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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소녀는 대원수가 되었다-135화 (135/541)

지하(3)

“하얀색…… 괴물이라고 했지.”

루우가 그렇게 말하며 지나를 보자, 지나는 도시락을 먹던 손길을 멈추고 다시 한번 확인해주는 대답을 내놓았다.

“네. 크기는 곰 정도라고 했어요. 이렇게 이야기한 애들이 곰이 실제로 얼마나 큰지 아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만큼 크게 느꼈다, 고 봐야겠지.”

견하는 그렇게 말을 받으며 루우와 효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지금 여기, 운동장을 마주한 학교 구석에 약간 쌀쌀한 바람이 분다. 그 바람이 다섯 명의 고등학생들 사이에 스몄다가 지나간다. 바람만큼 차가운 침묵이 흘렀다.

여기 있는 사람 중에 저 목격담에서 뭔가를 추측해낼 수 있는 사람은 셋이다.

견하, 루우, 효윤.

루우가 먼저 그 추측을 입에 담는다.

“‘하얀 괴물’ 혹은 ‘파멸인’일까.”

견하와 효윤이 끄덕이는 걸 보고, 루우는 추가 질문을 던졌다.

“더 자세한 외양 설명은 없었어?”

“네. 말씀드린 정도에요.”

“우리 쪽에서도…….”

지나와 수영 모두 그렇게 말한다. 이번엔 효윤이 물었다.

“피해 사례는? 혹시 갑자기 이단 능력을 갖게 됐다거나 한 사람은 없었어?”

이번에도 지나와 수영은 고개를 저었다. 효윤은 한숨을 내쉰다.

“그렇다면 이제부턴 추측만 할 수밖에 없네.”

“목격한 사례는 있지만, 실제로 접촉은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뭔가 다른 걸 목격했거나 착각한 것이, 우연히 파멸인과 외양이 비슷했을 수도 있겠군.”

견하가 그런 의견을 내놓자, 루우는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는 듯 눈썹을 올렸다.

“그렇게 생각하기엔 목격 사례가 너무 많아.”

지나가 수집한 목격 사례는 대략 일곱 건. 수영이 들은 사례는 다섯 건이다. 한두 건이면 몰라도 총합 열두 건이라면, 이건 뭔가 의심해봐야 한다.

“게다가 우리가 파멸인의 행동 패턴을 다 파악했다고 자신할 수는 없어. 오히려 인간을 습격한 지난 사례들이 특수한 경우였을 수도 있지.”

견하는 그 말을 들으며 안동의 도산서원, 그 지하에서 본 참상을 떠올렸다. 자신을 이단으로 만든 ‘하얀 괴물’이 달려들던 순간도 떠올렸다.

그것들은 모두 인간에게 공격적이다. 자신이 소환하는 ‘아이들’ 역시, 자신 외의 인간에게 달려드는 걸 주저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번에 지하철에서 목격된 하얀색 괴물체들은 인간을 공격하지 않는다. 그저 빠르게, 시야 한켠을 스쳐 지나갈 뿐이라고…… 이건 또 다른 행동 패턴일까. 뭔가 의미가 있는 걸까.

효윤도 루우의 의견에 무게를 실어준다.

“견하 말대로 파멸인과는 상관없는 일일 수도 있지만, 그래도 그게 목격된 장소에 주목해야 하지 않을까. 파멸인, 파멸인류, 그리고 그…… ‘구체’는 모두 지하 시설에 있었잖아.”

효윤의 말을 듣는 동안 견하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운다.

“그렇다면 효윤이 네 말은,”

“새로 발견된…… ‘구체’가 동명특별시 지하에 있는 건 아니냐는 거지. 그것도 지하철과 연결된 ‘어딘가’에.”

효윤의 지적은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시골 벽지에 그 ‘구체’가 있다면, 만약의 사태가 일어나도 희생은 한정시킬 수 있다. 군사기지 근처에서 일어나면 희생은 군인들과 몇몇 민간인들로 한정시킬 수 있다.

하지만 도시, 그것도 수도 혹은 그와 비슷한 규모의 도시 지하에 있다면, 반드시 제거해야 한다.

“만약의 사태가 일어났을 때 끼칠 피해가 어마어마할 테니까.”

그리고 그 ‘만약의 사태’가 지금까지 일어났던 파멸인의 공격보다 작은 규모일 거라고 장담할 수도 없다.

