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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소녀는 대원수가 되었다-125화 (125/541)

혼돈획책(12)

류성일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는다. 더는 평정을 유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정계에서 물러난 이후로 류성일은 계속 복귀를 시도했지만, 미승휴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적극적인 행동을 취할 수 없었다.

미승휴 뿐만 아니라, 허동주의 영향력도 만만치 않아서, 류성일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미승휴가 먼저 쓰러졌다. 그게 허동주의 책략인지 아닌지는 여전히 모르겠지만, 류성일에게는 하나의 기회였다.

허동주를 둘러싼 소장파 세력과, 미리안을 둘러싼 원로 세력의 대립.

그러나 정권의 원로들은 어린 미리안의 역량을 미심쩍어했고, 그래서 류성일은…….

상황에 변화를 줘서, 미리안의 자리를 대신하여, 원로들의 우두머리로서 정계로 복귀하려 했다.

그러기 위해서 이용한 세력이, 안세규가 주석으로 있는 ‘고려민국 임시정부’였다.

정계에서 물러나 총장으로 있던 시절에, 류성일은 정계로 진출하려는 후학들을 적극 지원했다. 옛 제2제국이나 제1제국 시절처럼, 스승이 젊은 관료들과의 사제 관계를 통해 영향력을 끼치려 했던 것이다.

그 덕분에 은퇴해 있는 동안에도 류성일은 영향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류성일의 의도에서 어긋난 학생들도 나왔다. 민주주의 도입을 외치는 그 학생들은 고려민국 임시정부에 가담했다. 그런 학생들 중 하나가 바로 안세규였다.

미승휴 정권에서 제1대학교 내에 불순한 학생 무리를 색출하겠다고 달려들었을 때, 류성일은 종종 그 앞을 가로막았다.

미래를 대비하기 위함이기도 했지만, 애초에 민국 정부와의 연합을 주장했던 사람이 바로 류성일이어서 그랬다.

류성일 덕분에 제1대학교는 민주주의 계열 학생들의 요람 같은 곳이 되었다.

그런 인연으로, 류성일은 고려민국 임시정부의 주석 안세규와 접촉했다.

아니, 같은 시기에 안세규도 류성일과의 접촉을 시도하고 있었기 때문에, 둘 다 서로에게 접근했다고 보는 게 옳다.

류성일이 정국의 변화를 원했던 것처럼, 안세규도 변화를 원했다.

궁지에 몰려 있던 고려민국 임시정부의 상황을 타개하고, 그런 성과를 통해 자신의 자리를 공고히 하고자 했다.

그리고 류성일을 비롯한 원로들이 이끄는 보수적 정권에 ‘황위계승자’를 들이밀면서, 불법 조직이라는 껍질을 벗어던지고 합법적 정치세력으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라 계산했다.

류성일은 태사의 전용열차가 지나는 비밀 노선에 대한 정보와, 그에 더해 약간의 자금, 무기를, 슬쩍 건네주었다.

뿐만 아니라 군 시절 동료들과 연락해, 고려민국 임시정부의 이상한 움직임을 포착했다는 정보가 묵살되도록 손을 썼다.

안세규는 이단과, 자신이 동원할 수 있는 고려민국 임시정부의 병력을 모두 쏟아 넣어서, 미리안을 습격했다.

그것이 1929년 4월 1일의 일이다.

“우리의 예상과 달리, 태사는 살아서 도망쳤죠. 저는 아까운 이단 하나를 잃었고요.”

안세규의 말을 들으며, 류성일은 그때 일을 떠올렸다.

생각할수록 뒷맛이 쓰디썼다.

“살아난 미리안은 그 일이 허동주의 소행이라고 여겼지.”

미리안은 류성일을 비롯한 원로들, 고려민국 임시정부가 개입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아니, 그 당시엔 가장 유력한 용의자로 허동주를 꼽는 게 당연했을 것이다.

“그렇게 내전이 시작됐죠. 우리는 허동주 세력의 빈자리를 비집고 들어가, 각각 법무장관과 외무장관이 됐고요. 각자의 속내와는 조금 다르지만, 그래도 일보 전진이었습니다.”

“중간과정 생략이 너무 심하구려, 안 장관.”

류성일의 눈은 이제 노골적인 짜증을 드러내고 있었다.

“중간과정이라…… 당시 그저 고등학생일 뿐이었던 주견하 국장의 집에 직접 암살조를 파견하셨던 일을 말하는 겁니까?”

안세규의 울리는 목소리에 위협이 겹치니, 마치 호랑이가 그르렁대는 것 같았다.

