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6)
파멸인에게도 감정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자세가 무너진 채 질질 끌려가는 그 모습에서 리안은 공포를 보았다. 그건 어쩌면 리안 자신의 공포감이 반영된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끌려가지 않기 위해 사지를 지면에 박고 있지 않은가. 질질 끌려가면서도 필사적으로 재차 사지를 지면에 내리꽂는다. 저게 공포의 표현이 아니면 뭐지?
하얀 촉수들은 파멸인을 터트릴 듯 짓누른다. 아니, 먹고 있…… 는 건가?
파멸인은 이윽고 견하의 손바닥 근처, 하얀 촉수들이 덩어리져 뭉친 곳까지 끌려왔다. 파멸인의 몸은 신기할 정도로 빠르게 줄어든다.
얼굴, 혹은 하회탈처럼 생긴 부위만 남았을 때, 예의 그 구슬픈 새 소리를 한 번 내더니,
촉수들 틈으로, 그대로 사라졌다.
촉수들도 어둠 너머로 사라지고, 사람의 발걸음 소리가 들린다.
불빛 아래 모습을 드러낸 발소리의 주인은, 리안의 연하 연인, 견하였다.
소년의 단정한 얼굴을 보는 순간 울음이 나올 것 같았지만, 리안은 꾹 눌러 참았다. 그녀는 제국의 태사니까. 뛰어가서 소년의 목을 감싸고 입 맞추고 싶어도 근엄함을 유지한다.
그러다 보니 뛰어오는 쪽은 그녀의 연인이다.
갑자기 나타나서 놀랐지만, 그래도, 이렇게 와줬다는 기쁨이 더 크다. 위기에 처한 자신을 남자친구가 구하러 와줬다는 그 사실이,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근 것처럼 행복감이 구석구석 스미게 한다.
그래도 대뜸 나오는 물음은 간결하다.
“어떻게 알고 왔어?”
이 부근에 왔다는 것 자체는 배영훈 소령을 통해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리안은 괴물의 소문을 따라 계속 이동했으므로, 정확한 위치 파악엔 시간이 걸렸을 텐데.
견하는 쓴웃음을 지었다.
“복구공사 책임자들을 좀…… ‘다그쳤어요’. 공사 현장마다 태사 각하가 방문한 시간을 확인하고, 그다음엔 여기로 가겠다 싶은 곳을 감으로 맞췄죠.”
쓴웃음에 쑥스러움이 번진다. 기특해, 라며 쓰다듬어주고 싶었지만 문득, 이렇게 영리한 것도 이단이 된 여파일까 하는 생각에 멈칫거리게 된다.
그 멈칫거리는 틈을 타고, 견하의 뒤에서 두 사람이 다가왔다. 효윤과 루우였다.
효윤의 얼굴을 보고 미소 지으며 끄덕이다, 루우의 얼굴을 보고 조금 굳었다. 시선이 다시 견하를 향했다.
“황제 폐하를 여기에 모시고 오면 어떡해? 황궁은?”
모양새는 견하를 향한 추궁이었지만 루우더러 들으라는 말이다. 당연히 그 추궁에 대한 대답은 루우가 한다.
“내가 오겠다고 했어. 어떤 문제인지는 대충 알아. 이런 문제가 내가 안 올 순 없지.”
루우는 파멸인의 시신, 이단 장교의 시신으로 차례로 눈을 돌렸다.
“이걸 보니 오길 썩 잘한 것 같아.”
“그래도 황제와 태사 둘 다 여기 나와 있는 건 좋지 않아. 만에 하나 나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황제는 황궁에 있어야 해.”
“그 ‘만에 하나’가 일어나지 않게 하려면 파멸인에 관한 지식을 갖춘 이단이 오는 게 좋아. 게다가 ‘만에 하나’가 일어난 상황이면 황궁이라도 딱히 안전한 곳은 아니지.”
“지식을 충분히 갖춘 연구원은 여기에도 있어.”
“‘싸울 수 있는 지식인’도 있어? 있어도 나만큼 싸우진 못할걸.”
리안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됐으니 그만 돌아가라고 할 수도 없는 상황이다. 그리고 이런 걸 목격한 루우의 의견이 필요하기도 하고.
군인들이나 연구원 쪽을 돌아본다.
예상외로 희생자는 많지 않다. 무엇이 있을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충분히 알고 온 데다 이들이 정예였기 때문에 가능한 결과였다.
게다가 파멸인들은 한꺼번에 공격해오지도 않았다. 만약 한꺼번에 공격해왔다면 지금보다 훨씬 비참한 결과를 봤을 것이다.
