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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소녀는 대원수가 되었다-141화 (141/541)

지하(9)

리안의 팔을 당기면서, 루우는 봤다.

붉은 공간 너머로 빨려 들어간 주견하의 왼팔, 그 접촉면이, 기계적인 질감으로 반짝이고 있는 것을.

신환도역 전투의 끝 무렵에, 견하가 타고 간 기갑사는 어디로 갔는가.

그 답이 거기에 있었다.

***

견하는 세 번째 ‘붉은 꿈’을 꿨다.

마치 붉은 녹으로 뒤덮인 것 같은 세상. 녹을 닦아내면 그 아래엔 견하가 아는 세상처럼 차가운 철골 구조물이 있을 것만 같다.

하지만 안다. 이건 지난번 꿈에서 이어지는 꿈이고, 지난번 꿈이 보여줬던 것과 같은 장소다.

아니, 다른 장소인가? 장소는 다를지 몰라도 성질은 같다.

붉은 녹처럼 보이는 것은, 녹이 아니다. 붉은 이끼나 나무껍질도 아니다.

살점이다.

피가 흐르는.

피부일 수도 있고, 근육일 수도 있고, 점막일 수도 있다. 아니면 그 외의 다른 어떤 부위일 수도 있고.

끔찍한 광경이다.

꿈속에서는 위가 느껴지지 않아, 토악질이 나오진 않는다. 그러니까 이 ‘끔찍함’은 뇌로 느끼는 순수한 끔찍함이다.

차라리 검게 썩어 문드러졌다면 나았을 것이다. 공기 중에 노출된 피가 말라붙고, 해체된 살점이 썩어들어가며 악취를 내뿜는 것도 끔찍하긴 하지만 그것은 ‘자연스러운’ 광경이다.

해체된 살점에서 여전히 피가 흐른다면, 맥박이 친다면, 고통을…… 호소한다면.

대체 뭐라고 해야 하는가.

이렇게 되고도 살아 있다니 참 건강하구나, 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누가 이렇게 끝나지 않는 고통을 저주로 내렸는가에 대해 생각해야 할까.

지난번 꿈처럼 시야가 멋대로 움직인다.

의식에 따라 시야가 움직이는 것인지, 시야가 움직이고 의식이 따라가는 것인지 구분하기 힘들다.

견하는 어떤, 제단 위에 있다.

그렇다. 제단이다.

이것도 곳곳에 붉은 살점이 덮여 있었지만, 그래도 좀 더 친근한 표면이 드러난 부분이 있다. 돌인가? 아니 콘크리트? 아니면 금속? 모르겠다.

친근하다고 생각했던 것은 곧바로 낯선 것이 된다. 견하는 이것을 모른다. 전혀 모르는 것이다. 견하의 세상에는 없는 것이다.

아니다. 있는 건데, 그걸 이런 식으로 만들지는 않는다.

누구도 뼛가루를 곱게 빻아서 벽돌로 굳히고, 그걸 제단으로 쌓아 올리진 않는다.

제단 주변으로 어떤 것들이 기어 온다.

숫자가 꽤 많다. 아니, 견하의 시야가 닿는 땅 전체를 뒤덮을 정도로 많다.

파멸인이다. 작은 것도 있고 큰 것도 있다. 탈 같은 얼굴을 들어 견하를 본다. 사지를 위아래로 흔든다. 마치 아기 새가 날개를 파닥거리는 것 같다. 물론 아기 새처럼 귀엽지는 않다.

뭔가를 호소하는 몸짓이다.

자기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라고 말하는 몸짓이다.

파멸인은…… 글자 그대로 해석해야 한다.

이미 파멸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뭐라고 하는지 하나도 알아들을 수가 없지만,

뭐라고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우리는 저주를 받았다.

벌을 받았다.

그래서 말도 의지도 잃었다.

모습도 잃었다.

할 수 있는 건 게걸스럽게 먹는 것.

미처 이루지 못한 망집을 계속 추구하는 것.

그리고 그게 이루어지지 않으리라는 것을 반복해서 확인하는 것.

-누가 벌을 줬지? 누가 저주를 내렸지?

성대가 없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견하의 의문은 말로 완성되지 않는다.

하지만 의사는 충분히 전해졌다.

누구도 주지 않았다.

벌을 주는 자는 없다.

저주는 우리가 자초한 것이다.

깨달아라. 네가 물질에 불과함을 깨달아라.

너에게 혼백이 없음을 깨달아라.

네가 고깃덩이에 불과함을 깨달아라.

네가 피로 작동하는 장치임을 깨달아라.

생명에는 신성이 없음을 깨달아라.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어.

뚝.

섬뜩할 정도로 정확하게, 모든 파멸인이 동시에 사지를 퍼덕이던 걸 멈췄다.

모두가 자신을 노려보고 있음을 느낀다.

느끼자마자 제단을 뛰어올라 견하에게 달려든다.

씨앗만이라도.

희망만이라도.

우리의 아이들만이라도.

-아이들?

