강태훈은 그렇게 말했다. 그의 말마따나 내전, 쿠데타, 숙군, 대공황…… 1929년부터 올해 초까지 국내외 정세는 고려 제국을 정신없이 뒤흔들었으니까.

“국가도, 군도, 재정비를 위해 모든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야 할 때입니다.”

군은 동원령으로 덩치를 크게 늘렸다가, 동원령 해제와 함께 재편되는 중이었다. 문제는 그 와중에 숙군과 쿠데타가 벌어졌고, 이런 문제들까지 수습하려다 보니 생각 이상으로 오래 앓고 있다.

단순히 자를 사람은 자르고, 부대 배치를 바꾸는 선에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내전을 통해 얻은 전술적, 전략적 교훈들을 정리해 교리에 반영해야 했다. 그 교리가 잘 작동할 수 있도록 제도적, 물질적 토대도 다시 짜야 한다는 과제도 있었다.

철도를 통한 동원 시스템. 혁명군이 했던 장난을 다른 누군가가 치지 못하도록 재구축한다.

기갑사. 그 전술적, 전략적 활용을 위해 교리를 재검토하고, 생산 설비를 확보한다.

그 외에도 수도 방어전에서 얻은 교훈, 용성 공략전에서 얻은 교훈 등도, 기록을 정리하고 평가하기 위해 연구비를 투자해야 한다.

“전쟁성은 이러한 재정비에 최소 5년이 필요하다고 보고 있습니다.”

강태훈의 단호한 말에 리안은 턱끝을 손가락으로 살짝 쓸었다. 마음 같아선 올해 안에 끝내라고 하고 싶지만 이제 전시도 아니고 그렇게 다그치는 건 어렵겠지.

여하튼, 리안을 비롯한 각료 모두가 ‘어지간히 급박한 사태가 벌어지지 않는 이상 몽골 개입은 무리’라는 결론에 동의했다.

그렇게 의견이 모인 가운데, 재무장관 차무룡이 추가 의견을 낸다.

“개입 문제야 그렇게 결론을 내린다지만, 간신히 성사된 관세동맹은 어떻게 유지하면 좋을까 하는 문제가 남아 있습니다.”

루우의 야심 이전에, 관세동맹은 고려가 경제대공황을 극복하는 데 필요한 중요 정책이다. 군사개입은 하지 않는다고 해도 몽골에서 일어나는 일을 마냥 지켜보고만 있을 순 없다.

리안도 풀어지려던 자세를 바로하며, 차무룡의 말을 받았다.

“이 관세동맹의 중심축은 고려와 몽골이죠. 4개국 모두에 이득이 돌아가도록 한다곤 하지만, 실질적으로 가장 큰 이득을 볼 세력도 고려와 몽골입니다.

그런데 두 나라 중 한쪽이 무너진다면, 낭키아스와 키타이를 붙잡아둘 명분도, 여력도 타격을 받겠죠. 이에 대한 대응책은 있어야 합니다.”

현 몽골 정부와 황실이 안정을 유지한다면, 그건 그것대로 루우의 야망에 도움이 될지도 모르지만……. 그런 생각은 속으로 삼킨다. 어쨌든 대처할 수 없는 변화보다는 예측 가능한 안정이 편하다.

“우리의 힘이 닿는 범위 내에서 경제적 원조 정도는 해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차무룡이 그렇게 다시 리안의 말을 받는다. 리안은 아주 가볍게 눈살을 찌푸렸다. 못마땅하다는 뜻이 아니라, 선뜻 답을 내놓기가 곤란하다는 뜻이다.

“그런데 우리에게 그럴만한 여유가 있던가요? 우리는 고려의 경제를 재건하는 것뿐만 아니라 키타이 쪽에도 막대한 경제 원조를 해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몽골까지 원조해 줄 만큼…… 우리가 풍족한 상황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데요.”

차무룡은 리안의 우려를 충분히 이해했다는 듯, 그리고 그에 대한 답도 이미 준비됐다는 듯, 자신만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키타이에서처럼 무상 원조를 할 여력은 없습니다. 몽골을 향한 원조는 키타이에 대한 원조와는 그 성격을 달리해야 합니다.”

리안의 얼굴에 의문이 떠오른다. 그 표정만으로도 질문이 되고, 계속 설명해보라는 허락이 된다.

“원조 그 자체가 이득으로 돌아오도록 해야 합니다. 원금에 이자까지 받아내야 한다는 거죠.

예를 들면 원조 과정에서 우리 고려의 기업이 제한 없이 몽골에 진출할 수 있도록 한다든가, 어떻게든 몽골 내에서 경제적 영향력을 증대하는 방식으로.”

