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돈획책(19)
카라코룸에 시찰을 나가겠다는 선언과는 별개로, 시레문은 칸발리크에서 일어나는 시위에 대해 볼로드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칸발리크의 시위 구호는 짐이 전에는 듣지 못했던 것들인데…….”
첫째는 관세동맹의 체결을 반대하는 시위다.
이 시위에는 그리 큰 의미가 없다. 아시아 대륙 한가운데에서 여러 나라와 국경을 접한 몽골은 무역으로 경제를 크게 성장시킨 나라다. 관세동맹은 이런 무역을 더욱 활성화할 수 있어서 지지하는 여론이 더 크다.
그런데 이런 구호가 그다음 단계로 발전하는 듯한 양상을 보이는 게, 시레문이 의문을 품고 있는 부분이다.
관세동맹은 지금 고려의 황제로 옹립된 카간의 딸, 루우 테무르를 위한 것이라는 구호로 변해갔다. 이것이 두 번째 시위다.
이 시위는 루우 테무르가 몽골식 이름이 아니라, 고려식 이름인 왕서라로 공식 석상에 선다는 점도 문제 삼고 있다.
루우 테무르가 즉위 이후 고려의 황제로서 고려인이라는 정체성을 강조한 것도, 그런 문제 제기에 어느 정도 영향을 끼친 듯하다.
시위의 구호는 그 뒤로 점차 격해졌다.
-시레문 카간은 자기 딸인 고려 황제에게 황위를 물려줄 심산이다.
-그렇게 되면 몽골은 고려에 합병당한다. 관세동맹도 그런 합병 시도의 일환이다.
-사사로운 부성애 때문에 나라를 팔아먹는 황실을 이대로 둬서야 되겠는가.
-제정을 폐지하자. 황실을 폐지하자.
-공화정을 수립하자.
시위 구호가 격해지는 것과는 별개로, 규모가 그다지 크지 않은 게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어쨌든 시민 대부분은 그 구호에 동조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구호 자체로 앞뒤가 안 맞는 말이 많았으니까.
시레문은 두 동생, 울제이와 게레센제의 존재 때문에 루우에게 황위를 물려줄 수 있을지 여부는 불투명하다.
합병이 그렇게 쉽게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다. 몽골식 입헌군주제가 다른 입헌군주제에 비해 군주의 권한이 크다고는 하지만, 어쨌든 입헌군주제는 입헌군주제다. 군주가 상징성의 영역에 한 발을 걸치고 있는 상태다.
그렇다면 루우가 설령 카간의 자리를 계승한다 해도, 두 나라는 별개의 나라로 계속 유지될 가능성이 크다.
그 밖에도, 대부분의 몽골인에게 공화정은 낯선 체제다. 세계대전에서 항전을 이끈 황실이라는 입장은 고려와 몽골이 비슷하기에, 국민들의 지지도 높은 편이다. 갑자기 황실을 폐지하고 공화정을 수립하라는 구호가 호소력이 있을 리 없다.
그렇지만 시레문은 신경이 쓰였다.
“타이시, 하나 묻겠네.”
“예, 폐하.”
“고려의 안세규와 협의해서, 루우 테무르를 고려에 보내기로 한 사람으로서, 그 구호들을 어떻게 생각하나.”
사사로운 부성애로, 고려의 황제가 된 딸에게 카간 자리를 물려주려는 시레문…… 이라는 구호.
“짐은 아직도 자네가 그렇게 강권한 이유를 알지 못하네. 아니 그 전에, 자네가 그렇게 자기 의견을 강하게 내세운 적이 거의 없지 않나.”
볼로드는 오래 망설이지 않았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제가 꼭 폐하께 책임을 떠넘기는 것처럼 들리겠습니다만, 솔직하게 아뢰겠습니다. 저는 폐하께서 마음으로 반대하시는 일은 하지 않았습니다.”
시레문은 무표정을 유지한 채, 되물었다.
“짐이 내심 원했기 때문이라는 건가?”
“저는 폐하의 마음을 그렇게 읽었습니다. 폐하께서 어떤 식으로든, 현 고려의 황제 폐하를 후계자로 삼고 싶어 하신다고. 오히려 제가…… 폐하의 의중을 여쭙고 싶습니다.”
“짐은 아직 결정하지 않았어. 짐도 결정하지 못한 것을 그대가 어찌 안단 말인가?”
