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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소녀는 대원수가 되었다-139화 (139/541)

지하(7)

리안의 반론을 들으며, 루우는 눈을 감고 허리를 폈다.

잠시 뒤에 루우는 눈을 떴다. 그녀는 생각을 조금씩 흘리듯이, 말했다.

“이미 오래전부터 지하에 있던 구체가 내전 당시의 포격이나 뭐 그런 거에 영향을 받아서 깨어났을 가능성을 포기할 순 없지만……

같은 논리로 허동주나 신수덕 잔당의 테러 시도 가능성도 접을 순 없겠지. 좋아. 일단은 ‘구체’를 찾아보자.”

“그런데…… 어딜 찾아봐야 할까?”

리안이 이런 물음을 던진 건, 그녀 자신도 앞으로의 방침을 정하는 데 혼란을 느꼈기 때문이다.

이대로 인부들, 혹은 학생들의 목격담을 따라 지하철 수색을 계속해야 하는가? 그렇게 해서 ‘구체’를 찾아낼 가능성은 있는가? 있다고 해도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

동명특별시의 지하철은 광대하다. 선대 태사 미승휴가 동명시를 새로운 수도로 정하면서, 엑스라샤펠이나 런던처럼 지하철을 갖춘 도시를 만들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하얀 괴물의 목격 사례는 도시의 지하철 전체에 걸쳐 제보되었다. 이 제보를 따라 지하철 전체를 수색한다면 어마어마한 시간이 걸릴 것이다.

“하지만 그 중에도 목격 사례가 집중된 곳이 있어. 바로 여기, 도시 북쪽, 제11구 부근이지.”

배영훈이 리안에게 한 보고와 견하에게 들어온 감찰국의 보고를 종합해보면, 그런 결론이 나온다. 루우는 리안이 걸어가고 있던 방향을 향해 손가락을 뻗었다.

“그러니까 이쪽을 택한 건 옳은 선택이야. 게다가,”

루우는 파멸인의 시신들을 죽 둘러봤다.

“오늘 이전에는 한 마리씩 밖에 목격되지 않았어. 그런데 태사가 군대를 이끌고 오자마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여러 마리를 내놓았군.

혹은 이렇게 말할 수도 있지. 이 근처에 파멸인을 이렇게 많이 내뱉어서라도 지켜야 할 뭔가가 있다, 고.”

“어떤 방식으로 추측하든 이 근처를 수색하는 게 맞겠네.”

리안이 끄덕일 때, 견하가 뭔가 생각났다는 듯 덧붙였다.

“그런데, 만약에 여기 지하철 노선 어딘가에 ‘그 구체’가 있다고 한다면, 조금 이상하지 않아요?”

“어떤 점이?”

“그거, 우리가 봤던 거랑 비슷한 거라면 크기가 상당할 텐데, 한 번도 목격되지 않았다는 게 이상하지 않아요?”

확실히 이상하긴 하다. 파멸인들이 철저하게 지키고 있어서 목격자들을 발견하는 족족 죽였다면 구체의 목격자가 없는 것도 설명이 되지만, 그때는 더 높은 빈도로 파멸인이 목격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구체는 지상에 있고, 파멸인을 뱉어내서 지하철에 들여보내는 걸까?

아니, 그건 너무 위험성이 크다. 당장 지하에도 이렇게 군대를 이끌고 들어와서 몇 마리 정도는 소탕하는 게 가능한데, 훨씬 많은 사람과 화력을 쏟아부을 수 있는 지상에서는 더 불리하다. 구체의 위치가 쉽게 발각될 우려도 있고.

따라서 지하 어딘가에 구체가 숨겨져 있고, 거기서 하얀 괴물 혹은 파멸인을 뱉어낸다고 보는 게 옳다. 목적은 뭔지 모른다. 지상을 습격할 그 날까지 파멸인을 비축하며 전력을 쌓고 있기라도 한 건가.

지하 어딘가, 라고 하면 짐작되는 곳은…….

“역시, ‘비밀노선’ 어딘가일까.”

“태사의 추측대로 비밀노선 어딘가라면 파멸인은 목격되는데 구체는 목격자가 없는 이유가 설명되지. 그리고 누군가가 최근에 일부러 배치했을 가능성이 더욱 커져. 또……”

“언니나 고위층만 이용하는 비밀노선의 존재를 알고 있는 사람이겠지. 거기에 접근할 수 있도록 누군가가 도와줬을 가능성도 있고.”

