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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소녀는 대원수가 되었다-129화 (129/541)

혼돈획책(16)

그다음 날부터 고려의 재무장관과 그 수행원들은 숙소를 옮겨 다녔다. 정보가 새어나가는 걸 방지하기 위해 장소는 그날그날 즉흥적으로 정해졌다.

일행이 타고 다닐 차량의 검사도 한층 더 엄격하게 이뤄졌다. 폭탄이 설치되는 걸 막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일행은 아즈텍 재무장관의 관저, 외무성 청사를 거쳐, 고려 대사관으로 이동했다.

그렇게 옮겨 다니면서, 견하와 재연은 좀 더 확실하게 아즈텍의 현 상황을 관찰할 수 있었다.

아즈텍의 수도, 쿠아우테목에서 일어나는 시위는 날이 갈수록 격해지고만 있다는 사실을.

세계 경제 대공황은 아즈텍에서도 사람들의 삶을 파괴했다.

삶이 파괴된 사람들은 거리로 나와 시위대에 합류했다. 각국 정부에서 뚜렷한 정책을 내놓지 못하고, 공황이 깊어져만 가는 동안 실업자는 계속 증가하고 있다. 그것이 시위가 점점 더 격해져 가는 근본적인 원인이다.

“시위 구호가 특히 의미심장해.”

재연은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 앉았다. 견하도 그가 말하는 게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가난한 사람들이 더 가난해지는 동안, 부자들은 더 부유해진다’였지…….”

“공산주의자나 사회주의자들의 선동이 느껴지는 문구지.”

“문제는…… 그게 딱히 틀린 이야기도 아니라는 거야.”

고려도 이런 문제를 안고 있긴 했다. 하지만 고려 제3제국은, 소 뒷걸음질로 쥐 잡은 꼴이어도 내전을 통해 이런 모순을 해소했다. 허동주가 기업가들의 편에 선 반면, 리안은 노동자들의 권익을 약속하면서 그들의 협력을 이끌어내는 길을 택했다.

내전은 리안의 승리로 돌아갔고, 리안은 승자의 권리로 거리낌 없이 개혁에 착수할 수 있었다.

경제구조에 대수술이 가해졌고, 이는 고려가 대공황을 어느 정도는 버텨내는 원동력이 됐다.

여기에 몽골, 키타이, 낭키아스가 함께하는 관세동맹이 작동을 시작한다면, 분명 대공황을 극복할 수 있으리라는 전망도 있다.

“하지만 아즈텍은, 개혁의 필요성을 느낄 기회가 없었지.”

견하가 쓰게 중얼거린다. 재연도 그런 견하의 얼굴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견하가 왜 저렇게 씁쓸해하는지 이유를 알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어제 우연히 대화 자리를 마련할 수 있었던 아즈텍 관료를 떠올려본다.

***

“선동에 넘어간 민중의 의견은 비합리적입니다. 전혀 귀담아들을 필요가 없어요.”

그 관료는 완고한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선동에 넘어간 민중이 분노해서 저렇게 거리로 쏟아져 나온 건 ‘현실’인데요. 민중의 우매함만 탓하면서 현실을 무시할 수는 없지 않을까요.”

아즈텍 관료는 재연의 지적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완고한 얼굴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이런 대답만 되풀이할 뿐이었다.

“불법 단체의 선동에 넘어간 자들은 공권력으로 진압할 뿐입니다.”

차무룡은 이미 아즈텍이 스스로 개혁할 거라는 희망을 버린 건지, 전혀 설득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새 재무장관은 고려 제국이 벌이는 사업에 손해를 끼치지 않는 선에서 아즈텍과의 협상을 마무리 지었다.

그래서 차무룡은 한 발짝 물러나 견하와 재연이 마음껏 그 관료와 대화를 나누도록 해주었다. 견하와 재연은 내전을 겪은 경험을 토대로 조언을 할 겸, 아즈텍 정부 관리의 인식을 살펴볼 겸, 대화를 나누기로 했다.

“안심하십시오. 고려의 우방인 아즈텍이 하루아침에 공산국가가 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우리는 지난 테러 이후 사방에 감시망을 펼쳤고, 국가의 안정을 해치는 그 어떠한 시도도 미리 분쇄할 수 있도록 충분한 대책을 세워두고 있습니다.”

견하와 재연은 그 말을 들으며 마주 봤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에서 똑같은 감정을 읽을 수 있었다.

어이없음을.

이 관료는 그냥 힘으로 시위를 진압하면, 그래서 시위대가 흩어지면 그걸로 모든 게 정상화될 수 있다고 믿는 건가?