“그렇다면 어째서 지금 병상에 누워 계신 카툰(皇后)을 폐위하고 새로운 카툰을 세우지 않으시는 겁니까?”
아들을 낳아 새로운 후계자를 만들고 싶다면, 그렇게 해야 하지 않았는가 하는 물음이었다. 시레문은 다음 말을 내놓지 못했다. 볼로드의 질문만이 계속 이어졌다.
“지난번에 폐하께선 게레센제 칸과 울제이 칸의 독립을 염려하셨지요. 두 분을 후계자 후보에 올려두기라도 하셨다면 그런 말씀을 하지 않으셨을 겁니다. 그 후의 일은 다음 카간의 몫이니까요. 폐하는 두 분 칸을 임시 관리자 정도로만 생각하고 계십니다.”
볼로드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이상이 제가, 폐하께서 고려 황제 폐하를 후계자로 여기신다 생각한 이유입니다.”
시레문은 계속 말을 하지 않았다.
그도 혼란스러웠으니까.
볼로드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자신은 내심 루우 테무르를 후계자로 여기고 있을지도.
그러나 왜, 라는 의문은 해소되지 않는다.
정말로 사사로운 부성애 때문인가?
아니면 그런 이단으로 만들고, 그 아이의 어머니를 저렇게 만든 죄책감 때문에?
그것도 아니라면, 자신의 다음 대에는 고려를 통합하고자 하는 야망 때문인가?
갈피를 잡지 못하고 간신히, 이런 명령만을 내린다.
“칸발리크에서 일어나는 시위는 강제 해산하게. 사망자만 나오지 않는다면 상당히 강경하게 진압해도 상관없네. 카라코룸 쪽은…… 아까 말했던 것처럼 직접 살펴보고 결정하지.”
***
집무실을 나온 시레문이 곧장 향한 곳은, 비행장이 아니었다.
비행선을 타러 가기 전에, 시레문은 들러야 할 곳이 있었다. 들러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칸발리크의 황궁에서도 가장 깊숙한 곳. 그곳에 있는 거대한 방.
궁인들보다 의사들이 더 많고, 가구보다 각종 의료기기가 더 많은 방이었다.
그 방 한가운데엔 하얗고 깨끗한 침대가 놓여 있다. 아니, 방 전체가 하얗고 깨끗하다. 이 방의 주인을 위한 조치다.
침대 위에는, 한 여인이 누워 있다. 잠을 자는 것처럼.
루우의 어머니이자, 시레문의 아내인 여자.
근육이 굳거나 피부병이 나지 않도록 궁인들에게 하루에도 몇 번씩 움직여줄 것을 명령해뒀지만, 비쩍 마른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몇 번이고 보는 모습이지만, 씁쓸함과 슬픔은 늘 새롭게 시레문의 마음속에서 교차한다.
시레문은 침대 옆에 앉았다.
아내. 혹은 그가 애국이라는 이름으로 이용한 여자.
그런 여자의 손을 잡았다.
“듣고 있는지 모르겠소.”
속삭이듯이, 낮은 목소리로 카간은 말을 걸었다.
“전에는 우리 딸, 루우 테무르가 고려의 황제가 됐다고 했지.”
시레문은 여자의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오래지 않아 시선을 떨궜다.
“나는 그 애가 타고난 용의 힘을 이름에 넣고자 했소. 그래서 ‘루우’라는 이름을 붙였지. 당신은…… 그 애가 사내처럼 튼튼하고 당당하게 살길 원해서 ‘테무르’라는 이름을 꼭 넣자고 했었고.
고려식 이름도 하나 지어야 한다고 고집했지. 덕분에 루우 테무르는 조금 이상한 이름들을 갖게 됐지만…… 당신이 옳았소. 그 애는 우리가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잘해나가고 있소.”
카간은 이번엔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봤다. 천장에는 황궁의 장식들이 남아 있지만, 병실 같은 하얀 벽과는 잘 어울리지 않는다.
“모르겠군. 내가 당신을 사랑해서 놓아주지 않는 것인지. 아니면 죄책감 때문에 놓아주지 않는 것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아직 이용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서 그런 건지.”
낭만과 집착의 경계 위에 서 있는 것인지. 아니면 도덕적 책임감 때문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지극히 비열한 한 명의 군주인 것인지. 시레문의 생각은 결론에 닿지 못했다.
“전쟁 통에 군주가 되어서, 좋은 군주가 되어보겠다고 이리저리 뛰어봤소만, 그 덕에 정작 내가 어떤 사람인지도 분간을 못 하게 됐구려.”
