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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소녀는 대원수가 되었다-127화 (127/541)

혼돈획책(14)

류성일의 총장실에 찾아갔던 날, 그날의 암살자들은 고려민국 임시정부 내에서 안세규가 아닌 다른 파벌이 보낸 암살자였다.

진실에 한 걸음 접근했다고 해서, 크게 달라지는 건 없다.

허동주와의 내전은 어차피 일어날 일이었다.

아니, 리안에게는 오히려 필요한 일이기도 했다. 허동주 세력은 무력을 동원하지 않고서는 제거할 방법이 없었다.

내전은 어떤 방식으로든 일어날 순간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 ‘어떤 방식’ 중 하나가, 작년 4월 1일에 있었던 태사 암살 시도였고.

리안은 그 용의선상에 허동주를 올려놓고, 일방적인 공세를 취해 내전을 일으켰다.

후회해도 늦었고, 후회할 일도 아니다.

지금 해야 할 일은, 그 용의선상에 안세규의 이름을 올려놓는 것이다.

안세규가 범인이라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공작을 펼쳐서, 리안과 허동주를 내전으로 몰고 갔을까.

그걸 입증할 수는 있을까.

입증한다고 해도, 까발릴 수 있을까.

“까발려봤자, 손해가 더 크겠지…….”

안세규는 어엿한 연립내각의 구성원이다. ‘실은 안세규가 내전의 원인이었습니다’하고 말해봤자, 국민들은 ‘미리안과 안세규가 짜고서 저지른 일 아니냐’고 생각할 것이다.

합리적인 의심이기도 하고.

“하지만…… 거기서 그치는 문제가 아니지.”

안세규를 태사 전용열차 습격사건의 용의자로 올려두면,

견하의 부모님을 죽음으로 몰고 간 사건의 용의자에도 올려둬야 한다.

물론 둘은 별개의 사건이다. 두 번째 암살 시도는 허동주나 다른 파벌의 소행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게 안세규라면, 견하가 이 사실을 알았을 때는…….”

참지 않을 것이다.

참을 것을 강요하면, 그는 망설임 없이 리안을 떠날지도 모른다.

견하 한 사람만을 위해서, 또 다른 숙청의 피바람을 일으켜야 하나?

리안은 의자에 몸을 깊숙이 묻었다.

이곳은 견하의 집무실. 유지나마저 내보내고 혼자 앉아 있다.

의자에서, 소년의 냄새가 나는 것 같다.

“빨리 와 줬으면 좋겠어.”

그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근심이 사라질지도 모른다.

아니, 그 눈을 보며 속으로 말을 삼켜야 하니, 더 큰 근심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답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효윤이에게 이야기해보는 게 가장 좋겠지.”

***

견하와 일행들은, 죽은 여준설이 그랬듯, 카스키남포 공항에 내렸다.

몽골에 갔을 때보다 더욱 낯선 환경과 문물,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일단 공식적으로 일행의 대표는 차무룡 재무장관이었다.

그래서 견하와 재연은 뒤에서 차무룡이 아즈텍 측 대표와 반갑게 인사를 나누는 걸 지켜만 봤다.

아즈텍도 지난 테러로 재무장관을 비롯한 주요 경제관료를 잃었다고 들었다.

양국의 신임 재무장관들은 형식적으로 웃고, 형식적인 대화를 나누고, 차에 올랐다.

고려와 몽골을 비롯한 4국의 관세동맹이나, 아즈텍의 경제 상황 같은 중요한 이야기는 이 자리에선 그닥 깊게 다루지 않을 것이다.

차를 타고 가는 동안 두 재무장관 사이에서 몇 마디 나올 순 있겠지만.

그래서 다른 차에 탄 견하와 재연은, 그들끼리 나눌 수 있는 이야기를 하기로 했다.

“네가 ‘천손민족협회’의 회원이었으니까 묻는 건데……”

그렇게 운을 떼는 견하의 말에, 재연은 조금 긴장했다.

“내가 듣기로 ‘철혈의 꽃’과 ‘천손민족협회’의 성격은 아주 비슷하다고 했거든. 극단적 민족주의 성향, 호전적인 세계관과 국가관 등에서 말이야.”

천손민족협회가 고려 민족 제일주의의 고려 제국을 만들고자 했다면, 철혈의 꽃은 아즈텍 대륙 원주민들 중심의 국가를 만들고자 한다.

그런 면에서 보면 분명 비슷하다.

“그렇다면, 우리가 먼저 철혈의 꽃과 접촉할 방법은 없을까? 재연이 너라면 뭔가 좋은 방법을 떠올릴 수 있지 않을까 싶은데.”

재연은 고개를 저었다.

견하의 말을 듣자마자, 길게 생각하지 않고 저었다. 거부의 뜻은 아니었다.

“나도 그런 방법은 알 수 없어.”

