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돈획책(10)
리안의 위협 섞인 목소리, 그리고 숨소리가 귓가에서 멀어진다.
루우는 ‘살짝 떨리는 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전에 효윤에게도 말했듯이 루우는 일단 ‘예쁜 것’은 좋아했고, 리안은 그 예쁜 것들의 범주에 들어가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저토록 격렬한 감정을 드러내니, 가슴이 두근거린다.
루우 자신이 이상한 건지,
소녀로서, 당당한 성인 여성을 동경하는 건지,
아니면 리안이 뿜어내는 카리스마에 압도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나도 내 생존이 걸린 일이니까, 주견하를 버리는 일은 없을 거야.”
최대한 내색하지 않으려 하면서, 루우는 그렇게 대답했다.
“황제의 생존, 이라.”
조금 물러난 리안의 얼굴은, 다시 생각에 잠긴 표정이 됐다.
아무리 봐도 중학생같은 얼굴과 몸집인데, 도대체 어디서 그런 박력이 나오는 건지.
“황제 역시, 상당히 특수한 이단이었지.”
용, 늑대, 사슴…… 그런 형태의 ‘신종(神種)’에게서 비롯된 이단.
괴력난신 중에서도 괴력난신이라 할만하다.
“견하가 어느 정도 추측이 가능하다면, 황제의 능력과 그 기원은 추측 자체가 불가능한 신화의 영역이잖아.”
“기원도 불분명할 뿐만 아니라 앞으로 어떻게 될지도 불분명하지.”
인위적으로 양성됐다는 다른 이단들과는 또 다른 방식으로, 루우는 실험을 통해 태어났다.
그녀의 모친과 태어나지도 못한 수많은 형제들을 희생시키는 방식으로.
신화 속 존재를 다시 세상으로 불러내, 자국의 이단 전력을 강화하겠다는 카간의 야심에 의해.
루우가 안고 있는 불안은, 위험할 뿐만 아니라 입증되지 않은 자신의 ‘생산 방식’에 있다.
언제 끝장날지 모르는 삶.
그녀가 만 열일곱 해를 살아남은 것도, 실은 기적적인 우연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물론 그녀와 같은 존재가 세상에 더 있는 건 아니니, 지나친 걱정일 가능성도 있다. 그녀는 말도 안 되는 수명을 자랑하게 될 수도 있다.
어디까지나 가능성, 이라는 게 문제지만.
“너는, 죽기 전에 뭔가 해보고 싶어서 황제가 된 거야?”
만약 루우의 삶이 짧다면, 그 짧은 삶이 다하기 전에 세상에 자신의 발자취를 남기고 싶을 것이다.
황제가 된 것도, 더 나아가 몽골의 황위를 노리는 것도, 그런 흔적을 남기려는 발버둥이 아닐까.
“그것도 하나의 이유긴 하지.”
쓰게 웃는다. 리안은 소녀의 그 웃음이 왠지 안쓰러웠다.
“하지만 쉽게 죽을 생각은 없어. 나는 주견하를 통해 이단의 기원과 변화에 대해 알아낼 거야. 그렇게 해서 주견하도 살리고, 나도 가능한 한 오래오래 살 생각이야.”
“자신 있게 말하는 건 좋지만, 자신감이 불확실을 확실로 만들어주진 않아.”
리안은 그렇게 반론했다.
루우는 답하지 않았기에, 리안은 말을 이었다.
“의료진을 붙일게. 이단 문제의 해결을 볼 수는 없더라도, 적어도 다른 요인으로 건강이 악화하는 건 막을 수 있겠지.”
“안돼.”
완강한 거부였다. 물론 거부를 당했다고 해서 물러설 리안이 아니었다.
“그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리 황제라도 양보할 수 없어. 이건 정권의 안정만 달린 문제가 아니다. 국가 자체의 안정이 달린 문제야.”
출범한 지 1년도 채 되지 않은 황제 체제.
황제가 언제 죽을지 모르는 채로 그 체제를 유지하는 건 너무 위험하다.
“내 이단 능력에 관한 이야기는 극소수 인간을 제외하면 비밀이야. 의료진 투입은 비밀이 새어나갈 수 있어서 안 돼. 그리고 난 감기도 잘 안 걸릴 정도로 건강해. 이단 능력으로 인한 문제는 일반적인 건강 문제와는 전혀 관련이 없어.”
“단순히 그런 건강 문제에만 그치는 게 아니야. 네가 태어난 몽골은 어떨지 몰라도, 고려에는, 그리고 나에겐 이단 관련 정보가 너무 부족해. 정보를 축적해야 네 문제도 해결할 수 있어.”
그렇게 답하며, 리안은 덧붙였다.
“조금 전에, 내가 협력해준다면 정보 공유를 망설이지 않겠다고 했잖아?”
“의료진, 아니 이 경우엔 이단 기술 연구진에 가깝겠지. 그건 ‘공유’의 범위를 벗어나는 문제야.”
“어차피 나와 이단 정보를 공유한다는 건, 고려의 이단 연구에 그만큼 기여한다는 뜻이야. 설마 내가 그 고급 정보를 듣고 가슴 속에 묻어두리라고 생각한 건 아니겠지.”
당연한 말이었다. 제국 태사에게 이단 정보를 제공한다는 건, 제국의 이단 기술 진보에 협력하겠다는 뜻이다.
이미 리안은 안동의 도산서원을 비롯해, 허동주 세력이 품고 있던 이단 연구진 상당수를 흡수했다.