‘영향력 증대’라고 부드럽게 말하긴 했지만, 장기적으로는 ‘몽골을 고려에 경제적으로 종속시키는 것은 어떤가’하는 말이다. 경제관료가 품어 볼 법한 야심이다.

“요컨대, 관세동맹에 붙잡아두기 위한 키타이 원조와 달리, 몽골 쪽에는 투자금을 확실히 회수할 수 있는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거군요.”

리안은 차무룡의 말을 정리하고, 그와 마주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당장은 몽골에 지원할 여유가 많이 부족하다는 점은 해결이 안 되는데요.”

“그 여유는 다른 곳에서 구해오는 게 어떤가, 하고 제안드리고 싶습니다.”

“‘다른 곳’……?”

“우리 고려는 지금까지 일본, 몽골, 키타이, 낭키아스, 아즈텍 및 유럽 각국과 활발히 무역하며 경제적 성장을 이뤘습니다. 선대 태사의 영도 아래 이뤄낸 기적적인 성과였죠. 다만 그 후 우리 경제는 기존 무역 대상국들 외에, 다른 나라들과의 무역엔 그리 큰 비중을 두지 않았습니다.”

차무룡의 말대로 고려의 무역은 주요 경제 대국들에 집중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런 형태의 무역이 지난 20년 동안 고려의 경제를 크게 성장시켜 온 것도 사실이지만, 대공황을 맞이한 지금은 변화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아져 간다.

경제 대국들이 줄줄이 엮인 채 함께 무너져 가고 있으니까.

“그러니 시야를 넓혀보자는 것이지요. 아시아 내륙의 알티샤흐르, 탕구트, 티베트, 대예 뿐만 아니라, 바다를 통해 다리다, 보우슈엥, 베트남 시장에도 접근해 볼 수 있겠습니다.”

그 말이 어딘가 걸렸는지, 외무장관 안세규가 입을 열었다.

“월남해(越南海) 쪽 무역에 접근하려면 지금 마카오를 점유 중인 에스파냐의 양해가 필요할 텐데요.”

마카오를 중심으로 한 월남해 무역의 장악. 이에 대한 에스파냐의 집착은 무시할만한 수준은 아니다.

“그쪽 무역에 손을 뻗는 일이 에스파냐를 자극할 수는 있겠지만, 그들 나라가 에스파냐의 보호국도 아닌데 자유무역을 가로막을 명분은 없겠죠.

감정적으로야 문제가 될 수 있겠습니다만, 그것도 해결할 방도가 없는 건 아닙니다. 월남해에서의 무역이 크게 늘어나면 결국 주요 무역항인 마카오와, 그 주인인 에스파냐의 이익에도 상당히 기여할 수 있다는 점을 잘 설득하면 됩니다.”

안세규는 한발 물러난다. 이 차무룡이라는 경제 관료는 생각보다 많은 준비를 해 왔다.

차무룡은 안세규가 별다른 반론을 펼치지 않자, 하던 이야기를 마저 이어나갔다.

“그 외에도 마닐라, 마자파히트, 라타나코신과의 경제교류를 활성화하는 방안을 생각해봤습니다. 더 나아가…… 봉래국과의 교류도 점차 늘려나가야 한다고 봅니다.”

봉래국. 마자파히트와 마닐라의 동남쪽으로 바다를 건너, 남반구의 거대한 대륙을 중심으로 주변 여러 섬을 장악한 국가다. ‘신선들이 사는 섬’의 이름을 딴 국호에서 알 수 있듯이, 한족 이주민들이 개척한 식민지에서 기원했다.

본국인 태평천국이 멸망하면서 자연히 독립을 이루게 된 나라라, 지금도 승전국들과의 사이는 어색하다.

태평천국의 계승이나 복수를 외치는 건 아니지만, 태평천국의 한족들과 싸웠던 나라들은 봉래국을 꺼림칙하게 여겼다.

한족 유일의 독립국가가 되어버린 지금은 식민지가 된 동포들의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것은 아닌가 감시를 받고 있기도 하다.

“봉래와의 무역 문제는 쉽게만 생각할 건 아닌 듯하군요.”

다시 리안이 입을 열었다. 안보, 정치, 군사 문제가 겹치는 사안이다.

“하지만 오랫동안 데면데면했던 관계를 끝내고, 새롭게 친교를 다질 필요는 있어요.”

“어디까지나 경제를 책임진 재무장관으로서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봉래 측도 우리와 무역이 활발해지면 우리의 안정을 위협하기보다는 우호 관계를 구축하는 쪽에 더 집중할 겁니다.”

애초에 북반구의 동포들을 지원해서 독립까지 이루어낸다고 해봤자, 봉래가 취할 수 있는 이익은 거의 없다.