오랜만에, 효윤의 목소리에 적대감이 넘쳐 흐른다.

그녀는 작년 4월 1일을 기억하고 있다. 누군가 리안을 비밀노선 안에서 죽이려 했던 그 습격.

그리고 이어진 내전. 산동 진압 작전. 쿠데타 시도.

그토록 리안을 죽이려 시도하고, 실패했음에도, 계속해서 죽이려고 달려드는 인간들.

도대체 왜 그치지 않는가. 무엇이 부족한가. 그렇게도 리안 언니가 당연히 가져야 할 자리를 빼앗고 싶은가.

이번에야말로 일절 관용 없이, 뿌리를 뽑아야 한다.

그런 분노가 효윤의 눈동자 안에 감돈다.

그 눈동자를 보며 견하는 떠올렸다. 효윤도 리안을 위협하는 사람이라면 절대로 참지 않고 가차 없이 반으로 잘라 죽이는 이단이라는 걸.

어쨌든 그녀의 그런 분노에는 자신도 동감했기에, 리안에게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누나 말대로 누군가 여기에 그 구체를 가져다 놨다면, 지난번 숙군 같은 조치를 각오해야 해요. 그냥 넘길 수는 없는 일이니까요.”

뿐만 아니라 동명시에 사는 시민 전체의 목숨도 위협했다. 이건 명백한 반역이다.

“피곤하긴 해도 그래야겠지…….”

리안은 아까보다 더 깊은 한숨을 내쉰다. 약간 지친 것 같다. 대체 언제까지 이런 싸움을 계속해야 할지.

죽는 그 날까지 끝나지 않으려나.

태사의 측근들이 하는 분노에 찬 말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황제는 말했다.

“범인을 잡을 수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지만, 잡는다고 해도 죽이기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어.”

“……해야 할 일?”

“첫째로 태사 말대로 구체를 의도적으로 여기에 배치할 수 있다면, 그걸 만들거나 소환할 방법도 있다는 뜻이야. 그 방법을 알아내야 해.”

“그렇겠지. 만드는 방법을 알아내야 예방할 방법도 생각해낼 수 있을 테니까.”

“그것만이 아니야. 구체를 테러에 쓸 수 있다는 건, 무기화할 수 있다는 거야.”

루우를 제외한 세 사람 모두 눈을 크게 뜨고 굳어버렸다.

눈앞에 있는 일의 대처만 생각하느라 그 생각은 미처 못했다. 그래, 총은 누구의 손에 쥐여주든 무기다. 적들이 이걸 무기로 썼다면 태사도 무기로 쓸 수 있다.

“뭘 그렇게들 놀라? 이단 연구는 기본적으로 군사적 활용에 관한 연구야. 다들 이 정도는 하고 있을걸?”

“……뭐 좋아. 기억해두도록 할게. 그런데 ‘첫째’라는 건 둘째도 있다는 거지?”

“둘째로는 그 구체에서 파멸인 여러 마리를 소환하고, 의도대로 움직이게 만드는 방법을 알아내야 하지. 지금까지는 가능성에 불과했지만 사실이라는 걸 확인했으니까.

그리고 지금 도산서원에서 아무런 활동도 하지 않는 구체는 왜 그런 건지도.”

“활성화할 방법을 알아내면, 역시 무기로 쓸 수 있다는 거지?”

“그래.”

“강력한 무기가 될 수는 있겠지만 꺼림칙하네.”

인간이 아닌, 정체불명의 괴물을 이용해서 대량 살상을 일으키는 무기라.

어디까지나 사람의 손에서 비롯된 초능력, 기술을 사용한 전쟁과는 다른 이야기다.

이건 원래 사람의 것이 아니지 않은가. 그런 것을 건드리면 안 되는 게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 든다.

***

논의는 그쯤에서 그치기로 하고, 리안은 비밀노선에 대해 알 만한 사람들과 연락을 취했다. 지금 그들이 있는 자리에서 비밀노선으로 들어갈 수 있는 통로를 알아내기 위해 담당자를 불렀다. 그가 오는 동안은 그 자리에 앉아서 기다려야 했다.

이 과정에서 적과 협력한 누군가에게 정보가 새어 나갈 우려가 있었지만, 그건 감당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선택은 불가능했다. 이미 새어 나갔다 가정하고 최대한 조심하는 수밖에.

