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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소녀는 대원수가 되었다-143화 (143/541)

재정비(2)

허동주의 이름이 직접 언급된 건 아니지만, 몽골인을 고려인과 ‘동류’로 보고 접근하는 발상은 확실히 그에게서 온 것이다.

물론 유사한 사상을 지닌 이들은 몽골에도 얼마든지 있기에 이 부분만 콕 집어서 시시비비를 따지긴 어렵겠지만, 그래도…….

“허동주의 사상을 간접적으로나마 들먹인다는 게 어떤 건지 알고는 있어?”

“애초에 몽골 합병은 그 사람의 계획에도 들어 있던 거지. 황제 폐하의 발상이라고 해도 동군연합이라는 보다 부드러운 방식이 추가됐을 뿐, 흐름은 그 사람의 전쟁 계획과 별반 다르지 않아.”

재연은 허동주를 ‘그 사람’이라고 불렀다. 절묘한 표현이다. 존경도 멸시도 하지 않는 모호한 지점에 있는 표현.

그나저나 태사가 견하에게 알려주고, 견하가 다시 재연에게 설명했던, 허동주의 전쟁 계획을 이렇게 써먹을 줄이야.

견하는 간신히, 이렇게 경고할 수 있었을 뿐이다.

“그래도 달라지려고 노력은 해야 해.”

견하는 그런 말을 입에 담으면서도, 스스로 질문을 던진다.

내가 말하는 노력은, 위선적 노력인가?

위선일 지도 모른다. 하지만 위선을 행하는 것이, 선을 행할 수 없어 그냥 악으로 직행하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

허동주가 짰던 고려의 확장과 그에 따른 전쟁 계획은, 몽골의 병탄을 그 첫 단계로 상정했다.

루우가 한재연을 통해 짜는 「다이온 연방 창설 계획」 역시, 몽골의 병탄을 첫 단계로 상정한다.

다른 계획들, 즉 키타이나 낭키아스의 처리는 아직 몽골 병탄에 비해 비중이 높지 않을 뿐, 역시 상정되어 있다.

허동주와 루우의 차이라고 한다면, 허동주는 강압적인 수단을 통해 일방적으로 병합하려 들 생각이었지만, 루우는 ‘동군연합’이라는 중세의 유산을 활용하려 한다는 것 정도일까.

물론 수단 상의 차이는, 결과가 같다 해도 작은 차이는 아니다.

그러나 결과가 같다는 점은 역시, 마음에 걸린다.

일단은 루우와의 의견 충돌은 피하고 싶었기에, 견하도 「다이온 연방 창설 계획」에는 찬성하고 있다.

하지만 어디까지 찬성해줘야 할까. 이대로 계속 사면 허동주의 구상안처럼 고려가 전세계와 전쟁을 벌이는 미친 흐름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보장은 있는가?

루우의 야심이 허동주와 어떤 차이가 있는지 생각해 봤는가? 혹시 차이가 없는 건 아닐까?

그렇다면 지난해의 내전은 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견하는 읽기를 완전히 멈추고 눈앞의 재연을 계속 바라봤다. 재연도 말없이 견하를 바라본다.

불편한 침묵이 두 사람 사이를 한참이나 가로질렀지만, 누구도 물러나지 않았다.

재연의 의도는 대체 무엇인가.

이런 걸 써놓고서, 허동주에게서 완전히 벗어났다고 할 수 있을까? 허동주의 영향력을 이렇게나마 되살려보려는 시도가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재연과 수영을 비롯해, 옛 천손민족협회의 구성원들을 끌어들인 건 잘한 일이었을까. 견하는 처음으로 의문을 던졌다.

그들을 끌어들여 조직 규모를 단기간에 확대해보겠다고 생각한 건 오산이었던 것은 아닐까. 결국 그들의 사상, 그들의 색채가 감찰국이라는 이름 아래 살아남도록 허용한 것은 아니었을까.

재연은 루우라는 그늘에 숨어서 뭘 하려는 걸까.

아니, 다시 루우에 대한 생각으로 돌아가 보자.

천손민족협회 사람들을 살려서 밑에 둔 건 견하의 결정이라고 해도, 사상을 드러낼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준 건 황제 루우다.

루우는 어디까지 생각하고 있을까?

루우의 야심이 허동주의 생각과 많이 닮은 건 우연일까? 그녀는 적절한 곳에서 멈출 준비를 하고 있을까?

