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리고 소녀는 대원수가 되었다-140화 (140/541)

지하(8)

파멸인이 리안을 쫓아가겠다는 판단을 내리기도 전에, 그 머리 부분을 거대한 박도가 도려냈다.

그리고 세찬 섬광이, 머리가 바닥에 떨어지기도 전에 여러 번 가로질렀다. 효윤의 그 빠른 칼 놀림에 파멸인의 머리는 터지듯 부서진다.

붉은 구체의 ‘눈알들’은 이제 효윤을 향했다.

왈칵. 왈칵. 왈칵. 왈칵. 왈칵. 왈칵.

핏물이 여섯 번 쏟아지고, 거기서 또 파멸인이 고개를 쳐든다. 머리를 잃은 놈은 비틀거리긴 하지만 그래도 아직은 살아 있다.

터널 벽이 울린다.

벼락을 두른 거대한 용의 발이 루우의 손에서 뻗어 나와, 머리를 잃은 파멸인을 완전히 짓뭉갰다.

“이렇게도 쓸 수 있어. 다들 기억해둬. 그나저나 이 정도로 전신에 타격을 줘야 죽네. 총알을 퍼부어야 간신히 저지할 수 있었던 이유를 알겠어.”

새 울음소리가, 대항하듯이 벽을 울린다.

이번에 대응하는 건 견하다.

견하의 손바닥에서 반 뼘쯤 위에, 공간을 둥글게 도려낸 듯한 뭔가가 생긴다. 그 너머는 이질적인…… 무언가다.

리안은 그걸 좀 더 자세히 보려 했지만, 볼 수 없었다. 아니, 보긴 했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인지하는 데는 실패했다.

대체 뭐지?

리안의 의문이 깊어지는 걸 가로막듯이, 그 ‘도려낸 공간’ 너머에서 수많은 촉수가 뻗어 나왔다.

양손 위에 모두 그 ‘도려낸 둥근 공간’이 있기에, 마치 양손에 채찍을 하나씩 쥐고 휘두르는 것 같다.

파멸인들이 고개를 들이민다. 견하는 그 촉수들로 파멸인들의 고개를 휘감았다. 그리고 뜯어낼 듯이 당겼다.

파멸인의 자세가 무너지고 땅에 처박히듯 넘어진다. 견하는 그걸 그대로 효윤과 루우 앞으로 당겨온다. 마치 먹잇감이라도 물어다 주듯.

이미 여러 번 견하와 합을 맞춰 본 두 소녀는 망설임 없이 달려들어 파멸인을 도륙했다.

견하는 나머지 파멸인을 여유 있게 억누르고 있다가, 루우나 효윤이 한 마리 완전히 처리할 때마다 다시 한 마리씩 던져줬다.

어떻게 보면 참 단조로운 방식의 반복으로, 순식간에 파멸인 여섯 개체를 끝장냈다.

그 광경을 보며 리안은 입꼬리를 올렸다.

마치 도발하듯, 붉은 핏덩어리를 향해 말한다.

“자, 이젠 어떻게 나올까? 일곱 마리가 마지막인가? 아니면 좀 더 쥐어 짜볼 텐가?”

그 대답은 빨랐다.

또다시 질척이는 뭔가를 쏟아낸다. 하나, 둘…… 일곱을 넘어갔을 때, 리안은 이번엔 수가 좀 많은데, 하고 생각했다.

열을 넘기면서 얼굴이 굳었다. 열다섯을 넘겼을 때 리안은 사격을 명령했다.

명령과 동시에 루우와 효윤, 견하가 양옆으로 물러선다. 병사들이 리안 앞으로 나와 총격을 가했다.

너무 적은 인원을 데리고 내려온 탓일까. 아까처럼 총알을 집중적으로 퍼부어 파멸인을 끝장내기엔 화력이 부족했다. 리안은 한 장교를 돌아보며 명령했다.

“위에 있는 인원들 싹 다 내려오라고 해.”

열다섯 마리나 되는 파멸인…… 아니, 아니다. 이번엔 뭔가 다르다. 하회탈 같은 얼굴도 없고, 어딘가 기묘하게 비틀린 듯한 사지도 없다.

이건…… 그때 제1대학교 총장실에서 본 것과 같은 놈이다.

“아하.”

다시 리안의 입꼬리가 올라간다.

“급하니까 제대로 된 놈은 못 내보내는 건가.”

비밀노선도 일반 지하철과 마찬가지로 양방향 선로가 놓여 있다. 당연히 승강장도 상행선 쪽과 하행선 쪽이 있고.

