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정비(4)
제국입헌당 전당대회가 열렸다.
당원이기만 하면, 적절한 심사 과정을 거쳐 누구나 참석할 수 있다. 보통은 각종 위원이나 당수 등을 선출할 때 열게 되겠지만, 아직 창당 1년 정도밖에 되지 않은 제국입헌당은 그럴 일이 없다.
4월도 저물어가고, 곧 찾아올 5월은 슬슬 뜨끈한 공기를 남쪽에서부터 밀고 올라온다.
그런 시기에, 제국입헌당은 ‘친위혁명’의 시작을 기념하기 위해 전당대회를 열었다.
따라서 오늘의 전당대회는 지난 1년간의 성과를 돌아보고, 제국입헌당의 성격과 방향성을 다시 확인하는 자리가 될 것이다.
“태사 각하께서 입장하십니다.”
누군가의 낭랑한 목소리가 태사의 입장을 알렸다. 사람들은 벌컥 열린 정문의 좌우로 급히 물러섰다.
깔끔하면서도 무게감 있는 제복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중학생 같은 몸집의 태사 미리안과는 어울리지 않을 듯하면서도 어울린다.
그런 체구인데도 당당한 걸음걸이로 실제보다 더 큰 사람처럼 보인다. 확실히 ‘이 시대의 거인’이라는 강렬한 인상을, 주변 사람들에게 남기고 있다.
태사 주변에는 그녀의 경호원들이 있다. 이들은 태사부 소속이지만, 정치적으로는 특별할 것 없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경호원들보다 더 가까이, 태사의 옆에 붙은 사람들은 제국입헌당에서 뭔가 해보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주목해야 할 인물들이다.
첫째는 최효윤.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미리안의 최측근으로써 그녀를 경호했다. 강력한 이단이기까지 한 그녀는 태사를 암살 시도에서 구출해냈으며, 지난 내전에서도 큰 활약을 했다.
최근에는 황제를 수행하며 몽골에 다녀왔다. 소문으로는 최효윤이 황제와 태사의 내밀한 일에 대한 자문도 맡고 있다 한다. 태사나 황제에게 접근하려면 그녀를 거쳐야 한다는 말도 있다.
어디까지가 사실인진 알 수 없지만.
둘째는…… 그 곁에 나란히 선 소년이다. 주견하.
차가운 인상의 미소년. 어렸을 때부터 미리안의 최측근이었던 최효윤과 달리, 내전이 벌어질 무렵에 태사에게 발탁된 인재다. 소문에는 위기에 처한 태사를 우연히 구했고, 그 인연으로 여기까지 왔다고 들었다.
태사의 연인이라는 말도 있다.
“정말 지금까지 평범한 중산층 가정의 아이로 자란 걸까?”
어떤 남자가 중얼거리듯 옆 사람에게 묻는다. 옆 사람은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가 답한다.
“모르지. 그런데 등장하고 일 년 만에 감찰국 국장이 되어서, 아즈텍이며 몽골이며, 산동 전선이며, 중요한 일에는 끼지 않은 데가 없어. 특히 지난번 쿠데타 미수 사건에서 활약한 거, 들었어?”
“저 애도 강력한 이단이라더군. 그래서인지 반란군을 아주 잔인하게 진압했다던데. 일반 국민들은 모르게 깨끗이 치웠다고는 하는데, 처음 그 현장 본 사람들 말로는 지옥이 따로 없었다더라고.”
“저 주견하라는 애가 처음 활약한 게 구 야별초 본부 제압작전이야. 거기서도 마찬가지였다는 이야기가 있더군.”
“허동주도 저 애가 죽였다면서?”
“그랬다지. 황제 폐하하고도 같이 움직이는 일도 많고…… 정말 여기저기 다 이름을 올리고 있어.”
“다른 데는 몰라도 동명시 내 중학교나 고등학교에서 주 국장 감시망이 없는 데가 없다던데.”
“실상은 어떨지 모르지만, 소문이 그렇게 났다면 영향력이 작진 않다는 거지. 최근엔 대학교 쪽으로도 손을 뻗는다는 이야기를 들었어.”
“그 이야기가 사실이면, 10대부터 20대까지, 젊은 세대는 다 장악하겠다는 의도구만.”
“그 뒤에는 태사가 있을 거고. 저기 봐.”