시위대에 구호를 전하고, 이론을 가르치고, 새로운 전술을 준비하는 배후의 조직은 생각하지 않는 건가? 그런 조직이 완전히 지하화해서 손 닿지 않는 곳으로 가버리면, 그때는 모든 대책이 무의미해진다는 것도 모르는 건가?

견하는 그렇게 말하며, 그래도 우방국의 우호적 정권을 위한 조언을 남겨주려 노력했다.

“우리 고려에는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 든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내 눈에 보이지 않게 한다고 해서 하늘이 없어지는 건 아닙니다. 사람들을 가난하게 만드는 대공황은 여전히 꿈틀대고, 그런 사람들의 불만은 켜켜이 쌓여만 가고 있어요.

이런 현실을 인정하고, 그 현실을 완화하기 위한 대책을 세우는 게, 공산혁명을 방지하는 가장 현명한 방법입니다.”

견하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무굴 제국이 어떻게 무너졌는지 잊지 마라’고 말했다.

그 말에 대한 관료의 대답이 걸작이었다.

“무굴 제국은 민중의 불만이 아직 작을 때 진압하여 국가의 권위를 세우지 못했기 때문에 멸망한 겁니다.”

견하는 대화를 포기했다.

***

소파에 앉은 채로, 견하는 그 답답한 대화를 곱씹어봤다.

“경험의 차이라고 할 수 있겠지. 내전을 겪어 본 우리는 그 관료보다 나이는 어리지만, 경험 면에서는 훨씬 앞서 있어. 경험해보지 못한 것이니 이해하기도 힘들겠지.”

그런 면에서 보면, 경험의 차이란 상상력의 차이이기도 하다. 아즈텍의 관료들은 정부에 대한 불만이 어떤 방향으로 굴러가는지, 그런 불만을 이용하는 조직들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전혀 상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직접 겪어보고, 그래서 상상하게 하는 수밖에 없나.”

“우리야 황제 폐하가 있었고, 견하 네가 있었으니까 상황을 수습할 수 있었지. 하지만 아즈텍에는……”

“그런 게 전혀 없지. 경험을 살릴 기회도 못 얻고 그대로 무너져버릴 가능성도 있어.”

아즈텍 정부 전체를 그 관료와 같은 사고가 지배하고 있다면, 사실 그다지 지원할 가치가 없는 정부다.

당장 대공황으로 인해 눈앞에 닥친 빈부의 문제를 해결할 능력은커녕, 수백 년 동안 쌓여 온 다민족 사회의 갈등을 해결할 능력도 없다.

“그렇다고 지원을 안 할 수도 없어.”

공산혁명으로 현 아즈텍 정권이 무너지고 공산 아즈텍이 들어서면, 고려를 비롯한 동아시아 각국은 태평양과 인도양 사이에서 동서로 포위당하는 처지에 놓인다.

그러니까 그런 상황이 일어나는 것 자체는 막아야 한다.

“하지만 지원해줘봤자 이 무능력한 상태를 조금 더 연장하는 것에 불과하다면, 지원도 의미가 없지 않을까.”

재연의 말이 맞다.

아즈텍의 현 정권이 고려의 지원을 받아 살아남으면서, 거기서 교훈을 얻는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결말일 것이다. 하지만 살아남기만 하고 교훈은 아무것도 못 얻는다면? ‘역시 우리가 옳았어’라며 현 상태를 유지하기로 한다면?

기껏 도와줘봤자, 언젠가 다시 터질 갈등을 수년에서 수십 년 유예한 것에 불과하다. 이것은 근본적인 해결이 아니다.

그래서 견하도 다른 대안을 찾아봤지만…….

“저렇게까지 적개심을 불태우고 있으니 이쪽도 별다른 방법이 없어.”

철혈의 꽃이 보낸 답은 암살자였다. 그렇게 명확하게 ‘당신들하고는 협상 안 해’라는 메시지를 받았기에, 물밑 협상을 시도할 여지도 없다.

그런 자들이 아즈텍의 신정부가 된다면, 공산 정권이 들어서는 것보다 조금 나을 뿐, 고려에는 전혀 이익이 되지 않는다.

“지원하기도 그렇고, 해도 효과를 기대하기도 어렵고, 그런데 하지 않을 수는 없다. 완전히 딜레마야.”

“그런 딜레마를 우리 선에서 해결할 수는 없을 것 같아. 태사 각하께 보고하는 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겠지.”

보고하고, 내각에서든 제국최고회의에서든 논의를 거쳐 결론을 내주길 바라는 수밖에.

