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1)
리안은 오랜만에 고등학생 때 입던 체육복을 꺼냈다.
태사부 지하에 자리한 개인 운동실로 향한다.
거기엔 이미, 황제 루우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신하가 군주를 기다리게 하다니, 타이시가 그런 실수를 할 사람은 아닌데.”
리안은 루우의 그 농담에는 대답하지 않고, 천천히 몸을 풀었다. 그리고 늘 그랬듯이 목검을 집어 들었다. 태사의 환도와 비슷한 규격의 목검이다.
“오늘 주견하가 귀국한다면서? 마중 안 나가볼 거야?”
“……훈련부터 하고.”
“나라면 하루 정도는 걸렀을 것 같은데, 부지런하시군, 타이시.”
루우는 싱긋 웃더니 자세를 취한다.
“요즘 들어 더 열심인 것 같아.”
“글쎄.”
“주견하가 걱정돼서…… 의지만 할 수는 없으니까, 자신도 뭔가를 해야겠다, 그런 생각인가?”
리안은 순순히 수긍했다.
“황제가 그렇게 봤다면 그런 거겠지.”
그대로 예고도 없이, 기합 소리 한 번에 황제에게 달려든다. 황제는 손목과 팔을 움직이는 정도의 동작으로 태사를 멀리 밀어냈다. 사실 지금처럼 제대로 된 자세를 취할 필요도 없었다. 순전히 배움을 청한 태사에 대한 예의로 취한 자세다.
그 정도로, 일반인과 이단 사이에는 큰 격차가 있다.
물론 ‘다른 이단과 전투하느라 온 신경을 쏟는, 방심한 이단’을 일반인이 죽이는 건 가능하지만, 이런 식으로 정면에서 대결하면 승산이 없다.
“오늘 나랑 하는 훈련을 걸러도, 효윤이랑 계속하는 훈련도 있잖아?”
루우의 말대로였다. 애초에 효윤과 꾸준히 해오던 훈련이 있다. 고려에서 가장 엄중한 경호를 받는 사람이라 해도, 스스로를 지킬 수 있도록 늘 몸을 가다듬어야 한다는 게 미승휴의 가르침이었다. 리안도 그렇게 생각한다.
“요즘 책상 앞에 앉아있는 시간이 많아져서 말이야. 운동을 늘리지 않으면 이 몸매 유지 못 해.”
루우는 다시 한번 피식 웃었다. 리안의 말은 농담처럼 둘러댄 것이었지만, 사실이기도 했다. 리안은 중학생 같은 작은 체구긴 해도 몸이 단단하고 날렵하다. 운동신경도 준수한 편이다. 일정한 훈련 없이 그런 몸을 유지하긴 어렵다.
“단순히 주견하에게 잘 보이려는 건 아니지?”
“견하 뿐만 아니라 모두에게 잘 보여야지. 신문에 실리는 모습, 영화관에서 상영되는 모습까지. 게다가, 살찌면 업무 효율이 떨어져.”
내각의 수장인 태사로서의 업무, 제국최고회의의 의장으로서의 업무, 그 외 다른 업무들까지 모두 통괄하려면 체력이 강해야 한다. 체력이 약하면 일에 대한 의욕도, 판단력도 떨어지게 된다.
업무 효율의 하락은 곧 권력의 상실로 이어지는 지름길이다.
“타이시가 한 말, 모두 사실이겠지만 그게 전부는 아닐 거야. 털어놔 봐. 의외의 답을 찾을 수도 있잖아?”
리안은 루우의 말에 더 대꾸하지 않고 달려든다. 루우는 이번엔 멀리 밀어내지 않고, 합을 맞추듯 여러 번 공격을 받아준다.
그러면서 태사의 눈빛, 그 안에서 느껴지는 감정을 읽으려 한다. 루우와 리안 정도의 실력 차면, 리안의 공격 하나에 담긴 기분 정도야 대충은 느낄 수 있다.
집념, 혹은 집착.
“혹시 그런 생각을 하나? 일반인의 몸으로 이단을 공략할 방법을 찾아낼 수는 없을까, 하는?”
리안은 계속 대답하지 않았다.
“이단도 무적은 아니니 제대로 타격을 당하면 죽지. 이단의 능력이 따라잡지 못할 만큼 막대한 화력을 쏟아부으면 가능하겠지만, 일반인이 개인 차원에서 이단을 죽이는 건 요행을 바라는 수밖에 없어.”