기껏해야 감정적 만족감 정도가 아닐까. 독립을 이룬 동포들이 다시 종주국 행세나 하지 않으면 다행이다.

게다가 차무룡의 말대로, 고려와의 무역으로 봉래가 이득을 보기 시작한다면, 봉래는 그나마 남아 있던 동포들에 대한 미련마저도 던져버릴 것이다.

고려가 제공해주는 경제적 윤택함 앞에, 머나먼 해외의 동포들은 안정적 무역을 해치는 골칫거리들일 뿐이다.

“봉래는 아즈텍의 영향권 밖에 있는 나라니, 봉래와의 경제적 제휴를 군사적 제휴로 발전시켜 나갈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습니다만.”

전쟁성 장관 강태훈은 깔끔하게 면도한 볼을 문지르며 그렇게 말했다. 흥미가 당긴다는 듯한 말투였다.

작년 극북 인근 해역에서 아즈텍 해군이 출몰한 이후, 우방이기는 해도 견제해야겠다는 생각이 강해진 듯했다. 아즈텍의 정국이 불안정해진 지금은 더더욱.

“말씀하신 대로 봉래와의 제휴가 이루어진다면, 아즈텍이 태평양에서 이 이상 영향력을 넓히는 걸 저지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안세규가 차무룡의 제안을 국제 외교적 관점에서 평가한다. 아즈텍은 태평양의 여러 섬을 점거하면서 서진해 오고 있다. 이는 아무리 우방이라 해도 고려나 일본에는 상당한 위협이다.

“그런데 지금 말씀하신 안, 거기서 끝나는 건 아닐 것 같습니다만……? 동쪽으로 아즈텍의 태평양 진출을 저지한다면, 서쪽으로는…….”

안세규는 차무룡이 꺼내고자 하는 말을 짐작했고, 차무룡은 안세규가 자기 생각을 꿰뚫어 봤음을 알아차렸다.

차무룡 역시 주견하와 함께 아즈텍에 가서 그 정세를 보고 들었기에, 무슨 판단을 내렸을지 짐작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바라트 사회주의 연방과도 제휴하자는 겁니까?”

차무룡은 침묵으로 긍정을 대신했다. 나머지 각료들은 침묵에 당혹감을 섞었다.

“바라트와의 무역은 우리 고려 혼자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고 말 문제가 아닙니다. 세계 시장에 인도 아대륙 전체가 복귀하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죠.

아즈텍이나 로마, 신성 제국 등 주요 강국들의 견해를 들어보지도 않고 우리끼리 독단적으로 결정할 일은 아닌 듯합니다.”

안세규가 이의를 제기하자 차무룡은 책상 위의 두 손을 깍지꼈다.

“먼저, 저는 경제 관료로서 항상 최선의 대안을 찾을 수밖에 없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작년 10월의 대공황 이후, 우리가 겪고 있는 위기엔 대책이 필요합니다. 제가 태사 각하 앞에서 ‘시간이 해결해 줄 겁니다’라며 손 놓고 있을 순 없는 노릇 아닙니까?”

그리고, 라며 차무룡은 목소리를 더욱 무겁게 낮췄다.

“바라트 문제는 저의 독단도, 우리 고려의 독단도 아닙니다. 이미 돌아가신…… 여준설 전 장관께서도 구상하셨던 일이고, 아즈텍에서 있었던 각국 경제 관료들의 회의에서도 나왔던 이야기입니다. 그저 이념적 위험성 때문에 무시하고 지나가기엔 바라트라는 경제적 활로를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리안이 왼손을 든다. 두 관료는 대화가 격론으로 치닫기 직전에 멈췄다. 리안은 오른손으로는 입술을 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아까 차무룡이 봉래와의 제휴에 대해 했던 말을 바라트에도 적용해볼 수 있다. 바라트가 세계 경제 무대로 복귀해 이익을 보면, 공산 혁명의 확산보다는 국제 무역망의 안전을 좀 더 우선할 수도 있다.

고려로서는 단순히 경제적 여유를 확보할 뿐만 아니라, 안보적으로도 변수를 줄이게 된다.

견하가 보고했던 아즈텍의 정세 변화.

만약 고려와 바라트가 최소 불가침조약, 혹은 더 나아가 군사적 협력 관계를 맺는다면, 아즈텍에 어떤 정권이 들어서더라도 어느 정도는 마음을 놓을 수 있다.

군사적 팽창주의를 지향하는 정권이 들어서든, 새로운 혁명을 꿈꾸는 정권이 들어서든.

“……긍정적인 방향으로 검토해봅시다. 공산주의자들의 사고방식은 연구해 볼 필요가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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