하지만 견하는 고개를 갸웃한다.

“정말 그럴까?”

“……또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우리 선에서 조직에 궤멸적 타격을 입힌다, 는 방식은 어때?”

“너랑 내가?”

“조직 거점 몇 개 정도 두들겨서 타격을 입히는 수준이겠지만, 지하조직이라면 그것도 꽤 큰 손해야. 밖에서 잘 흔들면 내부에서 알아서 무너지게 할 수도 있어. 인원이 부족하면 고려에 증원을 요청해도 되고.”

그리고 아마, 견하의 권한으로 지금 아즈텍에 파견 나온 신수덕 암살조가 협력하도록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재연은 한숨을 푹 쉬며, 고개를 저었다.

“나는 반대야. 바람직하지 않은 방법이야.”

“‘바람직하지 않다’는 게 무슨 뜻이야?”

“지금 아즈텍에는 크게 세 세력이 있다고 보면 돼. 현 아즈텍 정부, 공산주의자들, 극우 민족주의자들. 내전 직전의 우리 고려 같지.

그런데 여기서…… 아즈텍 정부가 자기네들 말대로 공산주의 세력을 때려잡는 데 성공한다고 가정해보자. 이 공산주의자들을 지지해주던 사람들은 그러면 얌전해질까?”

견하가 답을 내놓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전혀 그렇지 않겠지.”

“그래. 그 사람들은, 파시스트들을 지지하는 쪽으로 옮겨갈 거야.”

이유는 여러 가지다. 더 강한 세력에 빌붙어서 이익을 얻고 싶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은, ‘변화를 일으킬 강한 힘’을 바라기 때문에 그렇게 행동한다.

그리고 자신들이 느끼는 ‘분노’, 그것을 함께할 수 있는 공동체라면 어디든 상관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민중은 사회주의 이론을 깊이 이해해서, 그 이상에 공감해서 지지하는 게 아니야. 적어도 ‘지금처럼 최악인 상황보다는 나은 다른 상황’을 만들어 줄 거라는 기대 때문에 지지하는 거지. 그리고 그 기대를 실현해 줄 힘이 있다고 믿으니까. 하지만 그게 다른 ‘힘’으로 인해 분쇄된다면?”

“그 ‘힘’ 쪽으로 가겠지. 그 힘이야말로 상황을 바꿀 힘이니까.”

“그래. 그런데 현 아즈텍 정부는 상황을 개선할 의지가 없어. 그렇다면 공산주의를 지지하던 사람들은 자연히, 극우 민족주의로 옮겨갈 거야.”

그래서 두 세력은 서로를 죽일 듯 싫어하면서도, 내세우는 약속은 쌍둥이처럼 닮는다. 민중에게 자신들이야말로 현실을 바꿀 힘이 있다고 설득해야 하니까.

“반대의 경우라면, 극우 민족주의를 지지하던 사람이 공산주의 쪽으로 옮겨가겠군. 상황을 바꿔 줄 ‘힘’을 찾아서.”

사람은 그렇게 힘을, 권력을 신처럼 숭배한다.

다만 신앙을 지키기 위해 목숨까지 바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대부분은 자신이 믿던 신이 그렇게 강하지 않다는 걸 깨달았을 때, 더욱 강력한 신앙 쪽으로 ‘개종’을 선택한다.

바로 이 자리에 있는 한재연이, 허동주라는 신을 부정하고 새로운 신앙을 찾아 나선 사람이다.

“현 아즈텍 정부가 상황을 유지하는 건, 변화를 바라는 세력이 이렇게 둘로 나뉘어 있기 때문이야.

하지만 둘 중 하나가 사라지고, 다른 하나가 그 세력을 흡수하면, 균형은 무너져. 현 정부가 적극적으로 변화를 시도한다면 애초에 이런 상황까지 오지도 않았겠지만.”

그리고 아즈텍 연방은 혁명을 통해 비인간적인 제정, 그 제정의 하수인인 종교까지 무너뜨리고 성립된 나라다.

그 후의 체제는 이제 낡은 것이 됐고, 모순은 수백 년 동안 쌓였다. 아즈텍의 국민은 이 상황에서 또 다른 혁명을 충분히 시도해 볼 수 있는 사람들이다.

“그렇게 되면 공산혁명의 소용돌이야. 안타깝게도 현 정부에 그걸 막을 역량은 없어 보여.”

재연은 그렇게 단언했다.

견하는 피곤하다는 듯 미간을 문지르며 말했다.

“다시 원점이네. 역시 암살조의 보고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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