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리고 소녀는 대원수가 되었다-128화 (128/541)

혼돈획책(15)

괴한들은 눈앞에 갑자기 나타난 소년의 모습에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소년은 아까부터 그 자리에 서 있었다는 듯이 자연스레 서서 괴한들을 둘러본다.

곧이어 다른 동작 없이 팔만 휘둘러 한 괴한의 총 앞부분을 잘라냈다.

작년, 비슷한 사건이 일어났을 때 가구 뒤로 숨었던 견하는 이제 없다.

두려움도 분노도 없는 눈으로, 적을 바라보는 고려 제국의 감찰국장이 있을 뿐이다.

기괴한 하얀 검이 그대로 괴한의 가랑이부터 정수리까지 긋고 지나간다. 두 동강이 난 시체는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역겹고도 깔끔한 단면이 드러났다.

괴한들은 견하를 겨냥한다. 곧바로 집중 사격이 쏟아진다. 동시에 견하의 검 일부가 흩어져 다시 촉수로 돌아가 탄환을 막는다. 견하가 신경 쓸 것도 없이 자동방어체계가 작동한다.

그 틈에, 견하는 적을 관찰했다.

-옥상에서 로프를 타고 내려와, 창문을 깨고 들어온 건가.

괴한의 수는 계속 늘어났다.

스무 명. 재무장관이 쓰는 방이 넓긴 하지만 건장한 암살자 스무 명이 들어오기엔 다소 좁은데.

이번 암살도 확실히 성공시키기로 작정을 한 건가.

견하가 바닥을 가볍게 찬 순간, 괴한들의 눈앞에는 검을 휘두를 자세를 취하는 소년의 모습이 나타났다.

손으로 방바닥의 먼지를 쓸어 담듯이 가볍게 슥 휘두르는 손길.

그대로 괴한 다섯의 목숨이 날아간다.

적을 베면서 견하는 생각했다. 쉽다는 느낌보다는, ‘이단 전력은 이번에 참여하지 않았나?’라는 의문이 먼저 든다.

이단은 막강하다. 고된 훈련을 받은 병사를 허수아비처럼 꺾어버릴 수 있는 게 이단이다.

그리고 그만큼 귀하다. 철혈의 꽃이 그렇게 큰 규모의 조직이 아니라면 더더욱.

아마 여기에 견하가 왔다는 소식 정도는 들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조직의 귀한 이단을 배치해서 이길지 어떨지 모르는 싸움에 보낼 수는 없다고 본 게 아닐까.

그 대신 일반 병사를 이렇게 스무 명씩이나 보내, 기습을 통해 암살을 성공시켜보려는 심산이었을 수 있다.

물론 이들의 목숨도 아깝긴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군말 없이 사지로 떠나줄 정도로 충성스러운 조직원은 흔치 않다.

그렇다면 이런 결론이 나온다.

고려의 재무장관 차무룡을 암살하는 작전은, 이단의 희생을 감당할 만큼 급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병사 스무 명의 희생은 감당할 만큼 절실하다.

-다행이군.

이단을 상대하는 전투에 몇 번 참가해 본 경험도 있고, 루우에게 훈련도 받아서 예전보다는 훨씬 실력이 늘었지만, 그래도 견하는 아직 미숙하다.

일반인을 상대로 하면 괴물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같은 이단을 상대로, ‘검’만으로 대결하려 들면 이기기 어렵다. 같은 이단이라면, 훈련받은 군인과 고등학생의 역량 차이가 승패를 가른다.

촉수 수십에서 수백 가닥을 뻗어내는 변칙적인 전투 방식으로 밀어붙일 수 있을 뿐. 그것도 효윤이나 루우 같은 상대라면 금세 패턴을 간파당하고 반격당하겠지.

어쨌든 상대편에 이단이 없다는 걸 확인한 견하는, 미소지었다.

안심하고 ‘작업’에 들어가기로 한다.

찌르고, 베고, 꿰뚫고, 던지고, 후려치고, 짓뭉개고, 찢고, 후벼파는 해체 작업을.

성대가 찢어져라 비명이 울리고, 피가 절제를 모르고 벽과 천장에 치솟는다.

견하의 살육 덕분에 여유가 생긴 경호원들과 아즈텍 군인들이 사격을 시작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더 많은 군인들이 방으로 들어와 차무룡을 경호했다.

덕분에 제압은 금방 끝났다.

살육이 끝났을 때, 견하의 눈앞에는 스무 명 중 딱 하나만 살아있었다. 기절한 상태였다. 이 사람에게 필요한 나머지 조치는 여기 경호원들과 군인들이 할 것이다.

견하는 그 결과만 들으면 된다.

돌아보자, 반쯤은 경악해서, 반쯤은 겁에 질려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의 얼굴이 보였다.

