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리고 소녀는 대원수가 되었다-144화 (144/541)

재정비(3)

재연은 미소를 유지한 채, 설명을 시작했다.

“범 알타이 인민동맹에서 내세운 ‘알타이 민족’이라는 개념은, 일반인들에게는 생소하지만 천손민족협회에서는 꽤 알려진 개념이었어.

허동주는 세계대전 때부터, 명확하지는 않지만 그런 개념을 구상하고 있었던 것 같아. 공동의 적인 태평천국에 맞서 몽골과 고려가 함께 항쟁한 이야기를 자서전에 상세히 적어 뒀으니까.”

자서전에 적힌 상세한 내용이란, 고려와 몽골 사이에 맺어진 동맹, 한족에 대한 원한을 함께 공유했던 것, 서로가 부족한 물자를 지원해주거나, 위기에서 도움을 주던 것 등이라 한다.

“두 조직 사이에 그런 공통점이 있어서, 허동주는 범 알타이 인민동맹과 긴밀한 협력 관계 구축을 추진했던 것 같아. 허동주 본인도 범 알타이 인민동맹의 사상을 흡수해서 자기 사상을 체계화시켰고.”

“그랬던 건가. 그래서 내전 중에 몽골이 그렇게 이해하기 힘든 행보를 보였군.”

한편으로는 허동주를 견제하고 미리안 정부를 지원하는 듯 보이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서부군의 탈출을 묵인하거나, 허동주 측에 은근히 물자를 전달했다. 혹은 물자를 전달하려는 다른 세력들을 보고도 못 본 척했다.

고려의 서북부 일대를 점령한 일은 특히 그랬다. 시레문 카간이 그곳 몽골계 주민들을 카라코룸으로 집단 이주시키면서 무사히 마무리되긴 했지만, 몽골이 영토를 요구했다면 분명 전쟁이 일어났을 것이다.

몽골이 보인 상반된 행동은, 범 알타이 인민동맹이 몽골 정치권 내에 영향력을 끼치면서 일어났던 일 같다. 예전에 루우는 견하에게 그렇게 설명했었다.

몽골 내에서도 당연히 고려 같은 정파 간의 복잡한 대립이 있고, 이 대립의 양상에 따라 고려에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는 말이다.

단순히 누구 편을 들고 안 들고의 문제가 아니다. 고려의 권력 구도가 몽골의 외교 정책에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인지에 대한 문제였기에 실상은 더욱 복잡할 것이다.

“범 알타이 인민동맹이 만든 ‘알타이 민족’ 개념은, 언젠가 몽골의 주도로 고려를 통합할 때, 더 나아가 동아시아 전체나 중앙아시아로 세력을 뻗을 때 일종의 명분, 혹은 정복지 통치의 기반을 삼기 위한 거였어.

정복지의 지식인들에게 이걸 주입하고 선전하면, 자발적이든 비자발적이든, 진심으로 그 개념에 동의하든 이익을 바라는 것이든, 분명히 도움이 된다는 거야.”

알타이 민족 개념은 따지고 들면 과학적 허점이 한둘이 아니다. 정치적 목적으로 창작된 개념이니까. 하지만 그런 허점에 적절한 사실을 섞어, ‘효과적인 거짓말’을 만든다.

예를 들어 투르크인이나 몽골인, 고려인 등 동아시아 다양한 민족들이 바이칼 호수에 그 기원을 두고 각자 사방으로 갈라져 나간 ‘형제 민족’이라는 식의 신화가 그러하다. 이 신화에 고고학적 증거라든가, 언어학적 증거들을 끼워 맞춘다.

“허동주는 이 개념에서 몽골인과 고려인의 관계에 주목하고, 역사적 사실들로 이론을 보강했어. 고려와 몽골이 태평천국과 대결한 건, 오래도록 이어져 온 북방 알타이 민족 대 남방 한족의 경쟁을 반복한 거라는 식으로.”

명나라가 건국 직후 몽골의 칸발리크를 위협했을 때 고려가 도와준 일, 이후 정묘한란에서 고려를 공격했을 때 몽골이 명나라 군대의 육로 진격을 막은 일 등의 역사.

태평천국에 대항해 고려와 몽골이 동맹을 맺은 세계대전은 그런 역사의 연장선에 있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허동주는 알타이 민족 개념을 고려식으로 재해석하고, 범 알타이 인민동맹이 주장한 것과는 반대로 고려인의 주도로 몽골을 통합하자는 주장을 내놓았어.