그렇다. 리안도 느끼고 있다. 자신이 그때 이단 한 명의 머리를 날린 건, 루우의 말처럼 요행에 가깝다. 효윤의 옆에서 거든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때처럼, 빈틈을 만들어 이단의 숨통을 끊을 수는 없을까. 그게 혼자 힘으로 가능하다고 한다면, 거기에 이단을 공략하는 길이 있을 것이다.
그 길을, 찾아내야 한다.
“일반인이 이단과 대등하게, 이단 이상으로 싸울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자신도 이단이 되는 거야. 주견하처럼. 그런 건 생각해보지 않은 건가?”
“견하가 이단이 되기 전에 의식 없이 앓아누웠던 일이 있었지. 내가 그렇게 앓아누우면 그건 그대로 권력 공백이야.”
정식 출범 1년짜리 정권. 아직은 긴장의 끈을 놓아선 안 된다.
이단이 아닌 몸으로 이단을 이기려는 이유는 그뿐만이 아니다.
리안이 견하와 같은 과정을 거쳐 이단이 되기로 마음먹어도, 마음먹은 대로 이단이 된다는 보장이 없다.
“인위적 이단 양성에는 무수한 실패작들이 있었잖아? 나는 그런 실패 사례에 숫자 하나를 더하고 싶진 않아.”
루우는 끄덕였다. 태사의 말이 맞다. 태사가 며칠 의식불명이면 차라리 다행이다. 광증을 일으킨다거나 몸이 흉측하게 망가져 버리면, 그건 태사뿐만 아니라 정권에 속한 모두를 곤란에 빠뜨릴 것이다.
“하지만 태사가 지금까지 말한 건 ‘이단이 되지 않으려는 이유’지. ‘이단을 이길 방법을 찾아내려는 이유’는 아니야. 그러니까 말해 봐.”
왜 일반인의 몸으로 이단을 이기려 하는지.
리안은 다시 침묵한다. 루우는 고개를 갸웃했다.
리안이 훈련에 힘쓰는 건, 이단들 틈에서 짐이 되고 싶지 않아서, 여차할 때 자기 몸 정도는 지키기 위해서다.
하지만 루우가 자신의 몸 상태와 견하의 이상 징후에 대해 이야기해 준 후, 태사는 더욱 이렇게 스스로를 몰아붙이고 있다.
주견하의 힘이 되어주기 위해서, 견하가 위기에 처할 때를 대비해서, 하지만 견하에게 알리고 싶진 않기 때문에, 이렇게 입을 다물고 있는 걸까?
단순히 연인에게 말하기 부끄러워서 그런다고는 할 수 없을 것 같은데.
루우의 눈이 가늘어진다.
“태사 혹시, 주견하가 돌이킬 수 없는 지경이 되면 당신이 목숨을 끊어주려고 그러는 건 아니겠지?”
리안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설마. 연인도 아닌 황제가 끝까지 책임지겠다고 하는데, 내가 견하를 포기할 리가 없잖아?”
견하나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마음’을 포기할 수는 있지만…… 이라는 말은 속으로 삼킨다.
“황제도 짐작하고 있겠지만, 그냥 조급증 같은 거야. 견하도, 황제도 불안정 요소를 껴안고 있는 마당에, 나라도 뭔가 해봐야하지 않을까 하는, 그런 막연한 생각.”
루우는 자세를 풀었다. 대련은 그만하고 이야기를 하자는 뜻이었기에, 리안도 자세를 풀었다.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일반인이 이단과 정면으로 붙어서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지금은 거의 없어. 뭐 아주 멀리서 저격을 한다거나 하면 모를까. 그런 저격이 가능하다면 이미 ‘일반인’은 아니지.”
“그렇겠지.”
그 점은 리안이 직접 이단과 맞서 싸워봤기에 잘 안다.
“하지만 ‘이론’ 상으로는 가능할 수도 있어. 아무도 시도해보진 않았지만.”
“‘이론’?”
루우는 팔짱을 끼고 리안을 지그시 바라봤다. 이 상황, 작년 견하에게 이단에 대해 가르쳐주던 때와 비슷하다.
오늘 리안에게 할 이야기는, 그때 견하에게 했던 이야기와 대칭을 이룬다.
“퇴계 이황이 이단에 관한 모든 연구를 봉인해버렸기 때문에, 이쪽으로는 거의 관련이 없지만, 그래도 성리학의 거두라서 주목받은 학자가 있어.”