만약 동명시에 대규모로, 군의 대응이 어려울 정도로 밀려든다면, 그때는…… 동명시의 궤멸도 전혀 가능성이 없다곤 할 수 없다.

“일단 목격 사례가 사실인지 확인하고, 사실이라면, 반드시 막아야지.”

루우의 말에 효윤도, 견하도 동의했다.

의견이 하나로 모였으니 그다음 일은 실행이다. 세 사람은 수업이 끝나자마자 황궁으로 돌아와 태사부로 향했다.

***

리안의 집무실을 향해 걷던 중, 낯익은 사람과 마주쳤다.

“배영훈 소령이군.”

“……폐하!”

배영훈은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황제와 상급자들을 보곤 경례를 올렸다.

효윤이 먼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여기엔 무슨 일로? 태사를 뵙고 나오는 길인가요?”

“그게…… 태사께선 지금 부재중이십니다. 폐하나 중장 각하께서 찾으실 경우를 대비해서 여기서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리안은 배영훈 소령을 통해 루우와 효윤에게 행선지를 알리고 싶었던 것 같았다. 견하는 오늘 황궁에 올지 안 올지 확신하지 못했고.

“무슨 일로 태사가 자리를 비운 거지?”

“지하철 복구공사 현장에서…… 괴물체들이 목격됐다는 보고가 올라왔습니다. 그래서 직접 가서 살펴보신다고.”

시선을 교환할 필요도 없었다. 견하가 곧바로 앞으로 나서며 물었다.

“정확한 위치가 어디죠?”

***

견하가 지나와 수영에게서 괴물체 목격에 관한 보고를 받고 있던 시각.

리안도 배영훈 등을 통해 지하철 복구공사 현장에서 올라온, 괴물체 목격 보고를 받고 있었다.

루우와 효윤, 견하가 그 ‘목격 사례’를 종합해 파멸인일지도 모른다는 결론을 끌어냈듯이,

리안도 같은 결론을 끌어냈다.

“목격된 장소에 딱히 규칙성은 없어 보이는군. 동명시 전역에 흩어져 있어.”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동명특별시 지하철 전체에서 목격되고 있습니다.”

배영훈은 리안에게 그렇게 보고했다.

‘지하철 전체’라는 것은, 시민들이 이용하는 지하철만 의미하지 않는다.

고려 제3제국 권력 핵심부가 이용하는 ‘비밀노선’까지 일컫는 말이다.

“복구공사 현장 근처에서 올라온 보고가 많지만, 보고된 목격 사례가 전부라고 이야기하긴 힘들겠지.”

“아무래도 현장에 오래 머무는 사람들이 목격할 기회가 더 많았을 겁니다. 그렇다면, 이외에도 더 많은 괴물체가 지하철을 배회하는 건 아닐까 싶습니다.”

“실제로 존재하는 거라면…… 아니, 이 정도로 목격 사례가 많으니 사실이라고 보는 게 맞겠지. 정체불명이지만.”

리안은 내전이 처음 시작된 날을 떠올려본다.

리안이 황궁을 급습했을 때, 도저히 버틸 수 없다고 판단한 허동주는 옛 태사부 건물을 폭파하고 황궁을 탈출했다. 이때 태사부 지하에서 이어지는 비밀노선의 일부가 파괴됐다.

동명시에서 도망치면서, 허동주는 비밀노선 곳곳을 망가뜨렸다. 자신이 어디로 도망쳤는지 알기 어렵게 해서 추격을 뿌리치기 위함이었다. 동시에 동명특별시를 통치하게 된 리안에게 최대한 불편을 주려는 목적도 있었다.

도시에서 교전이 일어나면서, 몇몇 부대가 포격 중에, 혹은 지하철을 통한 기습을 방지하려고 의도적으로 지하철을 파괴했다. 이런 파괴는 반란군과 혁명군을 가리지 않고 일어났다.

덕분에 복구공사는 내전이 끝나고 수개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지하철에 ‘괴물체’가 있다면, 복구공사 현장에 있는 사람들이 그것을 이토록 자주 목격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정말 큰 문제는, 그 괴물체의 외양.

“흰색 표면. 크기는 1미터 50센티미터에서 3미터 정도까지 다양하군.”

대략 그 크기에, 흰색 괴물체라면 역시 ‘파멸인’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아니면 그것의 불완전한 형태인 하얀 괴물이라든가.