허동주를 처단했는데도 또다시 이렇게 닮은 사상이 고개를 든다면, 이것을 단순히 허동주와 루우라는 개인들의 문제로만 치부할 수는 없다.

애초에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열망이, 민족과 국가의 통합 및 팽창을 바라는 것은 아닐까.

허동주의 전쟁 계획이 저지되어도 그와 닮은 「다이온 연방 창설 계획」이 나오듯, 「다이온 연방 창설 계획」이 폐기되어도 다른 당, 다른 국가에서 이와 비슷한 뭔가가 고개를 들 수 있다.

그렇다면 적절한 제동을 걸어야 한다.

다름 아닌 내가, 라고 견하는 생각한다.

감찰국이라는 조직을 이용해, 아니면 더 큰 상위 조직인 정치경찰실이나 태사부의 힘을 이용해서라도, 루우의 야심이든 재연의 계획이든 어딘가에선 저지해야 한다.

여기서 만족하라, 더는 앞으로 나가지 마라, 라고 말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구체적인 방법은 떠오르지 않는다. 견하는 골머리를 앓기보다는 일단 눈앞의 일을 계속 처리하기로 했다.

「다이온 연방 창설 계획」을 쥔 손을 다시 움직인다.

이번에 견하의 눈을 잡아끄는 단어는 ‘대원황국(大元皇國)’이라는 네 글자였다.

“그건 견하 네가 주문한 사항이야.”

그랬었다. 견하는 얼마 전에 ‘몽골인들의 반발을 달랠 수단도 좋지만, 반대로 고려인을 납득시킬 수단도 생각해보라’고 주문했었다.

그 결과가 ‘대원황국’이라는 이름.

‘다이온’의 고려식 발음인 ‘대원’을 이용한, ‘다이온 연방’을 고려에서 선전할 이름이다.

재연의 첫 번째 안에서는 몽골인들의 반발을 무마하느라 ‘고려가 몽골에 통합되는 형식’을 취하는 데 집중했다. 그런데 견하는 이것이 반대로 많은 고려인의 반발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봤고, 그에 대한 대비를 주문한 것이다.

“‘대원’은 다이온의 고려식 발음이니, 고려인의 새로운 조국이라는 느낌은 살릴 수 있겠어. 그런데, 왜 하필 ‘황국’이지? 기존에 쓰던 제국을 써도 상관없지 않나?”

“황제 폐하께 필요할 것 같아서.”

“……? 루우도 뭔가 주문했었나?”

“다른 부분에 대해 주문은 하셨지만, 이건 내 독단적인 판단이야.”

엄밀히 말해서, 루우가 고려의 황통을 이었다고 해도, 지금 상황은 새로운 왕조를 창건한 것과 다르지 않다. 황통이 완전히 한 번 끊기고, 먼 방계 황족이 황위에 오른 거니까.

그렇기에 루우에겐 부족한 권위를 보충할 무언가가 절실했다.

루우는 그 권위를 보충하기 위해 처음엔 허동주의 토벌에 나섰고, 산동 전역에서도 최전선에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그런 군공만으로도 부족하다. 특수한 이단이라는 점도 권위엔 어느 정도 도움이 되겠지만, 그건 루우에게 신비감을 더해 줄 뿐 권위까지 실어주기엔 약했다.

루우에겐 그것과는 조금 다른, 추상적인 권위가 필요했다.

재연이 ‘제(帝)’라는 글자 대신 ‘황(皇)’이라는 글자에 주목한 것은 이 때문이다.

“‘황제’라는 칭호는 그 기원을 따져보면 한족의 ‘삼황오제’ 신화에서 나온 거야. 고려민족의 전통 신화와는 무관하지.

한족으로부터 수입해서 오랫동안 써오긴 했지만, 민족적인 구심점을 나타내기엔 부족하다고 할까.”

특히 ‘제(帝)’는 고대 한족들이 믿던 신을 나타낼 뿐, 고려의 고대 신앙과는 별다른 관련이 없다.

임금이라는 뜻이 있긴 하지만, 민족적 권위를 더하고 싶은 재연의 의도와는 부합하지 않는 글자다.

“하지만 ‘황(皇)’은 다르지. 임금을 뜻하는 ‘왕(王)’위에 ‘하얗다(白)’는 한자가 더해진 형태야. 즉, ‘하얀 임금님’, 즉 그 정도로 ‘고결한 임금님’이라는 신성성을 부여하기에 좋은 글자지.”