리안은 기억을 더듬는다. 분명 제2제국 역사를 배울 때 퇴계와 짝을 이루는 학자의 이름도 같이 배웠던 것 같은데…….
“……율곡 이이?”
“그래.”
루우는 리안에게서 목검을 받아 원래 있던 곳에 돌려놓는다. 그러면서 어떻게 이야기를 할 지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사단과 칠정을 ‘이’와 ‘기’로 딱 나눠서 설명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뭐, ‘이’를 드러내는 방식으로 사단을 갈고 닦고, 칠정을 억누른다, 이런 식으로 생각해 두자. 그런데 율곡의 생각은 조금 달랐어.”
“칠정, 희노애락애오욕, 인간의 감정도 인간의 자연스러운 모습이라고 봤지.”
루우는 리안이 그렇게 대답할 줄은 몰랐다는 듯이 눈을 조금 크게 떴다.
“맞아. 간단하게 말하자면, 칠정이나 ‘기’ 역시 사단이나 ‘이’ 만큼 중요하다는 거야. 잘 알고 있네?”
“기갑사 관련 자료들을 입수하고 나서 이것저것 좀 살펴봤거든. 기갑사는 탑승한 이단의 ‘이’가 붕괴하는 걸 막기 위해, 대신 ‘칠정’을 마모시키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그렇게 적혀 있던데. 이 기갑사의 기초 이론…… 퇴계에게서 나온 게 아니라 율곡의 이론을 응용한 거잖아.”
“거기까지 알고 있다면 이야기는 빠르지. 지금 태사가 그렇듯이 많은 연구자들이, ‘일반인도 이단의 경지에 이를 수는 없나’에 대해 고민했어. 그 고민도 이단의 인위적 양성에 대한 연구의 한 갈래라 봐도 될 거야.”
새로운 이단을 만들어낼 것인가. 아니면 일반인을 이단 수준으로 훈련시킬 것인가.
둘 중 후자에 집중한 연구자들은, 칠정과 ‘기’를 통해 ‘이’를 다시 보는 율곡의 방식에 주목했다.
즉, 칠정의 방향에서 이단이 ‘이’를 변용하는 경지로 접근할 수는 없는가, 하는 것이다.
만약 이게 가능하다면, 전혀 다른 방향에서 이단과 같은 초능력을 구사할 수 있게 된다.
“뭐, ‘마음을 다해 검을 휘두르라’ 같은 이야기인가.”
“옛날 협객 소설 같은 이야기지만, 대략적으로는 그런 이야기지.”
하지만 일이 그렇게 쉽게만 풀린다면 온 세상이 이단 혹은 이단 같은 고수들로 가득 찼을 것이다.
“그런 애매모호한 정신론으로는 어림도 없는 이야기야.”
“맞아. 개인적으로 무예를 수련하는 사람들에게는 어느 정도 쓸모가 있을지 모르지만, 이단에 관한 연구는 기본적으로 ‘군사적 효용성’을 따지는 거라 ‘체계적으로, 대량으로 양성’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하지만 말이지, 하며 루우는 웃었다.
“다시 한번 더 반대로 생각해보는 거야. 칠정을 발현해, 즉 마음을 다해 검을 휘두르는 게 아니라, 기갑사의 원리를 적용해보자고.”
“마음을 버리는 방식으로?”
“칼 밖에 휘두를 줄 모르는 짐승이 되는 거지.”
깊이 들어가면 짐승과 인긴이 과연 마음의 측면에서 차이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도 있지만 그건 넘어가자. 루우가 그렇게 말하는 걸 리안은 흘려들었다.
대신 다른 생각에 빠져든다.
-마음을 버리고, 칼만 휘두르는 짐승이 된다?
그래도 역시 정신론에 불과하다. 어떤 동물적인 감각 같은 게 깨어나서 무시무시한 능력을 발휘하게 해주지 않을까 싶기도 하지만, 지금으로선 상상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
리안은 고개를 흔들곤 출입구 쪽으로 몸을 돌렸다.
효윤이 와 있었다.
“주견하가, 방금 귀국했다고 해서요.”
“……그런가. 왔나.”
짧게 답하고 나가는 리안의 뒷모습을, 효윤은 의아한 눈으로 응시했다.
루우는 운동실 안에 좀 더 남아서,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보며 머리칼을 매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