나쁘지 않다. 견하는 자신이 다른 이들에게 준 공포감을 그렇게 평가했다. 공포감은 곧 영향력이다. 고려의 관료에게, 그리고 아즈텍의 관료와 군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다면, 앞으로 뭔가를 얻어낼 때 상당히 편해질 터.

견하는 그대로 자신의 접대를 맡은 아즈텍군 대령에게 걸어가 말했다.

“하던 이야기, 마저 해보죠. 일단 다들 숙소를 옮겨야겠지만.”

***

이른바 ‘안전가옥’으로 옮겨 간 후에, 견하는 아즈텍 측 대령에게 몇 가지 질문을 더 던져봤다. 하지만 만족할만한 정보는 거의 얻지 못했다.

아즈텍 대령은 ‘아즈텍 정부에 손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한정된 정보만을 제공’하라는 명령을 받고 온 게 분명했다.

습격을 받기 전에 대령은 철혈의 꽃이 여러 유사 집단 중 하나일 뿐이며, 지난번 테러는 비극적 사고였다는 식으로 얼버무리려 노력했다.

게다가 습격 이후 대령은 실상이 상부의 명령과 다른 점에 충격이라도 먹었는지, 멍한 눈길로 아까 했던 말을 반복할 뿐이었다.

이래서는 충격을 받은 틈을 타서 다른 정보를 슬쩍 캐내기도 어렵다고, 견하는 판단했다.

그는 대령을 돌려보냈다. 차라리 그 시간에, 지금 주어진 정보를 토대로 재연과 의견을 나누는 편이 나았다.

“접대용, 혹은 홍보용 군인이었던 것 같아. 사격 훈련 정도는 받았겠지만, 고급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인간은 아니야.”

견하가 쓰게 중얼거리자 재연도 동의한다는 듯 말을 받았다.

“오히려 견하 너한테 중요한 정보를 감추려고 파견된 듯 보였어.”

“대놓고 감출 수는 없으니, 노출되어도 상관없는 정보를 제공하는 식으로 말이지. 그러면 저 인간은 그냥 미끼겠군.”

견하는 잠깐 입을 다물었다. 그의 시선은 방금 대령과 통역이 나간 문을 향해 있었다.

그러다 눈길을 재연 쪽으로 돌리고, 다시 입을 열었다.

“일단 확실한 사실들만 정리해보자.”

“우리가 비공개로 여기 온 건 아니지만, 위치를 구체적으로 알려면 관계자들에게서 정보를 빼낼 수 있어야 해.”

“단순히 미리 정보를 빼낸 정도가 아니야. 암살조 전력이 빠진 틈을 노려서 곧바로 치고 들어왔어. 우연일 수도 있지만,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게 더 합리적이겠지. 실시간으로 정보를 받고 있을지도.”

“그렇다면 여기 안전가옥이 이름 그대로 안전하다고 보긴 힘들겠네.”

“경계를 늦추면 안 되겠지만, 스무 명이나 잃었는데 2차 습격을 하긴 어렵겠지. 그 우려는 조금 접어도 좋을 것 같아.”

하지만 정보가 새어나가고 있는 건 확실하다.

아즈텍 측에서는 별 것 아니라고 말했지만, ‘철혈의 꽃’의 손길은 현 아즈텍 정부나 군부 깊숙한 곳까지 뻗어 있는 것 같다.

물론 오늘 습격한 주체가 철혈의 꽃인지 아닌지, 살아남은 암살자를 심문해서 확실해진 뒤에 그렇게 말해야겠지만.

분명한 건 정부나 군부 내에, 같은 편이 아닌 사람이 있다는 것.

이는 정권에 대한 충성심이 높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 정권의 불안정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런 정권하고 협상이 될지 모르겠어. 불안정한 정권하고 한 약속은 뒤집히기 마련이니까.”

“그런데 그렇다고 다른 정치집단과 손잡을 수도 없잖아?”

“그렇지…… 아까 습격당하기 전까진 극우 집단이라고 해도 협상의 여지가 있을지 모른다 생각했었는데, 저쪽은 아닌가 봐.”

철혈의 꽃을 비롯한 극우 집단이 안정적인 정권을 세우도록 하고, 신수덕의 신병은 협상을 통해 넘겨받는다. 그런 구상이었는데, 완전히 틀어져 버렸다.

오랜만에 맛보는 패배감이다. 산동에서 신수덕을 놓쳐버렸을 때와 비슷한 감각.

“이 암살 시도는, 두 가지 의미가 있지.”

하나는 정말로 양국의 경제관료들을 암살해서, 현 아즈텍 정권의 경제 정책을 박살내는 것. 그럴수록 현 정권은 민심을 잃고, 철혈의 꽃 같은 집단이 민심을 얻게 된다.

다른 하나는, 암살 대상이 된 세력들에게 메시지를 보내는 것.