붉은 구체가 놓인 승강장은 상행선 쪽이다. 리안은 부대에 사격을 계속하면서 반대편 승강장 쪽으로 천천히 물러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극소수 고위 인사와 그 수행원들만 타고 내릴 것을 상정했기 때문에 승강장은 그다지 넓지 않다. 붉은 구체 하나에 괴물이 열다섯 마리면 가득 찬다.

가득 찬 것은 넘치기 마련이고, 그래서 이 불완전한 파멸인들은 승강장에서 선로로 내려와 리안을 추격했다.

빠르다.

만약 루우와 효윤, 견하를 비롯한 이단들이 없었다면, 일반인인 리안과 병사들은 순식간에 분해됐을 것이다.

병사 하나를 덮쳐오는 괴물을, 루우가 언월도 날 옆으로 쳐낸다. 일단 그렇게 밀어내고 나면 효윤이 달려들어 토막을 내놓고, 그런 효윤의 옆으로 다른 괴물이 달려들면 채찍 같은 촉수들이 매섭게 후려쳐 땅에 처박았다.

그렇게 여유를 만들어놓으면 병사들이 틈틈이 사격을 가해 괴물의 진격을 저지한다.

묘하게 쾌감까지 느껴지는 광경이다. 이것이 전술적 승리의 짜릿함인가.

상행선 선로와 하행선 선로 사이에는 두꺼운 콘크리트 기둥이 늘어섰다. 리안의 부대는 이 뒤로 엄폐했다.

“위쪽 인원들은 아직인가?”

아까 무전을 명령한 병사에게 리안이 묻는다. 딱히 추궁하는 어조는 아니다. 여기까지 오는 데 걸리는 시간이 있으니까. 어디까지 왔나 확인차 물어보는 것이다.

그런데 이 병사는 리안의 눈치를 심하게 본다. 지금 자기가 알게 된 소식을 전하면 호통이라도 들을까 두려워하는 눈치다.

나름 정예를 골랐다고 생각했는데 이건 대체 뭔지.

그 병사의 태도에 짜증이 치밀어 리안은 간결하게, 하지만 감정을 실어서 말했다.

“보고하라.”

리안 자신은 잘 모르지만, 이렇게 명령을 한 글자씩 확인하듯 말할 때 그녀의 눈빛은 푸르스름한 빛을 뿜는 것 같다. 그만큼 차갑고 무섭다는 의미다. 견하도 움찔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까.

병사는 그제야 더듬거리면서 말한다.

“오, 오고 있었는데 위쪽에 괴물 3개체가 다시 나타났답니다. 그래서 내려오다가 다시 올라갔다고…… 처리하는 대로 다시 내려오겠답니다.”

리안은 혀를 찼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복구공사 현장의 인부들을 떼죽임당하게 만들 순 없으니까.

거기에도 이단 장교를 남겨두고 오길 잘했다. 화력도 충분하니까 곧 제압할 것이다.

“그나저나 이것도 일종의 포위인가……. 대체 뭘 노리는 거지.”

모르겠다.

그러는 동안에도 붉은 구체는 계속해서 되다 만 괴물들을 뱉어낸다.

그래도 이젠 괴물들이 나타나는 것보다 이단들이 괴물을 처리하는 속도가 더 빨라서, 그냥 나타나면 처리하고, 나타나면 처리하는 일을 반복하고 있을 뿐이다.

아까 다른 이단 장교의 ‘이’를 무너뜨리는 것을 봤기에 경계는 하고 있다지만.

“언제까지 저렇게 할 거야…….”

징그러운 것도 계속 보다 보면 익숙해진다. 익숙해지는 것은 곧 지루함을 의미한다.

“저거, 이번엔 구체를 직접 노려서 쏴봐.”

장교에게 말한다. 장교의 명령에 따라 병사들의 총구가 일제히 구체를 향한다. 거의 동시에 총알 세례가 퍼부어졌다.

기대했던 것처럼 극적인 장면은 나오지 않았다. 그 징그러운 눈알이라든가 사지가 뭔가 반응하는 걸 보고 싶었는데. 총알은 핏물 같은 표면에 찰박찰박 박혀서 안쪽으로 사라질 뿐이다.

불완전한 괴물을 낳는 일은 계속된다.

계속된다, 고 생각했는데, 문득, 변했다.

괴물을 내뱉던 행위가, 중간에 멈췄다. 핏덩이는 나오다 말고, 마치 어딘가에 걸리기라도 한 듯, 붉은 구체 아랫부분을 불룩 튀어나오게 한 채로 가만히 있다.