나는 범 알타이 인민동맹의 주장, 허동주의 주장, 이 두 가지를 참고하면서, 여기에 우리가 어떤 색깔을 입힐 수 있을지를 생각해봤지.”

그 결과 재연은 두 가지 방법을 찾아냈다고 한다.

하나는 ‘법적 근거’를 마련하는 것이다.

“그 법적 근거는 황제 폐하가 생각하는 동군연합. 황제 폐하는 몽골 황위의 적법한 계승자고, 따라서 두 나라가 같은 황제 폐하를 모시게 되면 하나가 될 법적인 근거가 충분하다, 는 논리야.”

“좋아. 그렇다면 두 번째 방법은?”

“그런 식으로 동군연합을 만들어도 ‘그냥 두 나라는 따로 존속하고, 황제 폐하만 같은 분으로 모시면 되지 않느냐’는 의견은 분명히 나오겠지.”

“그렇지.”

그러므로 실제로 동군연합이 이루어지더라도, 두 나라가 통합되는 데에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다.

“따라서 빠르게, 완전히 통합해야 할 당위성을 만들어주는 거야. 이른바…… ‘외부의 적’을.”

“외부로부터 위협이 다가오고 있으니, 우리 동아시아의 알타이 여러 민족은 하루빨리 하나의 국가를 이뤄야 한다, 그런 건가?”

“맞아. 그리고 나는 그 외부의 위협도 두 가지를 생각해봤는데, 하나는 바라트 사회주의 연방이고, 다른 하나는 아즈텍 연방이야.”

“바라트에서 퍼져나가는 공산주의의 물결이 동아시아를 위협한다, 뭐 그런 각본은 쉽게 써 볼 수 있겠군. 아즈텍은…… 이런 식이면 아즈텍 현 정권이 붕괴하길 바라는 꼴인데.”

“붕괴하지 않는게 제일 좋겠지만, 붕괴한다면 그 상황을 실컷 써먹어야지.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서면 바라트와 아즈텍 사이에서 협공을 당할 거라고 위기감을 조성하는 거야. 철혈의 꽃 같은 파시즘 정권이 들어서면 태평양 일대로 확장 정책을 펼 거라고 위기감을 조성하고.”

“후자의 경우엔 일본공화국에도 위기감을 퍼트려서 협력을 구해 볼 수도 있겠어.”

일본공화국이 자신들을 아즈텍의 마수에서 지켜 줄 강력한 우방을 지지하도록 말이다.

“그런데…….”

견하의 얼굴이 굳는다.

“이건 좀 다른 이야기인데, 범 알타이 인민동맹이라는 놈들, 그 성격이 아즈텍의 ‘철혈의 꽃’과 닮지 않았어? 허동주와 협력했던 것도 ‘천손민족협회’와 닮은 부분이 많아서일 텐데.”

닮았다는 건, 같은 일을 벌일지도 모른다는 의미다.

천손민족협회는 결국 고려에서 짧은 내전과 쿠데타를 일으켰다.

철혈의 꽃도 테러를 일으키고, 대규모 시위를 조직하며, 내전의 기회를 엿보고 있다.

그렇다면, 범 알타이 인민동맹 역시 그러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견하와 재연이 꾸미는 계획의 기반으로는 훌륭하지만, 아무래도 그 조직 자체가 위험성이 크다.

“여기에 대한 대비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음…….”

잠깐 고민에 잠긴 재연은, 잠시 뒤, 솔직하게 인정하기로 했다.

“거기까지는 생각을 못했는데. 내전을 일으킨다면 카간을 보호한다 구실로 군사 개입을 하고, 이후 황제 폐하가 시레문 카간에게서 양위를 받는다든가……

하지만 그런 식으로 개입하면 찬탈로 비치지 않을까? 반발을 최소화한 무난한 몽골 합병은 힘들어지겠지.”

“내 생각도 그래. 그러니까 이번 안은 몽골이 어느 정도 안정적인 상태에서, ‘부드럽게’ 고려에 통합되는 상황을 가정한 거야.

일단은 내가 수정하라고 한 거 수정해서, 폐하께 보고하자. 몽골의 급변 사태에 대한 대책은 따로 생각해 보자고.”

“알았어.”

