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5)
행렬의 한가운데 떨어진 파멸인을 향해 함부로 사격할 수는 없었다. 그랬다간 아군이 맞을 수도 있으니까.
그래도 혼란에 빠진 병사들이 마구잡이로 사격하는 걸 막기 위해, 장교 하나가 소리친다.
“흩어져! 다들 흩어져! 태사 각하를 지키는 걸 우선해라! 연구원들도!”
리안의 곁에 있던 장교 하나가 그녀의 어깨를 감싸고 한쪽 구석으로 이끈다. 보수 공사 용인지 뭔지 설비가 쌓여 있는 곳이다.
리안이 그 뒤로 들어가 몸을 숙이자마자 사격이 시작된다.
그리고 비명도.
뭔가가 거칠게 찢어지는 소리가 난다. 거기에 뒤따르는 비명은 비명의 한계를 넘어선 비명이다. 비명이라기보다는 구토 소리를 힘껏 질러대는 것 같다.
비명도 찢어지는 소리도 갑자기 그친다.
그와 함께 철벅, 하고 뭔가가 리안의 앞쪽으로 날아와 바닥에 떨어졌다.
누군가의 하반신이다.
총성은 그치지 않고 계속된다.
그러다 멎었다.
새가 구슬프게 우는 것 같은 소리가 들리더니, 거대한 뭔가가 땅을 가볍게 울리며 쓰러졌다.
“됐다! 안 죽는 건 아니야! 충분히 쏘면 죽는다! 계속! 계속 쏴! 너는 가서 실탄 더 가져와!”
한 마리 쓰러뜨린 모양이다.
하지만 파멸인은 지금 하나가 아니다.
얼핏 본 것 만으로도 다섯 혹은 여섯 마리였다.
두 번째, 세 번째 파멸인이 바닥으로 떨어진다. 아니 천장을 박차고 내리꽂히는 건가.
하지만 병사들도 아까처럼 당하지는 않는다. 이들은 정예다. 정체불명의 괴물은 첫 번째에 그쳤다.
한 번 쓰러뜨리고 나면, 두 번째부터는 ‘아는 괴물’이 된다.
총성과 병사들의 고함은. 아까보다 훨씬 규율이 잡힌 것처럼 들린다.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안다는 것처럼.
하지만 나머지 파멸인이 얌전히 기다려준다는 보장은 없다.
리안의 머리 위로 파멸인 하나가 뛰어내린다.
리안은 앞으로 굴렀다. 자세를 바로잡자마자 자신이 방금까지 앉아있던 자리를 본다. 파멸인은 리안의 엄폐물이었던 것들을 짓부수며, 아까 그놈처럼 고갯짓한다.
의도. 리안은 그 단어를 떠올린다.
이놈들…… 다 나를 노리고 있는 것 아닌가? 나를 노린다는 의도에 따라 행동하는 건가?
그렇게 생각하자 몸이 차가워진다.
“각하, 뒤에 서십시오.”
장교가 그렇게 말하며 리안의 앞에 선다. 자신의 무기, 거대한 창을 소환한다. 그런가. 이단이었나. 최대한 이단을 뽑아서 데려오길 잘했다.
장교는 앞으로 달려나간다. 리안의 안전을 생각하면 저 괴물과의 접전은 그녀와 거리를 두고 해야 한다. 한 박자 늦게 파멸인이 달려든다.
사지 혹은 촉수 같은 것을 칼날처럼 뻗어서 찔러 들어온다.
이단에겐 손쉽게 피할 수 있는 공격인지, 장교는 가볍게 피한다. 그리고 창을 아래에서 위로 단숨에 끌어올려 파멸인의 신체 일부를 베어낸다.
파멸인은 울음소리를 내지 않는다. 아까처럼 죽기 직전이 아니고선 소리를 내지 않는 건가. 아니면 소리를 낸다는 게 인간이나 다른 생물과는 전혀 다른 개념인 건가.