그러나 류성일은 그 목소리에 위축되지 않았다. 말없이, 짜증을 담아 안세규를 노려본다.

“제가 시도한 암살이 실패로 돌아가자, 직접 손을 써야겠다고 생각하셨겠죠.”

간밤의 암살을 사주한 자가 바로 류성일이었기에, 다음날 제1대학교로 찾아온다는 걸 대충은 파악하고 있었다.

“그것도 실패로 돌아갔지.”

그래서 계획을 변경해, 허동주와의 싸움을 부추기기로 한 것이다.

“대실패였죠. 태사야 당연히 이 일을 알게 되면 우리를 가만두지 않겠지만, 주견하 국장은 어떨까요.”

다시 한번 주견하의 이름이 나오자, 류성일은 헛기침을 했다.

“그때 주견하 국장의 부모가 죽었습니다. 류 장관께서 부모의 원수라는 걸 알면, 주 국장 성격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충분히 상상할 수 있으시겠죠?”

동명역에서 반군을 어떻게 진압했는지는 들었다. 게다가 주견하는 태사와 황제 모두를 뒷배로 둔 자다.

감출 필요도 없다. 반역자를 토벌한다며 법무성으로 달려들어 전부 죽여버리고, 류성일은 끌고 가 길고 고통스러운 죽음을 안겨줄 것이다.

“그건 협박이 안 되오. 그게 알려지면 자연히 안 장관의 치부도 드러날 테지. 나란히 형장으로 향할 뿐이오. 그리고……”

류성일의 총장은 손가락을 들어, 안세규의 가슴팍을 가리켰다.

“당신네 정부에서 나도 없앨 생각으로, 총장실에 다시 암살자를 파견하지 않았소?”

“그건 제 통제를 벗어난 일이었습니다.”

안세규의 계획은 고려민국 임시정부 내에 금세 퍼졌다. 안세규가 공을 독차지하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파벌들은 자기네들이 직접 태사를 암살하겠다고 나섰다.

“이미 이단 하나와 상당한 전력을 잃고도 암살에 실패한 저는 그 상황에서 할 말이 없었죠.”

그래도 나중에 주견하의 감찰국을 이용해, 그 파벌들을 제거할 수 있었다. 그렇게 비밀을 아는 자들은 사라졌다. 주견하를 기만하는 것 같아서 조금 미안했지만.

“통제를 잃었다고 하기엔, 안 장관도 지금의 황제 폐하를 보내지 않았소?”

“이미 류 장관님과 태사가 접촉한 이상, 혼자 죄를 뒤집어쓰고 죽을 순 없었으니까요. 저도 전략을 변경한 거죠.”

태사가 살아서 류성일과 만났으니, 류성일은 태사를 죽이지 못하게 됐다. 협력하는 수밖에 없었다.

암살자의 정체가 명확하지 않은 상황에서, 허동주에게 모든 화살을 돌리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그렇다면 고려민국 임시정부도 계속 태사의 죽음만 고집할 수는 없었다. 일단은 살려놓고, 협력하는 방향으로 전환해야 했다.

그래서 루우를 보내 다른 파벌들의 암살 시도를 저지한다.

그리고 그 인연을 통해 태사와의 협력 관계를 구축한다.

권력을 향한 두 사람의 욕망과 우연이 빚어낸 기막힌 정국의 전환. 이 전환은 그대로 내전까지, 일직선으로 이어졌다.

“우리 둘 다 이 비밀은 죽는 그 날까지 가져가야겠죠. 우리로 인해 태사가 허동주를 오해하고, 내전이 일어나고, 전 국토가 피로 물들었다는 게 알려지면, 끝장이니까요.”

이상도, 야망도 끝난다.

“허동주와의 싸움은 어차피 언젠가는 일어날 일이었소…… 라고 한다면 비겁한 변명이겠지.”

“……만에 하나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지키기 위해, 이 고려라는 나라 내에서 힘을 키워야 합니다.

하지만 고려가 ‘다이온 연방’이라는 더 큰 나라의 일부가 되면, 우리의 힘도 상대적으로 약해질 겁니다. 그건 위험합니다.”

“그러니, 안 장관이 지금 꾸미고 있는, ‘방해 공작’을 지원해달라?”

“우리는 일정 부분 운명공동체니까요. 그걸 다시 일깨워드리려고 말을 꺼낸 겁니다.”

“안 장관의 계획, 믿어도 되겠소?”

“제가 류 장관님을 배신하고 혼자 도망칠까 봐 걱정되십니까? 글쎄요, 설령 그렇다고 해도, 류 장관님이라면 그에 대책 정도는 이미 세워두셨을 것 같은데요.”

