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정비(5)
“각하, 잠시 드릴 말씀이.”
공식적인 자리니만큼 견하는 격식을 갖춰 리안을 불렀다.
리안은 눈길만 내려 견하의 얼굴을 본다. 애정도 의문도 드러내지 않는다. 모두가 보고 있는 자리니까.
왼손을 펼쳐, 손가락 끝만 살짝 까딱인다.
-가까이.
견하는 종종걸음으로 다가가 리안의 귓가에 속삭였다.
“칸발리크에서 테러가.”
리안은 안 그래도 자그마한 입술의 움직임을 최소화하며 묻는다.
“얼마나 심각하지?”
“일전의 파멸인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리안은 표정의 변화를 최대한 억눌렀다. 그리고 계산한다.
지난번 동명시 지하철에서 목격했던 것과 같은 파멸인, 그리고 파멸인을 뱉어내는 구체. 그게 칸발리크에도 나타났다?
“정확한 피해 규모는? 몽골 정부의 대응은?”
“지금 들어온 정보는 이게 전부라고 합니다. 일단은 태사부로 돌아가서 자세한 상황 보고를 기다리심이.”
리안은 대회장에 가득 들어찬 당원들을 둘러본다. 그리고 고개를 저었다.
“지금 태사부로 돌아가봤자 몽골 측에서 뭔가 알려주기 전에는 쓸모있는 이야기를 듣긴 어렵겠지. 정보가 너무 부족해. 그 정보로는 제대로된 논의도 어려울 테고.”
리안의 시선이 견하를 떠나, 정면에 고정된다.
“그러니 전당대회를 우선한다.”
전당대회를 무사히 끝내는 일은 리안의 위신이 걸린 문제이기도 했다.
여기서 당황하며 서둘러 빠져나가 버리면, 남은 당원들은 당황하겠지. 당장 리안의 자질을 의심하진 않겠지만, 적절한 행동이라고 여겨지지도 않을 것이다.
그 외에도, 태사가 대회장을 급히 빠져나가야 할 정도의 사건이 터졌다는 사실을 여기 있는 당원들에게 알리고 싶지 않기도 했다.
칸발리크에서 일어난 테러 문제는, 일단은 리안과 각료들 선에서 조심스럽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
견하는 리안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묻는다.
“그렇다면 따로 필요한 조치는……?”
리안은 아주 잠깐 틈을 둔다. 그리 오래 생각에 잠겨있을 순 없었다.
“각료들을 모아줘. 전당대회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면 돌아갈테니, 그때 바로 논의에 들어갈 수 있도록.”
견하는 작게 끄덕이고 리안의 곁에서 물러났다.
리안은 다음 발언자에게 눈을 돌렸다. 아직 발표하고 의논할 일들이 많이 남아 있었다.
***
세규는 각료 소집에 응해 태사부로 향하면서, 역시 나름의 계산에 들어갔다.
-지난번 범 알타이 인민동맹은 몽골 내에서 혁명을 일으키겠다고 했었다. 이 테러는 그 혁명의 시작을 알리는 걸까?
물론 이번 테러가 범 알타이 인민동맹에서 주도하는 혁명과는 별 상관없는, 어떤 얼간이들의 난동일 가능성도 있다.
그렇게 판별된다면 외무성이 할 일은 별로 없다. 애도를 표하고, 구호물자 지원이나 테러 단체를 규탄하는 것 정도.
-하지만 범 알타이 인민동맹이 주도한 혁명의 시작이라면, 쉴 틈도 없이 생사의 갈림길에 계속 서게 된다.
앞서 이야기한 일들을 하면서, 동시에 범 알타이 인민동맹을 지원해야 한다.
겉으로는 고려의 외무장관으로서 우방국 몽골을 돕는 연기를 충실히 하면서, 한편으로는 몽골 혁명의 배후 지원 세력이 되는 것이다.
이미 전 극북방위군 사령관, 현 서부군 사령관인 조유관을 통해 은밀한 물자 지원은 이루어지고 있다.
-범 알타이 인민동맹의 혁명이 성공할 수 있을까?
어떤 혁명이든 그렇듯, 성공과 실패의 가능성을 안고 있다. 그러니 질문은 좀 더 구체적이어야 한다.
-몽골 혁명은 어떤 식으로 성공할 수 있을까? 혹은 어떤 식으로 실패하게 될까?
실패한다면 몽골의 군주정에 큰 타격을 주면서 함께 침몰하는 게 가장 이상적이다.