아니, 애초에 생물이기는 한가.
그래도 주춤거리며 물러나긴 한다. 물러난 게 아니라 다시 틈을 노리는 걸 수도 있다.
장교는 물러나거나 방향을 크게 돌리지 못한다. 방금 피하는 동작도 공격을 그대로 받아내서 흘리듯 할 수밖에 없었다. 완전히 몸을 틀어 피했다간 리안이 당한다.
리안도 장교의 싸움에 방해가 된다는 걸 알았는지, 창이 닿는 거리 바깥으로 물러난다.
“나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장교의 얼굴에 웃음이 떠오른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야.
이번에는 장교가 찌르고 들어간다. 파멸인의 몸뚱어리에 날이 박힌다. 파멸인이 버둥거리며 장교를 치려고 하지만 장교의 판단이 더 좋았다.
장교는 그대로 힘으로 밀어붙였다.
밀린다.
터널 벽까지 그대로 죽 밀려서, 먼지와 굉음을 내며 벽에 처박힌다.
저게 이단의 힘인가. 새삼 리안은 감탄했다.
고통이라도 느끼는 듯이, 파멸인이 다시 버둥거린다. 그 사지 혹은 촉수 같은 뭔가가 장교의 얼굴에 닿을 것 같지만, 힘없이 바닥에 떨어진다.
다른 이단 셋이 가세해 그 파멸인을 난도질했으니까. 사지가 됐든 촉수가 됐든, 아니면 다른 어떤 신체 기관이 됐든, 무참하게 잘려서 단면을 드러낸다. 몸통에 여전히 붙어 있는 일부가 부자연스럽게 파닥거린다.
‘얼굴’로 추정되는, 탈을 연상케 하는 부위가 잘렸다.
아까처럼 새 울음소리 같은 소리가 나면서, 파멸인이 쓰러진다.
옆으로 눈길을 돌리자, 아까 떨어졌던 두 마리도 처리가 완료된 게 보였다.
이제 마지막으로 남은 두 마리가 다시 천장을 박찬다.
어디로? 라고 생각하는 틈에, 두 마리는 리안과 이단 장교들이 있는 곳 근처에 떨어졌다.
일반 병사들이 있는 곳과는 반대 방향.
이렇게 되니 파멸인들과 일반 병사들 사이에 태사와 이단 장교들이 놓인 꼴이다. 태사를 비롯한 아군이 맞을 수도 있으니 일반 병사들은 방아쇠를 당길 수가 없다.
리안의 추측은 확신으로 바뀐다.
파멸인은 적어도 뭐가 유리하고 불리한지 정도는 판단할 수 있으며,
의도를 갖고 행동한다.
“……음.”
낮게 신음을 흘린다.
“각하! 피하십시오!”
늦었다. 이건 못 피한다.
두 마리 중 하나가 리안의 아주 가까운 곳으로 떨어졌다.
아까 한 마리에 이단 셋이 달려들었고, 나머지 이단들도 일반 병사들과 협력해서 세 마리를 처리한 직후다. 이단들이 아무리 빨라도 리안의 앞에 선 파멸인을 저지하러 달려오기엔 시간이 걸린다.
찰나라고 해도, 시간은 시간이다.
칼날 같은 촉수가 뻗어온다.
리안은 작년 일을 떠올렸다.
지금과 아주 비슷한 상황. 그때는 파멸인이라고 부르기도 힘든, 조잡한 괴물이 상대였다. 그 상대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견하가 앞을 가로막았고, 견하는 그대로 이단이 됐다.
이번엔.
다르다.
내가 또다시 소년의, 다른 누군가의 보호에만 의존할 줄 아는가.
패용하던 환도를 뽑는다.
-율곡. 칠정. ‘이’를 끌어내 승부를 가를 수 없다면 ‘기’의 극한을 노리라. 극대화하든, 극소화하든.