남자가 턱짓했다. 태사의 뒤로, 제복을 걸친 수행원들이 따라 들어온다. 그 제복은 ‘감찰국’의 제복이다.
제복을 걸친 자들은 10대, 혹은 20대. 거기에는 유지나, 한재연, 양수영에, 이익서도 있었다.
태사를 따르는 그 젊은이들의 무리는 딱 보기에도 어떤 메시지를 드러내려는 의도가 느껴졌다.
“마치 친위대 같구만.”
“확실히 앞으로는 저 ‘감찰국’을 키우겠다는 의사 표현이야. 주견하 국장, 앞으로 정치경찰실 실장까지는 확실히 올라가겠어. 그렇게 되면 국내 모든 감찰 및 검열 따위가 다 저 애 손으로 들어가는 거지.”
“저 구성 세대도 한 번 봐봐. 태사보다 약간 어리거나, 동년배거나 그렇지. 저거, 젊은 층은 태사가 장악하겠다는 거 아니야.”
“당도 젊은 층이 장악한다, 그런 젊은 당원들의 지지를 받는 태사도 확실히 당권을 장악하겠다, 그런 메시지가 있다고 봐야지.”
“거스르는 흐름은 용납하지 않겠지.”
“그렇겠지.”
사람들은 이 광경을 보며 태사의 메시지를 열심히 해석하고, 자신들이 다음에 취해야 할 행동에 대해 머리를 굴린다.
대부분은 일단 지켜보기로 한다. 몇몇 이들이 최효윤이나, 감찰국 국장인 주견하에게 접근해 ‘선’을 대고 싶다, 그런 마음을 품는다.
미리안 정권의 차세대 젊은 실권자. 주견하.
그런 이미지가 사람들의 머릿속에 그려진다.
태사는 연단에 올라서고, 태사의 경호원과 측근들, 감찰국 직원들이 연단을 둘러싼다. 어찌 보면 웅장하면서도, 또 어찌 보면 강압적인 분위기가 느껴지는 광경이다.
확실한 점은 태사의 권위와 권력이 여전히 강대하다는 것. 그리고 앞으로도 더욱 강대해지리라는 예감을 모두가 느낀다.
태사를 맞이하는 박수가 점차 잦아든다. 리안은 그 박수에 적절히 응해주면서, 완전히 잦아들길 기다린다.
이윽고, 태사의 연설이 시작된다.
“우리는 작년 이 계절에, 국민을 기만하고 억압하며, 황제께 반역한 무리와의 싸움을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내세우는 거짓된 이상에 맞서야 했기에, 그들보다 더 나아져야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생소한 체제를 받아들이고, 생소한 법을 세우고, 어제와는 다른 내일을 만들어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잠시 말을 멈춘다. 추상적인 비유에 대해 사람들이 충분히 생각할 시간을 준다.
“우리는 다당제 민주주의를 도입했습니다. 잃어버렸던 황통을 찾아 다시 세우고, 입헌군주제를 도입했습니다. 다당제 민주주의는 우리 고려의 역사에서 단 한 번도 선택하지 않았던 체제입니다. 그만큼 낯선 체제이지요.
저를 포함한 많은 이들이 겁을 먹었습니다. 과연 다른 다당제 민주주의 국가들처럼 성공적으로 나라를 이끌 수 있을까? 이 체제의 결함으로 인해 역적들과의 싸움에서 패배하는 것은 아닐까? 그로 인해 국민들께 씻을 수 없는 죄를 짓고, 황제께 더할 나위 없는 불충을 저지르는 것은 아닐까.”
사람들의 침묵이 무겁게 가라앉는다. 불과 몇 개월이긴 했지만 그때 느꼈던 암울한 전망, 절망과 공포가 다시 선명하게 떠올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의 새로운 정치체제는 성공적으로 작동했습니다. 그동안 배척해왔던 사회주의자나 민주주의자, 공산주의자들을 황제 폐하의 크신 이름 아래 끌어안고, 국민의 권리와 노동조건을 개선했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강력해진 국민의 힘으로, 반역자들을 꺾고 내전에서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다당제 민주주의는 더디지만 확실히 앞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제국입헌당은 여당으로써 확실히 중심을 잡고, 정치의 균형을 잡으며, 다른 여당들과의 평화적 공존, 견제, 협력을 통해 국가를 이끌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아래로는 국민의 생활을 윤택하게 하고, 내전의 상처를 치유하며, 위로는 황제 폐하께 충성된 신하로서 모범을 보였습니다.”