일반 시민들 앞에 파멸인들이 나타났다면 더더욱.
그러니 오늘 찾아내자. 오늘 찾아내서 처리해야 한다. 그래서 동명특별시 지하의 위협을 제거하고, 시민의 안전을 확보해야 한다.
“이런 게 이런 숫자로 튀어나왔으면…… 더 많이 있을 수도 있겠어요.”
효윤의 말이 옳다. 이게 다라면 좋겠지만, 희망대로 되지 않을 가능성을 생각해야겠지.
“일단은 정보교환부터 할까.”
그렇게 말하며 리안은 부대원들 가운데로 황제 일행을 데려왔다.
황제 일행이 좀 더 잘 보이는 곳으로 오자, 장교들이 다가와 황제께 경례를 올린다.
병사들 사이에선 수군거림이 퍼져나갔다. 산동 전역에 루우가 참전한 이후, 황제가 종종 전선에 직접 찾아온다는 소문이 돌았었는데, 그걸 사실로 확인하고 흥분한 눈치였다.
게다가 그 황제는 상당히 귀여운 여자애에, 싸움도 잘하는 이단이고.
-남자가 매력을 느낄만한 요소긴 하지.
달관한 듯한 웃음을 지으며, 리안은 문득 생각했다. 그런데 견하는 내 어디서 매력을 느끼고 나와 사귀고 있는 걸까.
눈동자를 슬쩍 돌려 소년의 옆모습을 보지만, 뭔가를 읽어낼 수는 없었다. 그저 장교들에게 친절하게 응대하는 루우의 모습을 보고 있을 뿐.
대충 황제와 장교들의 인사가 끝나자, 본격적인 정보교환이 시작됐다.
견하가 진지한 눈빛을 리안에게 돌린다. 그 눈빛에 생각했던 게 들킬 것만 같아 리안은 퍼뜩 고개를 돌렸다. 얼굴이 빨개지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우리는 학교에서 소문을 듣고 왔어. 여기, 주견하네 애들이 지하철에서 하얀 괴물을 목격했다는 소문을 모아왔더라고.”
루우의 설명이었다. 설명을 들으며 리안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정보를 정리한다.
“그 소문에 나온 괴물이 파멸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일단 태사와 상의하러 갔었지. 하지만 태사는 자리에 없었고. 마침 태사도 비슷한 보고를 받고 갔다, 그렇다면 이건 보통 일이 아니다…… 그래서 여기까지 온 거야.”
“별일 아니길 바랐지만, 예상대로 나왔네요.”
효윤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는 처음 견하를 이단으로 만든 하얀 괴물을 본 이래, 그것들에 대한 거부감을 가장 크게 느끼는 사람이었다. 그런 징그러운 괴물들을 보고 거부감을 느끼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냐마는.
이번에는 리안이 보고 들은 걸 이야기할 차례다.
죽음 문턱까지 갔던 긴장감을 가까스로 다독이고, 말을 두서없이 하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입을 열었다.
“우리는 도산서원의 참상을 보고, 그동안 이것들이 일정한 행동 양상 없이 그저, 무차별적으로 인간을 죽이는 존재라고 생각해왔어.
하지만 오늘 내가 목격한 바로는 전혀 아니야. 이놈들은 명백히 ‘판단’이라는 걸 할 수 있고, 어떤 ‘의도’에 따라서 움직인다고 봐야 해.”
오늘 이전의 목격자들은 굳이 공격하려 하지 않은 점.
마치 상대를 재보기라도 하듯, 하나씩 내려와 싸운 점.
불리 또는 유리를 따져, 상대를 공략하려 드는 점.
상황이 변하자 공격 방식을 바꾼 점.
“공격 방식을, 물리적으로 타격을 주는 것에서 ‘이’를 붕괴시키는 방식으로 바꿨다?”
루우가 리안의 말을 확인하듯 반복하며 왼손으로 턱을 감싼다.
“그렇다면 견하가 소환하는 하얀 괴물들에 대해서도 알 수 있겠어!”
효윤이 뭔가 알아냈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가, 아차 싶었는지 견하의 얼굴을 살폈다. 견하는 의아하다는 얼굴로 효윤에게 물었다.
“내가 소환하는 하얀 괴물들에 대해 알 수 있다니? 그건 무슨 소리야?”
“그게…… 루우는 보통 하얀 괴물과 이단이 접촉하면 그 이단의 ‘이’가 무너지면서 죽는다고 했거든. 근데 비슷하게 생긴 네 무기는…… 왜 그런 효과가 없을까 궁금했거든.”