만약 허무할 정도로 단숨에 진압당한다면 안 하느니만 못한 혁명이 된다. 혁명 진압을 기회로 몽골 황실이 자신들의 입지를 더욱 튼튼하게 다질 테니까.
-그러니 실패한다 해도 최대한 몽골 황실의 역량을 무너뜨릴 수 있도록, 지원을 계속할 필요는 있다.
실패 후 범 알타이 인민동맹의 배후에 고려 제국 외무성이 있었습니다, 이런 사실이 밝혀지면 그건 그것대로 곤란하다.
그런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 조유관에게도 여러모로 주의를 주고는 있지만…… 더 조심해야겠지.
안세규가 펼친, 독단적인 몽골 내정 개입. 의혹으로만 끝난다고 해도 미리안은 이를 구실로 망설임 없이 그를 실각시킬 것이다.
-가능한 성공하는 편이 좋겠지.
혁명이 성공한다고 해서 그걸로 모든 게 잘 풀리는 건 아니다. 혁명 후 어떤 정부가 들어서는가, 그 정부가 어떤 대외정책을 펼치는가 하는 문제가 계속 남는다.
견하와 재연이 아즈텍의 향후 정세를 우려했던 것처럼.
-성공한다면 몽골의 제정은 철폐되고, 형식적이나마 공화정이 들어선다. 공화국을 빙자한 어떤 독재체제가 들어설 가능성이 높지만, 군주제가 소멸하는 것으로 목적은 달성된다.
세규가 범 알타이 인민동맹을 지원하는 가장 큰 이유는 루우의 몽골 황위 획득과, 그에 따르는 고려 제국의 전제화를 막기 위함이다.
일단 몽골에서 군주가 사라지면, 황위를 잇겠다는 구실로 루우가 몽골에 영향력을 확대할 방법 역시 사라진다.
물론 범 알타이 인민동맹이 혁명에 성공해, 몽골 정국을 안정시킬 때까지 지원을 계속하면서, 고려 안에서 일어날 몽골 개입 의견도 억눌러야 한다.
몽골 황실이 철폐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혁명 정부가 불안정할 때를 노려서, 루우가 억지로라도 황위 계승을 주장할 수도 있으니까.
-문제는 오히려 저쪽에서 치고 나올 가능성인데…….
범 알타이 인민동맹이 허동주의 천손민족협회와 비슷한 집단이라면, 국내 정세가 안정된 후 고려를 병합하겠다고 날뛸 가능성이 있다.
-아니, 상당히 높다고 봐야겠지. 그들이 만들어낸 ‘알타이 민족’ 개념을 생각해보면.
몽골 혁명은 거의 내전에 가까운 혼란을 거칠 테고, 물질적인 피해가 적다고 해도 정치적인 혼란은 쉽게 가라앉지 않을 것이다.
그런 만큼 몽골이 고려의 무력 합병을 실행하거나, 실행하더라도 성공할 가능성은 높진 않지만…….
-루우가 그걸 역이용해서 안보 위협을 없애겠다며 몽골 공격을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러니 몽골 혁명이 무사히 마무리되면, 몽골의 신정부가 고려와 우호적인 관계를 수립할 수 있도록 상황을 조정하는 노력 역시 필요하다.
다만 루우의 출병 의지나 여론 선동을 안세규 혼자만의 힘으로는 막을 수 없다. 군 통수권을 쥐고 있는…… 태사 미리안의 의지가 어떻게 작용하는지가 문제다.
“다시 한번 대면해 볼 수밖에 없나.”
지난번에 황제의 거부권 문제로 미리안과 독대한 이후, 오랜만의 독대가 될 것이다.
그 문제를 떠올리니 다시금 고민이 깊어진다.
황제의 거부권을 제한하는 데에는 태사와 세규 모두 동의했지만, 태사 역시 그 대가로 자신의 자리에 대한 황제의 보장을 얻어낸 것 같다.
전에 숙군 문제도 그렇고…… 미리안을 만만히 보면 안 된다는 건 알고 있지만, 경계 수위를 더 높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당한다.
미리안이 아니라 주견하와 다시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생각해봤지만, 여기선 미리안에게 가보는 게 옳다. 주견하가 사적으로 황제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을진 모르지만, 아직은 군사문제까지 개입하긴 어려울 테니까.
-‘아직은’?
세규는 자신의 생각을 곱씹어본다. 왜 나는 ‘언젠가는 주견하가 군사 문제에도 개입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 무심코 주견하의 성장 가능성을 크게 평가한 건가?