하얀 덩어리가 하늘을 난다.
파멸인의 조각이다.
옆구리가 쓰라렸다. 아주 살짝, 긁힌 모양이다. 일단은 내장이 나오지 않은 점에 감사하며, 리안은 몸을 틀어 상대를 향해 다시 칼을 겨눴다.
“일반인에 대한 편견이 있는 건 인간 이단이나 네놈들이나 똑같군. 내가 놀고먹으면서 태사 노릇을 하는 줄 아나.”
효윤에게든 루우에게든, 틈날 때마다 죽어라 훈련을 받았다. 그녀도 대원수 계급장을 단 군인이다. 군인, 군 통수권자로서 해야 할 만큼은 한다.
파멸인은 대체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미처 알아채지 못한 모양이다. 리안을 향한 고갯짓에, 분명, ‘당황’이 섞여 있다.
“너희는 ‘무적’이 아니야.”
이단은 인간이 자연환경 속에서 발휘할 수 있는 신체 능력의 한계, 그것을 규정한 ‘원리’ 자체에 간섭한다.
원리, 즉 ‘이’를 건드리고, 순간적으로 변화시켜, ‘기’로 드러나는 경이로운 현상을 일으킨다.
밀어낼 수 없는 것을 밀어내고,
들 수 없는 것을 들고
도달할 수 없는 곳에 도달한다.
그러나 이단의 능력에만 몰두하면, 당연히 알 수 있는 사실을 잊어버리곤 한다.
이단은 왜 ‘이단’이라 불리나.
이기론에서 이는 간섭할 수 없는 영역이다. 변화할 수 없는 영역이다. 그걸 변화시키니 이단이다.
그렇다면 ‘기’는?
변화시킬 수 있다.
인간은 수양할 수 있다.
수양하여 자신을 향상할 수 있다.
“이단의 신비만 보면, 기의 향상을 통한 인간의 발전이라는 측면을 간과하곤 하지. 네놈들도 마찬가지다. 수양한 일반인이 네놈들을 상대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겠지.”
도발도, 여유로운 미소도 짓지 않는다.
진지하게 파멸인을 노려본다.
최선을 다한다.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기를 단련해, 지금 할 수 있는 기예의 극한을 끌어낼 뿐.
파멸인이 다시 달려든다.
아까보다 더 능숙한 자세로 그 공격을 받아낸다. 단순히 리안을 노리고 정면에서 들어오는 공격이 하나, 리안의 다음 동작에 대비한 추가 공격이 하나.
잘라낸 촉수들이 다시 허공을 난다.
여기까지 시간을 끌었으면 충분하다. 다른 이단들이 달려와 다시 그 파멸인을 난도질했다.
리안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허리를 똑바로 세웠다. 등줄기에 흐르는 땀 때문에 제복이 축축하게 들러붙는다.
남은 건 한 마리.
위기를 모면한 리안의 앞에 이단 장교들이 선다. 승패는 완전히 기울었다.
그렇게 판단했는데,
그놈이…… 울음소리를 냈다.
다른 놈들이 쓰러질 때 내던 새 울음소리를.
“뭣……?!”
그러더니 또다시 기묘하게 꿈틀거린다.
꿈틀거림은 오래지 않아 멈췄다. 겉보기엔 공격을 시작하기 전고 다를 바 없는 꿈틀거림이다.
하지만 리안은 확실히 느꼈다.
이건 아까와 다르다. 뭔가 변했다. 그게 뭐지?
리안의 생각이 어딘가에 닿기 전에 파멸인이 공격해온다. 앞에 이단 여럿이 있는 데도, 무모하게.
이단들은 출발 전에 이미 주의사항을 충분히 전달받았기 때문에, 몸이 파멸인과 접촉하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파멸인을 베어냈다. 그렇게 파멸인은 저지되고, 쓰러져야 하는…… 데,
쓰러지지 않는다.