그 말에 얼마만큼은 사실인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런 말 자체로 당원들에겐 약간의 자부심이 깃든다. 그런 자부심이 태사에 대한 존경과 당에 대한 충성 및 소속감으로 이어지는 것으로 충분하다.
“입헌군주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군주제가 가진 장점을 취하는 동시에, 역사적으로 증명된 단점들은 배제하는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존경받는 황제, 오래되고 고귀한 혈통, 그분을 통한 국민의 단결과 고려 제국의 정통성 확보, 이런 것이 군주제의 장점입니다.
반대로 군주제의 단점이라면 군주가 저지르는 시행착오나 부패의 문제를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입헌군주제를 택함으로써 우리의 군주가 늘 지혜로운 분이실 수 있도록 하였고, 시행착오를 바로잡거나 최소화할 검증된 내각을 세울 수 있도록 했습니다.
다당제 민주주의와 입헌군주제 모두, 1년이 된 지금, 우리는 이렇게 자신할 수 있습니다. 성공적이었노라고.”
리안은 여기서 다시 한번 말을 멈췄다. 목소리를 낮추고, 조금 어두운 이야기를 하기 위함이다.
“작년 말 시작된 세계적 규모의 경제 대공황은, 내전의 상처가 채 극복되지 않은 우리 고려 제국에 그 어느 때보다도 가혹한 겨울을 안겨줬습니다.
세계 각국은 협력해 이 문제를 해결하려 했으나 아즈텍에서 일어난 불행한 테러는 우리 모두를 다시 한번 좌절케 했습니다. 혼란이 불어닥쳤고, 경제는 바닥으로 추락하기만 하는 것 같았습니다.”
다시 말을 멈춘다. 이번에는 어조에 힘을 불어넣기 위함이다.
“그러나 우리는 다시 한번 국민의 단결과, 제국입헌당의 지도력으로 이를 극복해 나가고 있습니다.
아즈텍 연방을 비롯한 세계열강과의 경제 교류, 차관 문제 등이 원활하게 해결되었으며, 특히 우리 고려 제국은 몽골, 키타이, 낭키아스 등 전통적인 우방들과의 교류 협력을 확대하여 이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처해 나갔습니다. 그 결실이 바로 4개국 간 관세 동맹입니다.”
관세동맹은 내전의 수습과 더불어 미리안 정권과 제국입헌당에서 강하게 밀고 있는 정책적 성과다.
리안은 오늘 이 전당대회에서 다시 한번 이를 강조하고, 언론에서 이를 보도함으로써 국민의 지지를 확보할 생각이다.
“비 온 뒤에 땅이 굳는다는, 참으로 오래도록 쓰여 온 속담이 있습니다. 우리는 위기를 극복해 나가면서 그 속담이 진리임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있습니다.
관세동맹은 고려, 몽골, 키타이, 낭키아스 4국의 경제를 성공적으로 되살려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 네 나라 간 우호와 협력을 그 어느 때보다도 증진했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앞으로 이 관세동맹의 성과를 반성적으로 받아들이는 한편, 더욱 경제 교류를 확대하며 대공황의 상처를 극복하는 데서 더 나아가 우리 고려의 경제적 위상을 드높이도록 하겠습니다.”
힘찬 어조로 끝을 맺는다. 박수가 터져나온다.
박수 사이로, 누군가가 들어온다. 그 누군가가 견하의 눈길을 잡아끈다.
배영훈 소령이다.
뭔가 긴밀하게 보고할 게 있는 건지, 군중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연단으로 다가선다. 견하는 경호원들과 감찰국 직원들에게 배영훈 소령을 일단 자기 앞으로 안내하도록 지시했다.
“……긴급히, 태사께, 보고를.”
숨을 헐떡이며 배영훈이 말한다.
“어떤 긴급사태지?”
배영훈이 이렇게 흐트러질 정도로 긴급한 사태라면 견하도 알아야 한다.
“칸발리크에서, 테러가……”
“테러?”
배영훈은 헐떡임을 멈추고 대답한다.
“지난번 우리 동명시 지하에서 일어난 것과 같습니다. 파멸인입니다.”
견하는 즉시 배영훈과 함께 태사 곁으로 다가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