왜냐하면 두 조직은 그런 공통점이 무색하게, 차이도 컸으니까.

“내전 전에는, 천손민족협회는 어엿한 합법단체였어.”

그것도 정권의 이인자, 문하시중 허동주의 지원을 받는 단체였다.

“반면에 철혈의 꽃은 철저하게 불법 집단이지. 오히려 외무장관에게 물어보는 게 더 나은 답을 받을 수 있을걸.”

“……그런가.”

규모 면에서도 상당한 차이가 있을 것이다. 천손민족협회는 사회에 당당하게 드러난 집단이니 어디든 거리낌 없이 손을 뻗을 수 있는 반면에, 철혈의 꽃 같은 집단은 조직원 하나를 포섭하는 데에도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 능력뿐만 아니라 신용까지.

천손민족협회는 각 지부에 찾아가서 가입 의사를 밝히면 그만이지만, 철혈의 꽃은 아예 일상에서는 접촉도 못 할 수 있다.

게다가 철혈의 꽃은 같은 성향의 단체들 중 두각을 드러내고 있을 뿐, 그들을 대표할 수 있는 조직도 아니라고 한다.

“그래도 말이지, 나름 삼엄했을 경호를 뚫고 들어와서, 세계 경제의 거물들을 향해 폭탄을 던질 수 있었다면…… 아즈텍의 음지에만 머무는 조직은 아니지 않을까?”

견하는 그 테러가 일어났던 정황부터 의심하고 있었다.

“기자들 앞에서 연출된 모습을 보여주려다가 경비가 허술해졌던 거 아니었어?”

“아무리 허술해졌다고 해도 폭탄을 든 사람이 접근하는데 저지하지 못했을까. 물론 우연에 우연이 겹쳐서 그렇게 됐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나는 다른 가능성도 놓치고 싶지 않아.”

“누군가가 ‘철혈의 꽃’의 뒤를 봐주고 있다, 그래서 그 테러도 성공할 수 있었다, 는 거야?”

“누군가 한 명쯤은 민족주의에 열중하는 사람이 아즈텍 정부에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일단은 아즈텍에서 철혈의 꽃 문제를 다루는 사람과 접촉하는 게 좋겠어. 고려에서 들은 정보와, 현지인들이 이해하고 있는 정보 사이에 차이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렇게 말하고, 재연은 잠깐 뜸을 들였다.

“이번에 쿠데타, 태사께서 유도하신 거잖아.”

견하는 재연이 갑자기 왜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지 알 수 없었다.

“공식적으로는 아니야. 물론 각하의 숙군에 불만을 품은 무리가 반란을 일으킨 건 맞지.”

견하는 그렇게 말하며 딱 선을 그었다.

“실상이야 어쨌든, 그때와 비슷한 상황을 여기 아즈텍에서도 만들어 볼 수 있지 않을까? 그 후에 철혈의 꽃과 접촉할 방법을 찾아내는 게 어떨까 싶은데.”

“……구체적으로는 어떻게?”

“우리가 왔다는 소식은 ‘철혈의 꽃’의 귀에도 들어가겠지.”

“재연이 네 말은…… 철혈의 꽃이 우리를 노리도록 유도하자, 는 건가.”

“견하 네가 경호 없이 번화가를 돌아다닌다든가 하는 식으로 도발하면 넘어올 것 같은데, 어때?”

“말이 아예 안 되는 방법은 아니군. 기억은 해 둘게.”

두 소년은 잠시 말이 없었다.

슬슬 쿠아우테목 시에 진입할 즈음에, 재연이 물었다.

“혹시, 신수덕을 죽이는 것 말고 다른 계산을 하는 건 아니지?”

견하는 곧바로 답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창밖을 향했다.

고려에서 온 손님을 태운 차량들은, 막힌 길을 돌아서 목적지로 향했다.

눈앞의 길은, 셀 수 없이 많은 인파로 차 있었다. 아즈텍의 문자를 읽을 수는 없었지만, 깃발이나 팻말을 잔뜩 든 그들의 모습에서 분노는 느낄 수 있었다.

혹은 갈망이거나, 혹은 절규.

“신수덕은 신속하게 제거되는 게 옳지.”

하지만 저 모습을 봐, 라면서 견하는 말을 이었다.

“여기 현 정권이 오래가지 못할 가능성도 생각해봐야 해.”

“철혈의 꽃 같은 우익 집단들이 정권을 장악할 수 있다는 말이야?”

“그래. 고려에겐 아즈텍의 정권을 선택할 힘은 없어. 새로 들어선 정권이 어떤 정권이든, 최대한 우호 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할 수 있을 뿐이지.”

“저런 시위가 전국적으로 계속된다면 그럴 수도 있겠네.”