이윽고 담당자들이 왔고, 이들이 황제와 태사 일행의 안내를 맡았다.

보안을 위해 여기서 대부분의 인원은 대기하도록 하고, 믿을 수 있는 소수정예만을 데리고 가야 했다. 이단 장교 몇 명과 참전 경험이 있는 병사 몇 명, 인부 하나.

이들에게도 오늘 본 것을 철저히 함구하도록 하면서, 지하철 아래의 또 다른 지하철로 들어간다.

투박하기까지 한 철제 계단을 텅텅 울리며 내려간다. 이건 작년 4월 1일에 리안과 효윤이 지하에서 지상으로 올라올 때 썼던, 다른 곳에 있는 계단과 흡사하다.

문제는 내려간 다음이었다.

“일단은 가장 가까운 승강장으로 가자.”

거기라면 전깃불도 들어오고, 장소도 좀 트여 있어서 여러 사람이 둘러서서 의논하기에 좋았다. 담당자들의 안내를 받아 일행은 비밀노선을 따라 걸었다.

“그런데 파멸인 덩치를 생각해보면 아까 그 계단으로 올라왔을 리는 없고. 어떻게 올라왔을까?”

루우의 의문에 리안은 잠깐 침묵했다가 답을 내놨다.

“글쎄. 우리를 처음 습격할 때 천장에 붙어 있었으니까, 벽을 타는 것도 가능했겠지. 그러면 뭐 다른 경로로도 충분히 올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겠네.”

사실 어떻게 왔는지는 지금 시점에선 별로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리안의 예상대로 이 안에 파멸인을 소환하는 구체가 있는가 하는 것이다.

아까처럼 천장에서, 혹은 미처 생각하지 못한 곳에서 기습해 올 수 있었기에, 경계를 유지하며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희미한 불빛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어둡다.

누군가 어둠은 시간 감각을 둔하게 한다고 했던가. 한참 시간이 흐른 것 같은데, 좀처럼 승강장이 보이질 않는다. 리안이 담당자에게 물어보니 아직 몇백 미터 남았다고 한다.

리안은 그 숫자들을 대충 흘려들으며, 말없이 계속 걸었다.

이윽고, 지금 일행을 비추고 있는 것보다 약간 더 강한 빛이 보였다.

일행은 걸음을 빨리했다. 이런 삭막한 터널보다는, 사람이 머물 것을 상정한 승강장 쪽이 좀 더 마음 편히 있을 장소라는 생각이 들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일행이 쉴 장소 따위는 없었다.

승강장 한가운데, 덩그러니 붉은 구체가 떠 있었으니까.

“어떻게 찾을지 고민했던 게 허망한데.”

리안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붉은 구체 쪽으로 한 걸음 나아갔다. 여전히 대량의 피로 뒤덮인 것 같은 표면이다.

그 안에서 인간의 신체 기관, 혹은 파멸인의 사지처럼 보이는 뭔가가 움직였다. 표면에 떠올랐다가, 가라앉기를 반복한다.

그 움직임이 마치 물이 끓듯 격렬해진다.

깊은 지하에서 보는 이 기괴한 광경에 병사든 장교든 질려버리는 건 어쩔 수 없다. 뒤에서 희미하게 ‘히이이……’하는, 미처 비명이 되지 못하고 억눌린 소리가 들렸다.

두 걸음 더 나아갔다.

그러자 정말 오랜만에 보는, 역겹기 짝이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익숙해질 수도 없고 익숙해지기도 싫은 모습.

사람 머리통만 한 눈알들 수십 개가 핏물 사이로 떠올랐다.

눈동자들이 일제히 리안의 얼굴로 향했다.

-역시, 누가 누군지 인지하고, 판단할 수 있는 건가.

리안을 확인한 붉은 구체의 아래에서 핏물이 왈칵 쏟아진다.

아니, 쏟아진 건 핏물만이 아니다. 그 안에서, 뭔가가…… 기어 나온다.

하얗고 매끈한 표면을, 핏자국으로 번뜩이며, 고개를 들이미는 얼굴. 탈처럼 굳어버린 미소.

“파멸인.”

그 얼굴이 리안을 향한다. 리안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은 자세로, 그 얼굴을 마주 보며,

뒤로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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