국호에서든 공문서나 언론에서든 ‘황(皇)’이라는 글자를 일부러 부각시켜, 루우가 특별한 군주라는 이미지를 대중에 퍼트린다.

“고결하고 신성한 임금님이라…….”

그런 이미지를 선전하는 데 성공한다면, 확실히 루우의 권위를 드높일 수 있다.

그리고 그런 권위를 바탕으로, 몽골과의 통합에서 고려인들의 반발을 무마할 수 있다. 고결하고 신성한 우리 임금님께서 원하시는 바에 누가 반발할 것인가, 하는 식으로.

그다음으로 재연의 「계획」은 지금의 ‘황제’ 칭호를 고쳐 ‘신황(神皇)’이라는 새로운 칭호를 쓸 것을 제안한다.

견하는 고개를 저었다.

“황국이야 그렇다 쳐도 이건 기각이다.”

“왜지?”

“신황이라는 호칭은 황제에게 ‘신적’권위를 부여할 수는 있겠지. 하지만 공식적으로 네스토리우스파 크리스트교 신자인 루우가 신을 자처할 수는 없어. 이건 몽골에서 나쁜 여론으로 돌아올 거야. 지나치게 나간 거라고.”

물론 그 외에도 이유는 있다.

루우의 권위가 지나치게 강해져서, ‘침해 불가능’한 것이 되면 안 된다. 그때는 리안이고 누구고 간에 루우를 통제할 방법이 없어진다.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진 루우에게 재연이 편승해서 멋대로 군다면 그 역시 막을 수 없다. 그건 견하가 바라는 바가 아니다.

따라서, 여기서 ‘제동’을 건다.

“……알았어. 수정할게.”

「다이온 연방 창설 계획」의 두 번째 안은 이렇게 견하에게 검열된 다음, 루우에게 보내진다.

물론 견하는 지난번 일을 교훈삼아, 재연과 루우가 단둘이 만나서 일을 진행하는 상황은 철저히 막을 생각이다.

견하가 루우와 자신을 견제하고자 하는 의도를 읽었는지, 못 읽었는지는 모르지만, 재연은 일단 그렇게 한 걸음 양보했다.

견하는 다시 「다이온 연방 창설 계획」을 읽어내려간다. 철저하게 검토해야 한다. 의문이 나는 점은 바로바로 물어야 한다. 그러지 않고 대충 넘겨버리면, 견하가 모르는 곳에서 리안의 목을 죄는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

그것만큼은 막아야 했다.

“여기, 구체적 실행방안 말인데…….”

동군연합의 구체적 실행방안. 두 번째 안에서 대폭 보강된 부분이자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앞의 부분들은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이런 식으로 흘러갔으면 좋겠다’는 희망사항에 가깝다.

반면에 구체적 실행방안은, ‘어떻게 그런 일을 일으킬 것인가’에 해당한다.

“‘관세동맹’을 언급하고 있군.”

“공공연한 비밀 아닌가?”

재연의 얼굴에 미소가 떠오른다. 견하의 얼굴에도 비슷한 표정이 떠올랐다. 오랜만에 두 사람이 같은 생각을 떠올리고, 공감했다.

몽골, 고려, 키타이, 낭키아스 4국의 관세동맹.

의도 자체는 세계적인 경제 대공황을 극복하고, 4국의 평화와 번영을 확립하는 데 있다.

하지만 이미 세계 각지의 일부 석학들이나 정치가들이 우려했듯이,

그걸 전혀 다른 의도로 쓰려는 음모가 이렇게 진행 중인 것이다.

“이 부분은 절대로 밖에 알려져선 안 돼. 4국 간 관계의 파탄, 더 나아가 「계획」 자체의 파탄으로 이어질 거야.”

알려진 계획은 대응책을 만든다. 적이 멍청해서 대응하지 못할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런 행운을 바라는 건 더 멍청하다.

“경제적 안정, 교류의 확대, 이를 통한 ‘알타이 민족’ 개념의 홍보.”

견하가 중얼거림을, 재연은 받아서 말을 잇는다.

“시간은 걸리겠지만, 「계획」의 확실한 초석이 될 거야.”

「다이온 연방 창설 계획」의 여파를 우려하긴 하지만, 견하도 「계획」의 성공적 전망이 가져다주는 쾌감을 외면하진 않는다.

“‘알타이 민족’ 개념, 어떻게 우리 입맛에 맞게 활용할 수 있는지 설명해봐.”

견하는 추가 설명을 요구하며, 일부러 미소를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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