익숙한 표현이다.

-나도 그런 표현을 쓴 적이 있던가?

-그건 애초에 내가 떠올린 표현이었던…… 가?

그런 생각을 하는 중에도 파멸인의 무리는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

도망칠 것인가. 맞서 싸울 것인가.

사방이 파멸인이기 때문에 도망칠 수 없다는 걸 안 견하는 맞서 싸우기로 한다.

왼팔을 휘두른다.

왠지 모르게 묵직하다. 잘 움직이지 않는다.

그래도 억지로 왼팔을 움직여, 가장 앞장서서 달려드는 파멸인을 쳐낸다.

그리고, 꿈속이지만, 너무나도 명명백백하게, 견하는 놀랐다.

왼팔이, 거대한 금속 덩어리로 변해 있었으니까.

***

바람이 약해졌다.

모두가 팔을 있는 힘껏 당겼다. 당겨진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견하의 왼팔이 붉은 공간 밖으로 나왔다.

“견하야……!”

이렇게 외친 건 효윤이었고,

눈을 크게 뜨고 굳어버린 건 리안이었으며,

“흠…….”

의미심장하게 입을 다물어버린 건 루우였다.

붉은 공간에서 빼낸 견하의 왼팔은, 견하의 덩치보다도 더 큰 금속 덩어리가 되어 있었다. 아니 그냥 금속이라기보다는, 기계장치에 가깝다고 해야 할까.

리안이나 효윤 말고 다른 군인들도 충분히 놀라고 있었다.

“딱 그 ‘기갑사’만한 크기군.”

루우는 가까이 다가가서 견하의 몸과 그 기계장치 사이의 연결 부위를 살펴봤다.

상박의 중간쯤부터 그 아래로 변화가 일어났다. 이두근 위로는 인간의 피부다. 왼쪽 상반신 옷이 다 찢겨나가서 어떤 상태인지 잘 보인다.

금속관이 마치 혈관과 연결되기라도 한 것처럼 견하의 피부 아래로 사라진다.

견하는 커다란 기계 덩어리가 된 자신의 왼팔에 기대어 서 있다. 숨을 헐떡이며.

“기계와 인간, 서로 ‘이’가 다른 걸 억지로 엮으면 어느 방향으로든 문제를 일으키기 마련이지. 인간의 이가 기계에 반영되어서 ‘불가살’ 단계에 이르기도 하지만, 반대로 이렇게 기계의 이가 인간에게도 반영되는 모양이야. 그러게 적당히 했어야지.”

자업자득. 먹었던 게 소화불량을 일으켜 다시 토해낸 것뿐이다. 적당히를 모르는 이단들의 말로는 항상 이렇다.

어쨌든.

견하를 보호하겠다고 태사와 약속했다. 약속을 지키려면…… 잘라야 하나? 평생 이렇게 살 수는 없으니.

언월도의 날을 들이밀려다가, 루우는 멈췄다.

“……정말 운이 좋다고 해야 하나. 흥미로운 사례라고 해야 하나.”

기계 덩어리의 크기가 줄어들고 있다. 상당히 빠른 속도로. 마치 종이접기라도 하듯이. 펼쳐뒀던 기계들이 정리되듯이, 견하의 원래 팔이 있던 위치를 향해 차곡차곡 줄어들어 간다.

마침내 견하의 팔과 똑같은 형태를 만들 때까지 줄어들고, 멈췄다.

팔의 표면은 아까와는 좀 다르다. 여전히 기계장치 같지만, 훨씬 매끄럽고 정돈된 느낌이다. 견하가 만드는 ‘검’ 같은 느낌. 멀쩡한 상박과의 연결 부위도 물감이 번진 것처럼 부드럽다.

견하는 손가락을 접었다 펴며, 회색 표면의 왼팔을 멍하니 바라봤다.

“그거 다시는 원래대로 안 돌아갈 것 같으니까 제대로 움직이는지나 살펴봐.”

루우의 말에 견하는 왼손 손바닥을 위로 향했다. 둥글게 도려낸 공간이 나온다. 이단의 능력을 쓰는 데는 문제가 없다.

오른손을 들어, 그 공간을 양손으로 감싼다. 그리고 천천히 양팔을 벌린다. 양팔을 벌리는 동작 그대로 견하가 쓰던 검이 소환된다.

견하는 검을 왼손에 쥐었다.

“오른손잡이잖아?”

루우의 물음에, 소년은 갸우뚱한다.

“왼손으로도 쓸 수 있을 것 같아.”

칼자루를 쥔다.

기계 같은 칼을 기계 같은 손으로 쥐는 기묘한 광경이다. 루우는 팔짱을 낀다.

리안은 소년의 뒷모습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바라봤다.

칼자루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자마자 언제 멍하니 있었냐는 듯 빠르게 돌진.

그대로 붉은 공간을 베어낸다.

베어내서, 어긋나게 만든다.

바람이 완전히 그쳤다.