-마음속에 담아두긴 해야겠어.
지금 당장은 태사와의 독대에 집중해야겠지만, 차차 주견하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세규는 머릿속 한구석에 주견하의 이름을 크게 휘갈겨 적어둔 다음, 태사부를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
세규의 태사 독대는, 태사가 전당대회를 마치고 태사부로 복귀하는 그 잠깐의 틈을 타서 이뤄졌다.
거절할 명분이 마땅치 않았기에, 리안은 일단 그와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다.
“오늘은 무슨 이야기를 하시려는 건지 잘 짐작이 안 되는데요, 선배님.”
리안은 집무실에 들어서는 세규의 모습을 보며 그렇게 말을 꺼냈다. 그 말마따나 오늘 독대를 신청한 이유는 잘 짐작되지 않는다.
칸발리크에서 일어난 테러에 안세규나 고려국민당이 노려볼만한 이익이 있진 않을 것 같은데.
“이번 테러의 배후세력이 어디인지는 저희 외무성도 아직 파악하지 못했습니다만……”
배후세력? 리안의 눈썹이 꿈틀거린다. 그런 이야기는 각료들이 모인 자리에서 해도 충분할 텐데 왜 여기서 그 이야기를 시작하는 걸까.
“혁명 시도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됩니다.”
“혁명이요?”
“예. 단순히 칸발리크를 중심으로 정권 교체를 시도하는 쿠데타라기보다는, 몽골 전역을 뒤덮는 혁명의 시작일 가능성이 있다는 첩보가 들어왔습니다.”
“……흥미롭군요. 군의 첩보보다 외무성의 첩보가 한발 빠를 줄이야.”
리안의 말대로 군은 아직 칸발리크 테러에 대한 첩보를 보고하지 않았다.
“아시다시피 제가 몽골 쪽에 대고 있는 선이 좀 많으니까요.”
“혁명 시도라고 보는 근거는?”
“칸발리크 및 카라코룸에서 일어나는 시위가 최근 빈도, 규모, 격렬함 모두 크게 늘었다고 합니다. 이 시위엔 우리 고려의 서북부에 살다가 강제 이주 된 몽골계 주민들부터, 기존 도시 빈민들까지 다양하게 참여하고 있습니다.”
“참가자들의 구성이 그렇다면 구호도 대충 짐작이 되는군요.”
“예. 단순히 정부 정책을 규탄하는 것부터…… 4개국 관세동맹 철회를 요구하는 것까지.”
“시위의 성격이 경제 문제와 관련이 있다면 역시,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계열이 선동한 시위일 공산이 크군요. 그리고 그들이 배후에 있다면……”
“그렇습니다. 몽골 내에선 이들 시위를 혁명을 위한 기초 작업이라고 보는 거죠.”
고개를 끄덕이는 리안을 보며 세규는 그녀와 똑같이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군사 개입 문제를 논의하러 온 이상, 몽골 혁명의 가능성을 아예 감출 수는 없다.
대신 배후세력이 ‘범 알타이 인민동맹’일지도 모른다는 추측은 숨기고, 다른 세력들을 내세운다.
“만약 정말로 이번 테러가 혁명으로 이어진다면, 부르주아 시민 정부가 들어서거나 일반적인 민주공화국이 될 가능성은 없는 걸까요?”
리안의 생각은 어느새 혁명 이후까지 닿은 듯하다. 그녀의 머리 회전에 감탄하며, 세규는 다음으로 준비해 둔 말을 입에 담았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독대를 신청한 겁니다. 만약 몽골 내에서 혁명이 대세가 된다면, 우리는 최대한 몽골이 보통의 민주국가가 되는 수준으로 혁명 방향을 유도해야 합니다.”
지금은 공산당이나 사회민주당의 활동을 합법으로 인정해주고 있고, 그들 정당도 무력혁명보다는 제국최고회의에서의 활동을 우선시한다.
그러나 당장 이웃에 공산국가가 들어선다면 태도를 바꿀 것은 자명한 일이다.
“그렇다면 군사 개입을 해서, 고려에 우호적인 세력을 지원하자는 건가요, 안 장관님 말씀은?”
“반대입니다. 군사 개입은 신중하게, 최종적인 안으로만 놓고 일단은 몽골 내 정세 변화를 관망하자는 겁니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여기서 세규는 숨을 한 번 삼킨다. 태사가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는 성격은 아니지만, 긴장하지 않을 수 없다.
“불경하다고 나무라지 않으신다면, 감히 제 생각을 말씀드려볼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