마지막 발악을 하는 건지 끝까지 달려들어, 이단 장교 한 명의 몸에 촉수를 뻗는다.
그 팔을, 가느다란 가시 같은 촉수가 꿰뚫는다.
“어……?”
그는 비명 대신, 그렇게 의문에 찬 소리를 내놓는다.
팔에 와야 할 아픔 대신, 전혀 다른 통증이 오기 시작하니까, 보는 것과 느끼는 것 사이의 괴리 때문에 의아했던 것이다.
물론 조금 늦었을 뿐, 비명은 지른다.
팔에 가시가 박혀도 아프긴 하지만, 저렇게까지 큰 비명은 지르지 않는데.
그러나 비명은 곧 알 수 없는 허파와 근육의 운동으로 변해버린다. 그저 고깃덩어리가 움직이며 내는 바람 빠지는 소리가 되고 만다.
이단 장교의 몸이, 붕괴하고 있었다.
마치 종이가 구겨지듯.
재가 바스라지듯.
모래성이 무너지듯.
신체가 붕괴한다.
신체를 구성하는 ‘원리’에 혼란이 온 것이다. 원리에 간섭하는 이단이, 다른 ‘원리’의 존재인 파멸인류 혹은 하얀 괴물과 접촉하게 되면, 그 사람의 원리가 근본부터 무너진다. 루우는 그렇게 말했다.
원리, ‘이’가 무너지면,
이의 구현인 ‘기’도 무너질 수밖에 없다.
이단 장교들이 거리를 벌린다. 처음 상대하는 적, 처음 맞이하는 공격 방식에 경악한 듯하다.
“역시, 그런가.”
저런 괴물이 이단을 상대할 때는 물리적인 공격도 하지만, 이렇게 상대의 ‘이’를 무너뜨리는 방식을 취하기도 한다.
견하가 소환하는 촉수형 괴물들은 물리적인 공격 방식을 선호한다. 지금까진 다른 이단을 만들어내지 않았다.
이 괴물들은 어쩌면 리안이 세 번의 공격을 막아냈기 때문에, 일반인이 아니라 이단이라고 판단한 게 아닐까.
그렇다면 이 파멸인들은 공격 방식을 상황에 따라 전환하는 게 가능하다는 이야기다.
방금 달려들기 전 울음소리는 공격 방식을 전환하는 신호고.
상황을 판단하고 그에 따라 공격 방식을 전환할 수 있다면, 역시 비이성적인 괴물은 아니다.
이놈들은 목적이 있다. 이놈들을 여기에 풀어놓은 누군가에게도 목적이 있다.
그나저나.
전에는 효윤과 루우가 있어서 어떻게든 없앴지만, 오늘 이 사람들이 이 괴물을 없앨 수 있을까?
아니, 전에는, 이런 방식의 공격을 받은 견하가…… 이단이 됐다.
리안은 침을 삼켰다.
도박이다. 만약 이 상태에서 공격을 받는다면, 나도 이단이 될 수 있을까? 루우는 이단이 되는 게 이단을 따라잡는 가장 빠른 길이라고 했었지.
리안은 앞으로 나섰다. 누군가 말리기 전에.
운이 좋다면 리안은 저 공격을 받고 이단이 된다. 괴물은 상황을 파악할 수는 있지만, 제대로 파악하는 건 아니다. 오판한다. 그 틈을 노린다.
몸져눕긴 하겠지만, 지난번 견하가 하얀 괴물의 발을 묶은 것처럼, 다른 이단 장교들이 공격할 여유를 줄 수는 있겠지.
그렇게 생각하고 달리기 시작했을 때, 파멸인의 고개가 리안 쪽을 향했다.
파멸인이 뒷걸음질 친다.
뭐지?
아니, 뒷걸음질 치는 게 아니라 뒤로 끌려간다.
수십 가닥의 하얀 촉수들이 뒤에서 파멸인을 붙잡아 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