“‘우리는 당신네들과 타협할 생각이 없다. 우리는 당신네들과 끝까지 싸울 것이다’라는 메시지지. 적대 의지가 너무 명확해. 우호 관계를 수립할 구상은 멀리 치워버려야겠어.”

“이성이라는 게 안 남아있는 집단 같아. 보통은 동맹을 구하려고 할 텐데 말이야.”

“혼돈을 일으키고자 하는 의지만 느껴지지. 그것도 꽤 강한 의지가.”

그렇게 말하며 견하는 소파에 몸을 깊숙이 기댔다. 소년은 외투는 벗어두고, 셔츠는 단추를 몇 개 풀어 헐렁하게 했다.

리안이나 효윤이 봤다면 입을 가리고 감상했을 광경이지만, 이 방에는 견하와 재연뿐이다. 그리고 재연은 지금 견하의 모습에서 계략을 꾸미는 감찰국장의 면모만을 보고 있다.

재연은 견하의 말을 곱씹어보고, 그 결과를 내놓았다.

“혼돈을 통해, 세력을 불리려는 걸까.”

“그럴 가능성도 크지. 아니 거의 확실하다고 봐야겠어.”

견하는 왼손 엄지로 미간을 눌렀다.

“아까 ‘철혈의 꽃’의 주요 거점이 타카마가하라나 테노치티틀란이라고 들었을 땐, 잠깐 다녀올까 하는 생각을 했어.”

“둘 다? 아니면 어느 한쪽을 골라서?”

“신수덕은 여기 처음 왔을 땐 타카마가하라에 있었겠지만, 지금도 거기 계속 머물러 있진 않을 거야. 테러 사건이나 동명역 쿠데타 사건 이후엔 테노치티틀란 쪽으로 이동하지 않았을까 싶어. 그래서 거길 다녀올까 했는데…….”

“하지만 여기 정보가 실시간으로 새어나가고 있지.”

“우리가 여기서 자리를 비우면 곧바로 2차 암살 시도가 들어올 거야.”

“발이 묶인 셈이네.”

대화가 잠깐 끊겼다. 두 사람 모두 생각에 잠겼기 때문이다.

이윽고 대화를 다시 시작한 사람은 재연이었다.

“……신수덕 말인데, 철혈의 꽃 안에서 얼마만큼의 영향력이 있을까?”

“망명객이라 해도 어차피 군식구인데, 조언자 정도 아닐까.”

“상당한 영향력이 있고, 이번에 이렇게 우리 발을 묶은 게 신수덕에 의한 거라면?”

“아즈텍 대륙 원주민들의 민족주의를 외치는 집단에서 고려인의 의견을 그렇게 귀담아듣는다? 조금 이상한데.”

“신수덕은 ‘중앙정부와 싸워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잖아.”

견하의 시선이 천장을 향했다. 재연의 말을 되짚어보는 듯하다.

재연이 한 말은, 견하가 고려를 떠나기 전에 리안과 나눈 이야기에도 들어있던 내용이다.

“그렇다고 해도, 신수덕 하나를 위해 스무 명의 충성스러운 조직원을 희생시키는 건 이상해.”

“신수덕 자신만을 위한 일이 아니라, 철혈의 꽃이라는 조직이 성장하는 데 필요한 일이라고 설득했을 수 있지. 신수덕 정도 되는 사람이면 그 정도 포장은 할 수 있을 것 같고.”

올렸던 시선을 다시 내렸다. 이번엔 테이블 귀퉁이를 노려본다.

“……일단은 신수덕을 죽이러 간 암살조에서 뭔가 보고가 오길 기다려보자. 그래야 뭔가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 같아.”

“신수덕 암살에 손쉽게 성공하면, 철혈의 꽃 내에서 신수덕의 비중은 그다지 크지 않다고 할 수 있겠지.”

“반대로 신수덕을 보호하는 데 필사적이었다면, 재연이 네 가설이 맞겠지.”

그리고 그건 생각보다 큰 정치적 문제다.

견하는 신수덕이 아즈텍에서 살아남기 위해 철혈의 꽃에서 조언자 역할을 한다 해도, 한계가 뚜렷하리라 생각했었다. 철혈의 꽃은 그저 신수덕을 이용하는 중일 것이라고.

그러나 재연이 세운 가설이 맞다면, 신수덕은 단순히 자신의 경험을 공유하는 게 아니라, 그런 경험을 통해 영향력을 상당히 키우는 중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철혈의 꽃이나 극우 집단이 주도하는 정권이 아즈텍에 들어섰을 때, 신수덕을 보호하는 선에서 그치지 않을 수도 있다.

신수덕의 영향을 받아 고려에 대단히 적대적인 정권이 들어설 수도 있다는 말이다.

“……기다려보자. 지금은 그것밖에 없어.”

한참 뒤에 견하가 내놓은 대답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