어긋난 붉은 원은 그대로 하얗게 빛나며 흩어졌고, 견하의 검도 빛으로 흩어지며 소환이 해제됐다.

비틀거리는 소년을, 효윤이 얼른 뛰어가 부축했다.

루우를 돌아보며, 황제라는 것도 잊고 말한다.

“가릴 것 좀 갖다줘. 어서!”

***

“이단이 됐을 때는 하루 자고 일어나니까 멀쩡해졌는데.”

황궁의 여러 응접실 중 하나에, 소녀들은 모였다. 침실인 옆방에 견하를 재워뒀다.

황궁으로 돌아온 지 사흘째. 견하는 대부분의 시간을 잠으로 보낸다. 가끔 일어나면 물을 먹거나, 부축을 받아 화장실에 다녀오는 게 전부다.

걱정과 푸념을 반쯤 섞어 말한 효윤은 지쳤다는 듯이 벽에 기댔다가. 그대로 주르륵, 주저앉았다. 두 다리를 제멋대로 뻗은 채로. 리안도 그런 그녀의 태도를 나무라지 않았다.

다시 황궁으로 돌아왔을 때는, 무척 오랜만에 돌아왔다고 느꼈다. 그만큼 지하에서 있었던 일은 길고 힘겨웠다.

견하 뿐만 아니라, 거기에 다녀온 모두가 지쳤다. 다들 견하를 간호하다가도 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잠들기를 반복하는, 그런 사흘을 보냈다.

육체적인 피로도 컸지만, 정신적인 피로가 훨씬 압도적이었다.

무거운 침묵이 흐른 끝에, 루우가 리안을 보며 입을 열었다.

“당분간, 아니 가능한 한 주견하가 이단에 관한 일에서 손 떼게 하는 게 좋겠어. 부르지도 말고, 상의하지도 말고.”

리안은 지친 얼굴로, 대답 없이 끄덕였다.

“쟤 팔은 정말 저대로 안 돌아가는 거야?”

효윤은 아예 바닥을 향해 물었다. 기운도 없었지만 루우의 얼굴을 보며 물을 기분도 아니었다.

“주견하는 처음 이단이 될 때, 확실히 뭔가 잘못됐어. 다른 이단들이 접하지 못한 영역에 닿았지만, 그 영역에서 떨어져 나오지도 못해.”

“무슨 이야기야. 쉽게 말해봐.”

“이단의 기원은 그 하얀 괴물들, 파멸인과 분명히 관련이 있어. 보통의 이단들은 ‘낮은 단계’의 관련성만 있기 때문에 검을 소환한다든가 하는 정도에서 그치지만, 견하는 아니야.

견하는 그 ‘붉은 공간’을 열 수 있어. 그래서 아예 우리의 생각으로 ‘제련된’ 무기가 아니라 ‘원료’를 불러오지.”

“그 하얀 촉수들.”

리안이 무거운 어조로 그렇게 말을 받았다.

“맞아. 그럴 거야.”

게다가 견하는, 기갑사를 훔쳐 타고 ‘불가살’ 단계에 이르렀다. 이단을 기계에 탑승시켜 효율을 극대화하려던 시도는 세계대전 때도 있었고, 그래서 그때는 각종 항공기 등에 불가살 단계가 나타나곤 했다.

인간의 이와 기계의 이 사이의 경계가 무너져 융합되다시피 한 형태. 그렇기에 탑승자인 이단에게 어마어마한 부담이 가면서도, 반대로 거의 모든 공격에는 무적이 된다. 공격을 그냥 흡수해버리는 것이다.

‘이’의 경계가 희미해진 상태에선 다른 무언가의 ‘이’를 받아들이지 못할 이유가 없으니까.

그런 과정을 거쳐서 견하는 타고 갔던 기갑사를 흡수했다…… 고 생각했는데, 그 반대의 경우가 일어날 수 있다는 건 생각하지 못했다.

“견하는 그 자신이 ‘붉은 공간’과 마찬가지로, 저 너머의 어딘가를 향해 열려있어. 거기로 떠넘긴 기갑사는, 반대 방향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것도 가능하지.

이렇게 된 이상 원상복구를 바라는 것보다는 앞으로 더 큰 일이 일어나지 않게 조심하는 게 정답이야.”

그리고 그 전에, 라면서 루우는 말을 이었다.

“결국 범인은 못 잡았어.”

“도대체 어디서 왔고, 누가 만들었고, 왜 그랬는지도 알 수 없지.”

공상과학 소설가들이 저 먼 우주의 외계인에 대한 이야기를 쓴다고 하던데, 마냥 공상으로 치부할 수는 없게 됐다.

“나는 말이야, 태사.”

리안은 고개를 들어 루우를 봤다.

“이거, 일종의 ‘실험’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실험?”

“성능 실험. 혹은 실전 실험. 얼마나 잘 움직이는지, 얼마나 내구성이 좋은지.”

“또 어딘가에서 이런 일이 일어날 수도 있겠네.”

리안은 손바닥으로 눈꺼풀 위를 덮었다. 무엇부터 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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