류성일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그렇소. 혼자 죽을 순 없으니까.”

“그러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는 가급적이면 류 장관님께도 이익이 되는 쪽으로 일을 풀어나가려고 합니다.”

“구체적으로는?”

“최고권력자가 되는 건 좀 더 나이를 먹고 나서, 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저는 부드럽게, 단계를 밟아서 일이 진행되는 걸 선호합니다. 그렇다면 류 장관님이 제 선배가 되는 게 순리에 맞겠죠.”

“필요할 때는 거친 일도 꺼리지 않으시는 분이 그런 말씀을…….”

류성일의 기분이 조금 풀렸다.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그는 세습에는 관심이 없었다. 노년에 정권의 정점에 서 볼 수 있다면 충분한 영예다.

그 정도로 하고 물러난 뒤엔, 안세규가 그 자리에 앉든 누가 앉든 상관할 일 아니지.

“……좋소. 어느 정도의 지원을 바라시오?”

***

리안은 ‘고려민국의 통령’이라는 말에 눈을 깜박이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이 애가, 황제가,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제3제국을 너 1대에서 끝내고, 그냥 고려민국으로 전환하자고?”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라지만, 그래야 하는 순간이 온다면 그게 최선이 아닐까.”

리안은 고개를 저었다.

“헛소리는 집어치우고, 의료진 문제나 다시 이야기해보자.”

루우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태사가 정말 양보 못 하겠다면, 잠깐 미루는 건 어떨까.”

“미룬다면 기한을 정해야지. 언제까지고 ‘아직은 때가 아니야’ 같은 소리를 들을 순 없으니까.”

“내가 몽골의 황위를 계승할 때까지.”

루우의 말은 단호하게 떨어졌다.

“하필이면 그때까지로 정한 이유가 있어?”

“그때가 오면 내가 좀 더…… 나에 대해 많은 정보를 확보할 수 있어. 이단에 대해서도, 파멸인류, 파멸인에 대해서도. 그때는 고려와 몽골의 연구진을 모두 통합해, 이단 기술의 큰 진전도 이룰 수 있을 거야.”

“아직은, 너 스스로도 뭔가 정리가 필요하다, 그런 뜻인가?”

“그래. 나도 정리가 안 됐는데, 다른 사람들에게 몸을 맡길 순 없어. 나는 가능한 많은 정보를 쥐고, 그래서 주도권도 쥐어야 직성이 풀리니까.”

리안은 피식 웃었다.

“그건 나랑 비슷하네.”

루우도 마주 웃었다. 비슷한 사람이기에, 함께 이런 일도 할 수 있는 것이겠지.

리안은 한결 부드러워진 어조로 말했다.

“좋아. 황제가 정한 그 기한까지, 일단 내 고집을 물릴게. 하지만 나도 조건이 하나 있어.”

“뭐지.”

부드러워진 어조가 무색하게, 리안은 갑자기 낮게 깔린 목소리로 물었다.

“작년, 제1대학교 총장실에서 네가 죽인 암살자들, 어디 소속인지 말해줘.”

루우의 몸이 굳었다.

리안의 눈은 그 작은 경직조차 놓치지 않았다.

견하와 루우를 산동에 보내 신수덕 토벌 작전에 참여케 했었던 때.

그때 유지나와 양수영은 견하를 대신해 소년감찰국을 이끌고 있다가, 안세규의 요청으로 고려국민당 내 불온 세력을 제거했다.

안세규는 그들이 순식간에 제거되었다고 알고 있지만, 리안은 아주 잠깐 그들을 살려뒀다.

유용한 정보가 있다면, 캐내기 위해서.

어쨌든 그들은 안세규와 가까이에 있었던 사람들이니까.

그리고 유지나는 재미있는 보고를 했다.

그들은 죽기 전에 ‘안세규야말로 진짜 반역자’라는 말을 했다고.

거기서부터 거꾸로 거슬러 오르며, 추측에 추측을 거듭했다.

정황상 허동주가 암살을 사주한 게 아니지 않을까, 라는 이야기는 이미 리안의 측근들 사이에선 나오고 있었지만.

그러니까, 이건 확인 절차다.

루우는 리안의 눈빛을 정면에서 받으며, 한참 망설이다, 말을 뱉었다.

“……그때 그 사람들, 안세규와 대립하던 파벌에서 보낸 사람들이야. 내가 답해줄 수 있는 건 여기까지.”

리안은 깊게, 천천히, 끄덕였다.

“그거면 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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