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2)
태사의 집무실.
리안은 그녀의 연인이 방 안에 들어서는 모습을 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늘 바른 몸가짐을 하고 있지만, 그 속에서는 대체 무슨 일이 진행되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이단으로서의 측면이든, 마음의 측면이든.
그래도 일단 한껏 미소 지어본다. 남자친구니까.
“잘 다녀왔어?”
“걱정해주신 덕분에요. 그, 보고했던……”
견하의 말을 들으며 리안은 표정을 다잡는다. 통치자의 엄격한 얼굴로 돌아간다.
“기갑사 기술이 아즈텍의…… 철혈의 꽃이라는 집단에 유출되었다는 소식, 전쟁성과 군은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어.”
“역시, 군사기밀의 유출이니까요.”
“허동주가 남긴 몇 안 되는 긍정적 유산이자, 고려가 다른 나라에 비해 군사력에서 우위에 설 수 있었던 방안이었는데, 이런 식으로 가면 언젠가는 너도나도 기갑사를 만들고 전력을 증강할 거야.”
“대책으로는 어떤 게 나왔죠?”
“별 것 없어. 이 이상의 기밀 유출을 막기 위해 보안 수준을 높이자는 것 정도. 그래봤자 철혈의 꽃 쪽에서 보안 유지에 실패하면 얼마든지 퍼져나가겠지. 신수덕이 여기저기 망명하면서 자기 몸값으로 퍼트리고 다닐 수도 있고.”
“그래도 일단은 어디어디가 알고 있나, 그 정도만이라도 파악해두는 게 좋겠어요.”
“이렇게 된 이상, 낭키아스도 의심스러워. 신수덕의 탈출을 낭키아스에서 도왔다면, 분명 어떤 거래가 있었을 거고. 그 거래의 대가로는 기갑사 설계도 같은 게 나왔을 가능성이 크지.”
견하는 아랫입술에 힘을 준다. 역시 무슨 수를 써서든 죽이고 왔어야 했나, 라는 생각을 하는 듯하다.
“견하 네가 죄책감을 느낄 필요는 없어.”
“하지만 신수덕이라도 제대로 처리했다면…….”
“신수덕을 처리한다 해도 철혈의 꽃에서는 이미 사본 같은 걸 다 만들어뒀을 거야. 한 번 퍼져나간 정보를 물리적 수단으로 저지할 방법은 없어.”
그래도 아랫입술에 힘을 준 채로 서 있다가, 한숨을 내쉬며 얼굴을 푼다.
그런 견하의 얼굴을 보며 리안은 말을 이어나갔다.
“그 밖에도 전쟁성과 군은 다른 대책을 좀 내놨어. 지금은 그래도 우리가 기갑사를 처음 개발한 나라고, 그 생산 및 운용 비결, 교리 등은 여전히 앞서 있지.
그러니 우리는 후발주자들이 우리를 따라잡지 못할 정도로 기술과 교리를 발전시키면 된다는 결론이 나온 거야. 당연히 여기에는 막대한 투자가 뒷받침되어야지.”
“그거…… 전쟁성이나 군이 이때가 기회다 싶어서 예산 요구하는 거 아니에요?”
견하의 말에 리안은 피식 웃었다. 오랜만에 터트리는 웃음이다.
“그 말도 맞겠지. 하지만 나한테도 손해는 아니야. 그렇게 해서 태사부 직속으로 둔 이단 연구기관의 규모와 질은 향상될 테니까. 실제로 생산된 기갑사와 거기에 탑승할 이단 부대도 내 직속으로 둘 거고.”
그 말을 들으며 견하는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작년 말부터 리안의 행적을 되짚어보며, 오늘 이 말이 의미하는 바를 해석한다.
“숙군 이후의 공백…… 누나가 차지할 거죠?”
“그래서 군을 확실히 태사에게 복종하는 조직으로 만들 거야.”
“아예 직접 작전지휘까지 하실 생각이에요?”
내전 시기에는 혁명군사령부를 통해 리안도 군 지휘에 많이 참여했지만, 내전이 끝난 지금은 혁명군사령부가 해산한 상태다. 그래서 군의 작전지휘권은 다시 합동참모본부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
리안은 한발 물러서서, 통수권만 보유한 채 평화로운 시기를 만들어나간다는 인상을 주려고 노력 중이고.
“그건 아니야. 설령 그렇다고 해도 아직 이르고.”
“이르다는 말씀은…….”