“아, 그러고 보니 이거, 첫 번째 안하고는 다르지? 그때 거는 이 정도로 구체적인 합병 논의는 없었던 것 같은데.”

“맞아. 그러니까 안세규 장관에겐 절대 알려지면 안 되지.”

안세규는 오늘 나온 두 번째 안을 본다면 분명 격하게 반대할 것이다. 루우의 권력 확대를 경계하는 사람이니까.

견하의 입장에서도, 한동안은 안세규를 더 속일 필요가 있다. 가급적이면 안세규가 모르게 일을 진행하다가, 그가 대처할 틈도 주지 않고 어느날 갑자기 드러내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견하도 안세규와 대등한 위치에 설 것이다.

***

재연이 자기 일을 마무리하는 동안, 견하는 또 다른 사람과 접견했다.

감찰국 산하의 대학생 조직을 확대하는 중이던 이익서였다. 그도 중간보고를 위해 견하의 집무실에 들렀다.

“복학 후 생활은 잘 되고 있나?”

“예. 배려해주신 덕분에.”

그냥 예의상 하는 말이 아니다. 견하는 정말로 이익서의 학비와 생활비를 지원해줬다. 그가 학교 공부와 조직확장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학기가 시작된 지 얼마 안 됐으니까 규모 자체를 크게 키우진 못했을 거고, 어떤 방식으로 조직을 만들었는지 들어볼까.”

견하는 펜을 놓고 익서를 바라본다. 고등학교 3학년…… 이라곤 하지만 역시 이상할 정도로 어른스럽다.

얼굴을 보면 정말로 그 나이가 맞는 것 같은데, 풍기는 분위기나 압박감은…… 나이를 속이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그래도 간신히, 준비해 둔 보고를 머릿속으로 정리해가며 말한다.

“직접적으로 감찰국이나 태사부, 현 정부나 제국입헌당을 지지하는 조직이라는 인상을 풍기면 거부감부터 살 우려가 있었습니다. 정치적인 냄새를 풍기는 건 부담스러우니까요.

그래서 일단은 ‘봉사단체’를 만들고 좋은 이미지를 홍보하는 데 주력하기로 했습니다.”

“‘봉사단체’? 어떤 봉사지?”

“복학생 중에서 내전에 참전했던 예비역들, 그중에서도 상이군인이나 복학 이후 생활을 힘들어하는 학생들을 도와주는 봉사활동을 주로 하는 단체입니다.”

“나쁘진 않아. 굉장히 선량한 이미지를 줄 수 있는 활동이군. 그런데 그런 활동을 한다면 차라리 그냥 참전군인회를 만드는 편이 낫지 않나? 서로 돕는 활동은 그런 조직으로도 할 수 있을 텐데.”

“그 경우엔 가입 자격에 제한이 있습니다. 말 그대로 참전군인들만, 그중에서도 대학생으로 복학한 사람들만 가입하게 되는데, 그러면 조직의 확장성이 떨어집니다.

제가 고려국민당 산하 대학생 조직이나 기타 대학생 정치조직들을 살펴본 바로는, 학번 혹은 학년, 남녀를 가리지 않고 폭넓게 조직원들을 모집하더군요. 우리도 그 정도로 다양한 학생들을 포섭하려면 ‘봉사단체’ 형식이 적합할 거라고 봤습니다.

그러면 학교 내에선 참전군인 외에도 여학생층까지 조직을 확대할 수 있고, 학교 외부, 즉 대학에 진학하지 못한 참전군인들도 끌어들일 수 있고요.”

익서의 설명에 견하가 고개를 끄덕인다. 익서는 시험 하나를 통과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섣불리 이마에 맺힌 땀을 닦지는 않는다. 여전히 바른 자세로, 견하의 입에서 나올 말을 들을 준비를 한다.

“좋아. 그렇게 계속해줘. 별다른 방침상의 변경은 없지만…… 혹시라도 다른 당의 대학생 조직과 충돌이 벌어지지 않도록 조심하고.”

“알겠습니다.”

그건 익서도 충분히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 부분이다. 아직 조직의 힘이 미약한 마당에 섣불리 다른 조직들과 충돌하면, 이 신생 조직은 순식간에 와해될 것이다.

“아, 그리고 말인데.”

“예?”

“곧 제국입헌당 전당대회가 있을 거야. 참석해줬으면 하는데.”

익서는 원하지는 않았지만 거부할 수도 없는 일에 자꾸 깊이 끌려들어 가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