리안의 머리에도 강렬하게 남아있던 ‘구체’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리고 리안이 동명시 지하에도 그런 ‘구체’가 있을지 모른다는 결론에 이르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여기에도 새로운 구체가 발견된 건가.”

만약 구체가 정말로 있다면, 도산서원 지하에 있던 그 시설처럼, 동명시 지하에도 격리 및 연구가 가능한 시설을 지어야 할 것이다.

안전을 생각한다면 그런 괴물 덩어리는 없애버리는 게 옳다. 하지만 ‘없애는 방법’을 모른다. 현재로서는.

격리가 최선이다.

그렇다면 이단이 포함된 군대를 보내 구체를 찾고, 격리를 위한 밑 작업을 시작해야 한다.

리안의 머릿속에는 이 일을 맡길 적임자로 몇몇 장교와…… 견하의 얼굴이 떠올랐다.

떠올랐지만, 거기서 망설인다.

루우가 했던 말들이 떠오른다. 견하의 상태가 심상치 않다는 말.

그런 견하를 이 임무에 보냈다가,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건 아닐까. 견하가 다치는 건 생각도 하기 싫다.

그리고 통치자로서도…… 견하의 ‘특수한’ 존재가 뭔가 이변을 일으키는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든다. 견하 말고, 좀 더 ‘통상적인’ 이단을 동원해야 한다. 그리고 전문가들도.

“책상 앞에만 앉아있다 보니 감이 떨어진 건가.”

최근 현장 시찰이라고 해봤자 정치경찰실과 감찰국을 돌아본 것 정도.

자기도 모르게 자꾸 주변 사람들만 움직여서 일의 진행 과정과 결과만을 들으려 한다. 이건 좋지 않은 습관이다.

물론 태사가 중심을 지키고 있는 것도 중요하지만…… 특히 수도에서 일어나는 이런 일은 직접 눈으로 보고 확인해 둘 필요가 있다.

견하의 미래가 걸린 일일 수도 있고.

국가의 미래와는 더욱 확실한 관련이 있다.

여기까지 생각하고 나서, 리안은 몸을 일으켰다.

“직접 가서 봐야겠어. 준비해 줘.”

“알겠습니다.”

방 밖으로 나서려는 배영훈을 향해, 리안은 덧붙였다.

“소령은 여기 대기하다가 혹시 폐하나 최효윤 중장이 찾으면 이야기 좀 해줘.”

***

당장 대답하지 않으면 목이라도 꺾어버릴 것 같은 견하의 기세에, 배영훈은 순순히 리안의 행선지를 말했다.

동명특별시 북쪽, 제11구 일대의 지하철 복구공사 현장과 그 주변을 둘러본다고 했다.

리안은 대대 규모의 부대와 그에 상응하는 이단들을 동원했기에 안전은 보장된다고 말했다 한다.

하지만 견하의 생각은 달랐다.

“배영훈 소령도 도산서원에서, 그 참상을 봤으니 충분히 알고 있겠죠?”

“……예.”

“차량 준비해 줘요. 나도 직접 가서 살펴보고, 태사 각하의 안전도 지켜야겠으니까.”

배영훈이 어딘가에 전화를 걸어 차량을 준비하는 사이, 효윤이 견하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나도 갈게.”

견하는 효윤의 진지한 눈빛을 마주보며 끄덕였다.

“효윤이를 따라하는 것 같지만 나도 간다고밖에 말할 수 없겠네.”

루우의 말이었다.

견하는 눈살을 찌푸렸다.

“태사나 황제, 둘 중 하나는 황궁에 있어야 해.”

“나는 내 몸 지킬 수 있어. 일반인인 태사가 문제지. 그리고 잠시 황궁 좀 비웠다고 큰 문제 안 일어나.”

소녀는 진지한 눈빛으로, 견하에게 바싹 다가섰다.

“내가 알고 싶은 게 거기 있어. 가봐야 해.”

물론 루우가 파멸인류에 대해 더 알고 싶은 욕심만으로 이러는 건 아니다.

그녀는 리안과 약속했다. 견하에게 나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겠다고.

그 약속을 어디까지 지킬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성의는 보여야 한다.

“게다가 황도 지하에서 벌어지는 일인데 황제가 가보지 않는다는 건 말이 안 돼. 책임은 태사만 지는 게 아니야.”

견하는 자기보다 조금 낮은 위치에 있는 그 눈동자를 바라보다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황제가 가겠다고 고집을 부리면 그로서는 막을 방도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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