“선출 장교제도를 도입했잖아. 이 사람들이 어느 정도 세력을 키워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을 때까지 몇 년은 기다려야지. 군 내에서 태사에게만 절대적으로 충성하는 파벌을 조심스럽게 길러 나가야 해.
내가 군의 작전지휘권까지 손을 뻗는 때는 그들이 군의 한 축을 형성해냈을 때야.”
그런데 굳이 그럴 필요까지 있을까? 라고 리안은 고개를 갸웃했다.
“숙군 이후 다들 납작 엎드려 있다지만, 그런 무리수를 뒀다간 또 반발이 일어날 거야. 나에 대한 충성심이 높은 인간들로 군을 채워서 간접적으로 지배하면 그만인데, 굳이 그런 불필요한 반발까지 감수할 필요는 없어. 세계대전이 또 터진다면 모를까.”
견하는 끄덕이다 말고, 고개를 숙인 그대로 멈췄다.
리안의 마지막 말이 걸렸다.
“세계대전…… 또 일어나진 않겠죠?”
리안은 무슨 질문이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견하를 보다가, 글쎄, 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녀도 생각에 잠겨야 할 질문이었다.
“절대로 안 일어난다고는 못하겠지. 지난 세계대전도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던 거니까. 하지만 일어난다고 해도 우리는 어떻게든 피할 거야. 그러기 위해서 군사력을 증강하고, 관세동맹을 추진하는 등 외교적 노력을 기울이는 거니까.”
견하는 리안의 말을 들으면서도 어떤 불길함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가 아즈텍 연방에서 보고 들은 것들은, 새롭지만 어두운 시대가 온다는 예고 같았으니까.
이미 여기 오기 전에 보고서를 올려뒀지만, 그래도 견하는 다시 한번 리안 앞에서 설명했다.
아즈텍의 불안정한 정세.
‘철혈의 꽃’의 강경함.
아즈텍 현 정부의 완고함과…… 뚜렷한 대책을 세우기 힘든 그들의 사정에 대해서.
“우리처럼 내전이 일어날 가능성은 높지만,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이길 수 있을 것 같진 않아요.”
“그런가…… 견하는 철혈의 꽃이 이길 거라고 보는구나.”
“기갑사 전력까지 제대로 갖춘다면 철혈의 꽃이 이기겠죠. 그 전에 아즈텍 정부가 철혈의 꽃을 제압하는 데 성공한다 해도, 그때는 사회주의자들을 상대해야 할 텐데, 어떨지 모르겠어요.”
“외무장관하고 이야기를 해봐야겠어. 어떤 결과가 나오든 거기에 대비한 시나리오는 짜둬야 하니까.”
그러면서 견하 몰래, 리안은 이를 악문다.
안세규의 행보와 의도는 굉장히 의심스럽지만, 지금은 협력을 구할 수밖에 없나, 라고 뇌까리며.
***
3월이 오면서 새 학기가 시작됐다.
견하도, 루우도, 효윤도, 수영도, 무난하게 3학년으로 진학했다. 일반 학생들이 채워야 하는 출석 일수 따위는 가뿐하게 무시한, 정권 엘리트들을 위한 특별 코스를 통해서.
이 네 사람이 모여 있는 게 당사자들에게도, 학교 측에도 편했기 때문에, 그들은 올해도 같은 반이 될 수 있었다.
수영은 올해는 반장 일을 맡지 않았다.
“지금 감찰국 일만으로도 바쁜데 학급 반장까지 할 수는 없어.”
견하도 그 점을 배려해서 최소한의 교양에 필요한 성적 정도만 요구했다. 그래서 올해는 평범한 모범생 인상의 소년이 반장을 맡았다.
“이렇게 모이고 보니, 담임 교사한테는 너무 부담스러운 조합인데.”
견하는 그렇게 짧은 감상평을 남겼다.
황제.
감찰국 국장.
감찰국 직원.
태사의 최측근.
물론 황제 되시는 루우 테무르 폐하께선 모든 사람에게 격의 없고 친절하다는 인상을 심어주려 노력 중이시다. 덕분에 올해도 반 친구들과의 관계도 원만하고, 인기도 여전히 높다.
하지만 담임을 비롯한 교사들은 최대한 그들을 의식하지 않고 수업을 진행하려 했고, 꼭 필요한 용건이 있을 때는 반장을 통했다.
덕분에 이 안경을 쓴 평범한 모범생은 쭈뼛거리며 제국 최상층 인사들에게 말을 거는 고역을 치러야 했다.