“만약 철혈의 꽃을 비롯한 아즈텍 내 우익 집단들과 연줄을 만들어 둘 수 있다면, 그들이 집권했을 때 큰 진통 없이 외교 문제를 풀어갈 수 있을 테니까. 굳이 원한을 쌓을 필요는 없다고 봐.”

“그때는 신수덕의 신병 인도를 요청해도 되겠고.”

“최소한 암살을 묵인받을 수 있겠지. 지금처럼 말이야. 자기들은 정보만 제공해 줄 테니 알아서 제거해라, 라는 식으로.”

그러다가, 견하는 리안의 얼굴을 떠올리곤 피식 웃었다.

“뭐 어디까지나 내 개인적인 구상에서 그칠 것 같아. 태사 각하는 신수덕의 신속한 제거를 원하시니까, 이런 계획을 용납하진 않으시겠지.”

먼저 암살조의 성과부터 기다리자. 그다음에 따로 구상을 펼쳐봐도 좋겠지. 견하는 그렇게 생각하며 쿠아우테목 시의 면면을 관찰했다.

이 도시에서는 1929년 4월의 동명특별시 같은 냄새가 났다. 고등학생에 불과한 당시엔 미처 느끼지 못했지만, 이제는 알 수 있었다.

이 냄새는 혼돈의 냄새였다.

***

호텔에 도착해, 각기 방을 배정받았다.

견하와 재연이 머물 방은 차무룡 장관의 바로 옆 방이었다. 뭔가 일이 생기면 곧바로 들어갈 수 있도록, 방 사이에도 문이 있었다.

그 외에도 경호원들이 그 층의 각 방에 배치되었다. 지난번 테러 때문에 더욱 경비에 심혈을 기울인다는 듯했다.

암살조는 방을 배정받지 않고, 곧바로 임무에 착수하러 떠났다. 현 아즈텍 정부의 묵인 아래 이뤄지는 작업이기 때문에, 아무도 이를 지적하진 않았다.

“주견하 국장님께서 궁금하신 점이 많으실 듯합니다.”

통역 한 사람과 함께 들어온 군인은, 그렇게 웃으며 인사했다. 계급은 대령. 견하와 같았다.

격을 맞춘 사람을 보내, 견하의 말 상대를 시킬 의도일까?

옆방에서 양국 재무장관과 아즈텍의 중앙은행장 등이 경제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마냥 지루하게 기다리는 것보다는 나았다. 그래서 견하도 반갑게 인사했다.

인사가 끝나자마자 견하는 ‘정보 수집 업무’에 착수한다.

“이미 아시겠지만, 지금 제 최대 관심사는 신수덕을 보호 중인 것으로 추정되는, 철혈의 꽃이라는 집단입니다.”

말 상대는 이미 견하가 고려 제3제국 내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 인간인지는 아는 듯했다. 아즈텍의 군인은 진지한 태도로 견하의 말을 들으며, 성실하게 답했다.

“저희도 정확한 윤곽을 잡진 못하고 있습니다. 비극적인 사건을 일으키긴 했지만, 그게 꼭 조직의 규모와 비례하는 건 아니라서 말이죠. 그 외의 유사 집단들도 많고요. 우리는 그들을 불법 단체로 규정하고 해산시키려고 노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말을 흐린다. 일정 정보 이상은 제공하지 않으려는 것일까. 아니면 정말로 파악이 안 되고 있는 건가.

견하는 슬쩍 도발해보기로 한다.

“전혀 파악된 게 없는 겁니까.”

이런 말을 받은 이상, 아즈텍 정부가 무능하다는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서라도 상대는 정보를 좀 뱉어야 한다.

“서해안의 타카마가하라, 그리고 남부의 테노치티틀란에 거점을 두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지만, 활동 범위가 그 주변으로 제한되진 않습니다. 여기, 중앙부인 쿠아우테목까지 종종 올라올 정도로 상당히 넓죠.”

그렇다면 타카마가하라나 테노치티틀란, 두 도시 중 하나를 들러봐야 할까.

그렇게 생각하다 말고, 견하는 손을 들어 대화를 중단했다.

“대령님 말씀이 맞군요.”

당황하는 아즈텍 군인의 얼굴을 흘낏 보며 견하는 말했다.

“활동 범위가 여기까지 미치는 걸 보니.”

그리고 예상보다 훨씬 신속했다.

견하의 손에서 하얀 촉수들이 뻗어 나와 난폭하게 호텔 벽을 찢어버렸다. 두꺼운 콘크리트 벽을 ‘찢어버리는’ 소리는 귀를 먹먹하게 했다.

재연과 아즈텍인은 몸을 낮추고 각각 권총을 빼 들었다.

박살 난 벽 너머에선, 방금 막 창문을 깨고 들어온 괴한들이 경제관료들을 겨냥하고 있었다.

견하는 벽의 잔해를 넘어 돌진했다.

촉수들은 견하가 돌진하자 손 근처로 돌아와 검의 형태를 이루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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