효윤의 변명을 들으며 견하는 왼손바닥을 쥐었다 폈다 해본다. 그 손에 시선을 주며 그런가? 하고 중얼거렸다.
“파멸인이 그런 식으로 공격 방법을 바꿀 수 있다면, 나는 아직 방법을 모를 뿐…… 그렇게 할 수 있다는 뜻일까?”
“시험은 나중에 시간 나면 해보자.”
리안은 그 화제를 정리하듯,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가슴을 쓸어내리는 중이다. 견하의 정신…… 즉 뛰어난 지식과 전투 시의 잔혹성이, 이단이 될 때의 어떤 문제와 관련이 있지 않나, 그렇게 추정 중이라는 걸 알게 해선 안 된다.
적어도 지금은.
뭔가 제대로 된 결론이 나올 때, 그게 견하도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을 때 말하는 게 옳다.
그렇지 않고 지금 견하가 알게 된다면…… 이 소년이 충동적으로 무슨 일을 벌일지 알 수 없으니까.
소년은 소년이다. 아무리 어른스럽더라도 그건 기억하고 있어야 한다.
루우 역시 견하와 효윤의 대화는 별일 아니라는 듯 넘겨버리고, 리안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 밖에 다른 이상한 점은 없었어?”
“이건 좀 더 추측의 영역에 가까운데…… 왜 굳이 여기 지하에, 이 시점에 나타난 걸까 하는 거지.”
하필이면 왜 도산서원 근처에, 퇴계 이황이 연구하기 딱 좋은 위치에 그것이 나타났는가.
하필이면 왜 동명특별시 지하에, 도시를 습격하기 딱 좋은 위치에 그것이 나타났는가.
우연인가, 아니면,
누군가가 일부러 그 자리에 그것들이 나타나게 만든 것인가.
“파멸인을 뱉어내는 ‘구체’. 지금까지 우리가 본 건 딱 두 개지만, 이상하게 여길만한 사례로 두 개는 충분하다고 봐.”
그리고 동명시 지하에 있는 구체는, 파멸인 여러 개체를 뱉어냈거나, 뱉어내는 중이라는 점도 거의 확신할 수 있다.
의도가 있다. 그렇게 의심하고 접근하는 게 모두의 안전을 위해 좋다. 우연이라고만 생각하고 문제에 접근했다가 예상치 못한 위험을 간과하는 것보다는 낫다.
그래서 최종적으로 모든 게 우연의 일치였다고 결론을 내려도, 어쨌든 위험성은 최대한 줄였으니 손해는 아니다.
루우는 턱에 댔던 손을 떼고, 리안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태사는 ‘구체’가 누군가의 의도에 의해, 그 자리에 나타난다고 보는 거야?”
“그럴 가능성이 크다고 봐.”
“그거 말인데…… 나도 아버지에게서 들은 거지만, 하나 더 있어. 카라코룸 주변에.”
리안의 얼굴에 놀라움이 퍼졌다가, 가라앉는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냐고 놀라는 것보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다음 일을 생각하라고 교육받았다.
“그러면 가능성이 큰 정도가 아니라, 누군가의 의도인 게 확실하다고 봐야겠어.”
“그런다면 ‘누군가’는 누구인가, 가 문제네요.”
견하가 말하자 루우는 고개를 갸웃했다.
“도시나 서원은 인간의 의도로 세우는 것이고, 그런 만큼 그 구체들이 인간의 의도와 관련성이 없다고 생각할 순 없겠지. 그런데 그 인간이…… 가까운 시대의 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까?”
“무슨 말이야?”
리안이 의문에 찬 시선을 보낸다. 루우는 시선을 내리고 조용히, 다른 누군가가 들을 것을 경계하듯 말한다.
“안동의 도산서원도 수백 년은 된 장소고, 카라코룸에서 구체가 발견된 장소도 수백 년은 된 사원이야. 최근에 누군가 만들거나 소환한 것이라고 단정 지을 순 없어.”
도산서원이나 카라코룸에 한정 짓는다면 루우의 말이 옳다. 리안은 반론한다.
“하지만 동명시의 지하철은 그 역사가 20년을 넘지 않아. 게다가 최근까지 동명시 지하철에서 하얀 괴물이나 파멸인의 목격 사례는 없었어.
그렇다면 다른 두 곳은 아니라고 해도, 적어도 동명시에 파멸인이 풀린 건 최근의 일이야. 이건 ‘최근’에 이 도시에 뭔가를 일으키려고 한 사람의 짓이라고 생각해야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