목덜미에 식은땀까지 맺히는 걸 보면 조금 안쓰럽기까지 하다.
뭐 그건 이쪽에서 어떻게 해줄 수 없는, 반장의 사정이고.
견하는 좀 더 중요한 문제로 생각을 돌렸다.
“올해도 내 책상 위에 앉는 건가.”
효윤을 올려다보지만, 정작 효윤은 부드러운 미소로 응수할 뿐이다. 저러면 내려가라고 떠밀 수도 없다.
그러고 보니, 작년에는 살결이 많이 드러나는 하복 차림으로 이 위에 앉아있었지.
지금은 동복이다. 맨발이던 다리도 정강이를 조금 넘는 높이까지 오는 양말을 신었고.
어깨가 보일락말락 하던 길이의 소매도 좋지만, 이렇게 정장 비슷한 느낌의 웃옷을 걸친 것도 좋다. 포근해 보이는 느낌이랄까.
“그보다, 주견하.”
양수영이 치마 주머니에 양손을 꽂은 채, 말을 꺼냈다.
견하는 표정으로만 의문을 보였다.
“제1고 뿐만 아니라 다른 학교에 있는 직원들도 요즘 좀…… 이상한 보고를 하고 있어.”
“이상한 보고?”
“그게…….”
이상한 보고의 내용이 어지간히도 이상한지, 수영은 평소와 다르게 꽤 주저했다. 꺼내기 어려운 내용이라 그런 것 같진 않고, 다른 망설임인데, 대체 뭘까?
견하는 고개를 갸웃하며 수영의 말을 기다렸다.
“와오! 선배!”
이 특징적인 환호와 호칭을 앞세우고 교실에 들어오는 사람은 단 한 명뿐이다.
“지나 너는 또 왜?”
“점심같이 먹자구요.”
그렇게 대뜸 말하고선 효윤과 루우, 수영을 향해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안녕. 지나 너도 2학년이 됐구나.”
루우는 웃으며 그렇게 맞이해준다. 지나는 볼을 조금 붉히며 웃었다.
“네. 이렇게 됐으니 저도 작년 선배만큼은 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죠.”
“우리는 다 같이 점심 먹을 생각인데, 너도 따라올래?”
효윤의 말에 지나도 눈을 빛낸다.
“그래도 돼요? 그럼 따라가야죠.”
“굳이 선배들 먹는 자리에 따라온다는 건, 역시 ‘일’에 관한 이야기를 하러 온 건가?”
견하의 물음에, 지나는 조금 얌전해진 어조로 대답했다.
“그렇죠 뭐. 별 용건 없이 선배를 찾아오면 혼나니까.”
지나의 살짝 토라진 듯한 대답에 효윤은 푸훗,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조금은 후배에게 너그러워지는 게 어떨까, 주견하.”
“항상 긴장이 필요한 일인데 너무 풀어지면 안 돼. 감찰국을 비롯한 정치경찰실이 단단히 자리 잡기 전까지는 더더욱.”
그렇게 단호하게 말하고서, 견하는 ‘어떤 내용이야’라고 물었다.
“아, 그게, 음…… 좀 이상한 소문이긴 한데, 한두 사람이 아니고, 1학년이나 2학년 사이에서 돌고 있어서 말이죠. 소문이라 하기에도 리얼리티가 좀 떨어진다고 해야 하나. ‘괴담’에 가까운 거라.”
거기까지 들었을 때, 양수영이 지나 쪽으로 고개를 확 돌렸다.
“그거, 지하철에서 나온다는 괴물체에 대한 거야?”
“어? 수영 선배도 그 이야기 하러 견하 선배한테 오신 거예요?”
두 사람의 반응을 보는 견하의 얼굴이 굳었다.
동시에 두 사람이 비슷한 종류의 소문을 가져온다면, 그 소문이 아무리 괴담이나 전설 같다고 해도 진지하게 들어야 한다. 아예 근원 자체가 없는 소문은 아닐 테니까.
“지하철?”
“응. 지하철로 통학하는 학생들이 꽤 있잖아. 그런 학생들이 승강장이나, 아니면 열차를 타고 다닐 때 어두운 터널 속에서 뭔가를 봤다는 거야.”
“하얀색에, 곰 정도 크기의 괴물이라고 하더라구요.”
이번에는 루우와 효윤의 표정도 굳었다.
견하는 일어섰다.
“자리를 옮기자. 이 이야기는 우리끼리만 나누는 게 좋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