뭐라 설명하기 힘든 기묘한 변화였다.

나오다 만 핏덩이는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고, 붉은 구체는 안으로 들어갔다.

아니, 아니, 이건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 그러니까, 구형 물체는 말 그대로 사람의 눈에 ‘둥근 표면’을 보여준다.

그런데 그게, 꼭, ‘오목 거울’처럼 변했다.

그건 리안을 비롯한, 여기 모든 사람의 공간 이해를 거스르는 광경이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구형 물체가 승강장 위의 공간을 당당히 차지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승강장 위에 투명한 벽이 있고 그걸 둥글게 도려낸 것 같다.

도려낸…… 것 같다?

아까, 견하의 손바닥 위, 하얀 촉수를 뿜어내는 어떤 ‘공간’도 마치 도려낸 것 같다고 생각하지 않았었나?

분명 둥글다고 느꼈던 표면이 이제 오목하다는 느낌이 든다. 눈앞에 있던 게, 아니 지금도 있는 게, 갑자기 이렇게 성질이 뒤틀리다니…… 괴상하다.

아니, 오목하다는 느낌을 넘어서, 이건…… 둥글게 도려낸 공간 너머로, 뭔가를 보여주는 느낌.

그러니까 징그럽게 커다란 눈알이나 일그러진 사지는 무언가의 표면이 아니라, 그 자체로, 저 너머에 있는 ‘어떤 장소의 풍경’이다.

지면? 하늘? 여하튼 저 너머에 있는 장소는, 핏물이 가득한 세상 위로 누군가의 신체기관이 부침을 반복하는 그런…… 곳이다.

그런 곳이 있을 수 있을까.

그런 곳에서 사는 자가 있을 수 있을까.

바람이, 불었다.

처음에는 귀밑머리를 살랑이던 바람은 순식간에 거세졌다. 자세를 낮추고 바닥을 짚지 않으면 안 될 만큼 강한 돌풍이다.

리안은 잠깐 눈을 감았다가, 실눈을 떴다.

“……안돼.”

그녀의 말은 두 가지 의미였다.

하나는 지금 앞에 일어나는 일이 더 진행되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였다.

다른 하나는 ‘왜 저런 기묘한 공간과, 견하가 손바닥 위에 소환하는 공간이 유사하다는 걸 깨달았으면서도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았는가’라는 의미였다.

견하의 몸이, 지면에서 조금 떠올랐다. 소년은 “어?”하는 소리를 냈을 뿐이다. 그도 리안 못지않게 당황한 듯했다.

어딘가 잡을 생각도 못 하고, 아까까지만 해도 붉은 구체였던 ‘공간’으로 빨려 들어간다.

멈춰서 있어선 안 된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선 안 된다.

바라보기만 해선 안 된다.

리안은 뛰었다.

누가 말릴 새도 없이, 선로를 뛰어넘고 기둥 사이를 지나, 괴물들의 시체 사이에서 미끄러지지 않게 주의하며, 견하를 향해 뛰었다.

여기서 꼴사납게 넘어져서 견하를 놓칠 수는 없다, 그렇게 이를 악물며.

붉은 공간 쪽으로 빨아들이는 바람이 마치 리안의 등을 밀어주는 것 같다. 덕분에 좀 더 속력을 낼 수 있었다.

간신히, 리안의 손이 견하의 팔꿈치에 닿았다. 놓치지 않게 팔꿈치 안쪽으로 손바닥을 옮긴다. 그대로 뒤로 넘어질 듯 잡아당긴다.

견하가 끌려가는 힘이 만만치 않아서 리안이 넘어지는 일은 없다.

리안은 자세를 바꾼다. 견하의 오른팔을 마치 업어치기를 할 듯 어깨에 걸치고, 끌어당긴다.

슬쩍 본 견하의 왼팔은 ‘저 너머’에 잠겼던 것 같지만, 착각이길 바란다.

그저 무사하길 바라며, 리안은 자세를 한껏 낮추고, 승강장의 돌바닥을 짚었다. 손톱이라도 박아넣을 듯 힘을 줘서.

손톱이 부러지기 직전에, 리안의 그 손을 다른 사람이 잡는다.

루우다.

루우 너머에는 효윤이, 그 너머에는 다른 군인들이 있다. 그들이 마치 인간 구명줄이라도 만들 듯이 서로를 잡고, 잡아당긴다.

리안은 양손과 팔에 더욱 힘을 줬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