그리고 그것은…… 루우를 대하는 태도로도 이어졌다.
“내가 그 아이를 이용하고 싶은 건지, 사랑하는 것인지, 미안해하는 것인지, 그것도 도저히 모르겠소.”
카간 자리를 물려주고 싶은 건지 아니면 물려줘서 일어날 상황을 원하는 건지…… 그것도 도저히 모르겠다.
시레문은 한참을 말없이, 그렇게 아내의 손을 쥐고만 있었다.
한참, 이었다.
떠나야 할 시간이 오고 있었다.
“가보겠소. 또 오리다.”
카간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그리고 카간에겐 북방 영토에서 기다리는 백성들이 있었다.
***
카간의 비행선이 먼 남쪽에서 다가온다.
카라코룸을 향해, 똑바로.
토칸은 비행선을 보며 증오를 느꼈다.
그 증오가 정말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인지, 아니면 범 알타이 인민동맹이라는 자신의 조직이 불어넣은 교육에 의한 것인지는 딱히 구분 지으려 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증오를 느끼고 있다는 사실 하나다.
다가오면서 점점 커지던 비행선은 토칸과 동지들의 머리 위를 지나, 카라코룸 쪽으로 날아갔다.
작년의 어떤 날처럼, 토칸은 말 위에 탄 채 그 모습을 바라봤다.
비행선은 카라코룸 상공으로 날아가, 도시 위를 계속 빙빙 돌았다.
“저 안에서 대체 뭘 하고 있을까요, 대장.”
“글쎄. 우리가 여러모로 카간의 신경을 갉아 먹을만한 짓을 했으니, 그걸 살피고 있지 않을까.”
하늘 위에서.
지상의 천한 자들을 굽어살핀다는 느낌으로.
“혁명은 언제쯤 시작하는 겁니까.”
“곧. 정말로 얼마 안 남았어. 마음 단단히 먹어둬라.”
부하들을 긴장시키려고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토칸도 확신은 없었다.
혁명을 준비하라는 지령은 받았지만, 얼마만큼이나 준비해야 하는지, 결행의 때는 언제 무르익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최근엔 출처 불명의 자금이나 무기가 꽤 많이 들어온다. 상부에서 든든한 후원자라도 얻은 모양이다.
하지만 이렇게 준비만 하고 있을 순 없다. 긴장을 유지하는 데에도 한계가 있다. 오지 않는 그 날을 마냥 기다리고만 있다가, 희망을 접어버리는 부하가 나타날 수도 있다.
토칸은 턱에 힘을 줬다.
어떻게든, 혁명의 때를 앞당길 수 있다면 좋겠는데.
그렇게 생각하며 비행선을 바라보고 있는데, 뭔가가 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모든 영감이 그러하듯, 정말 갑자기 떠오른 생각이었다.
“고려 황제나 태사는, 주로 기차를 이용한다지.”
“저번에 고려 황제가 칸발리크를 방문했을 때도 기차를 탔었죠.”
“하지만 카간은 비행선을 애용해. 그렇지 않나?”
“그러게나 말입니다. 카라코룸과 칸발리크 간 직행 노선도 뚫려 있는데, 이상하게 기차는 이용하질 않죠.”
좋다. 답은 여기에 있다.
토칸은 떠오른 영감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혁명의 그 날을 앞당길 공작은, 아주 은밀하고, 조심스럽게 행해져야 하니까.
***
견하는 본국의 귀국 명령이 적힌 전보를 받았다.
“예상했던 대로야. 태사께서도 더 얻을 게 없다고 판단하신 거겠지. 신수덕을 죽일 가망도 없고.”
“그래도 아즈텍 현지에서 느낀 분위기는 중요한 정보야. 본국에 앉아만 있어서는 알 수 없는 걸 많이 알게 됐어.”
재연의 말에 견하도 동의했다.
그도 이번에 배운 게 많았다. 세상은 넓고, 문제를 받아들이는 방식과 풀어가는 방식은 다양하다는 것을. 자신이 갖고 있던 기준만으로 세상을 측량하려 해서는 안 되며, 세상 어딘가에는 미처 생각하지 못한 제약이 많다는 것을.
조금, 성장한 느낌이다. 귀국하면 감찰국을 더 효율적으로 굴려볼 수 있을 것 같다.
“갈 준비하자. 고려로 돌아가도 할 일이 많이 있어. 서두르는 게 좋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