“그리고 어디까지나 만약이지만, 지금 너 후계자도 없어. 여기서 죽어버리면 기껏 만든 황위는 어떻게 되는 거지? 나는 네 아버지나 숙부들을 섬길 생각은 없어. 그들이 황위를 요구하면 전쟁뿐이야.”
“흠, 글쎄, 그럼 아이부터 만들어야 하나.”
“장난치지 말고.”
루우는 잠시 말없이, 리안의 눈을 들여다봤다.
“나도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할지 대책은 있어. 무턱대고 황위에 오르긴 했지만, 오르고 나서는 생각을 정리해봤으니까.”
리안의 눈에 의문이 떠오른다. 리안은 루우가 무슨 말을 할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내가 아이를 낳기 전에 죽는다면, 공석이 된 황위는 자동으로 황권을 국민에게 반납하도록 할 거야.”
“그게 무슨 소리야……?”
“그때는 태사, 당신이 고려민국의 통령이 되도록 해.”
***
세규 앞에 앉은 몽골인은, 세규의 채근하는 눈빛을 몇 차례 받고서야 입을 열었다.
“허동주는 주살당하기 직전, 우리와 접촉했습니다.”
“직전에 접촉한 게 전부는 아니겠죠. 그 전부터 꾸준히 협력은 해오지 않았습니까.”
몽골인은 피식 웃었다. 뭘 새삼스레 가면을 들추려 하시나, 하는 웃음이었다.
그는 세규의 추궁에는 직접 답하지 않고, 자기가 하던 말만 계속 늘어놓았다.
“최악의 상황이 오면, 우리 범 알타이 인민동맹의 힘을 빌려 정세를 뒤집어보려 했던 듯합니다. 그가 보낸 자금 덕분에 우리는 몽골 내에서 영향력을 꽤 키울 수 있었죠.
그래서 우리도 허동주와의 동맹을 꽤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었지만, 어떻게 손을 써보기도 전에 허동주가 죽어버렸습니다. 일의 진행이 너무 빨랐지요.”
그 점은 세규도 동의하는 바였다. 루우가 혼자 미리안과 협상을 하고, 주견하가 허동주를 추격해 죽여버린 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으니까.
“그래서, 고려에서 끈이 떨어지니, 이번엔 나와 친분을 만들어보려는 겁니까.”
“무슨 그런 말씀을. 이 자리는 고려의 외무장관께서 제안해 마련된 자리 아닙니까.”
“그동안 제 제안에, 범 알타이 인민동맹은 묵묵부답이었죠.”
“안 외무장관께서 몽골에 만든 연줄은 우리뿐만이 아니지요. 우리와 경쟁하는 근황파(勤皇派)에도 손을 뻗고 있지 않습니까?
지금 고려의 황제 폐하가 된 분께서 몽골에서 빠져나간 게 우리의 심기를 얼마나 거슬렀는지 모른다고 하진 않으시겠지요.”
몽골인과 안세규는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어차피 서로가 서로를 이용하는 관계다. 굳이 신경 곤두세우며 따질 일은 아니다.
“허동주는 죽고, 신수덕도 아즈텍으로 도망간 지금, 범 알타이 인민동맹이 고려의 내정에 간섭할 방법은 거의 없겠죠.”
“방법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고.”
“그렇다면 오늘은 확실히 건전한 동맹 관계를 이야기하기에 적기군요.”
“그러려면 그 전에, 안 장관께서도 우리와 우리의 경쟁 세력 중에, 어느 한 편을 확실히 들어주시길 바랍니다.”
경쟁 세력이라면, 지금 몽골의 타이시인 볼로드를 비롯한 카간의 친위 세력을 말하는 것이겠지.
대체 무엇을 꾸미고 있기에 갑작스레 이런 제안을 해 오는 것인가.
그리고 어떤 이익을 자신에게 줄 것인가.
“만약, 제가 몽골 내 근황파와의 교류를 끊고, 범 알타이 인민동맹과 적극적으로 동맹 관계를 만들어간다면, 저에게 무엇을 해주시겠습니까?”
“아까도 말했듯이, 우리가 고려의 내정에 간섭할 방법은 없습니다. 그러니 고려 내에서 안 장관의 입지를 강화해줄 무언가는 주기 힘들지요.”
안세규는 침착하게 몽골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저런 말을 했다는 건, 그 대신 다른 걸 제시하겠다는 뜻이다.
“지금의 고려 정국에서, 안 장관은 분명 몽골 근황파와 계속 손을 잡아도 좋은 것인가, 회의감이 들 거라 보는데, 맞습니까?”
세규는 대체 무슨 말이냐는 듯도 하고, 그걸 알다니 의외라는 듯도 한,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몽골인은 그 표정에서 뭔가를 읽어내진 못했는지, 세규를 뚫어져라 보며 그의 말을 기다렸다.
“루우 황제는 내 통제를 벗어났죠.”
“자신의 영향 하에 있는 황제로 만들려던 몽골의 황녀가, 제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볼로드 타이시와의 동맹을 이어가도 이익은 없다고 봅니다만?”
“그렇다고 해두죠. 하지만 거기에 이익이 없다고 해서, 관계를 끊어버리는 게 손해가 아닌 건 아닙니다. 미래에 혹시라도 다시 손잡을 일이 생겼을 때, 껄끄러운 표정을 짓고 싶진 않군요.”
“손해를 벌충할 뭔가가 필요하겠지요.”
“그 뭔가를 제시하실 겁니까?”
“아까도 말했던 것처럼 우리는 고려 내에서 안 장관에게 이익이 될만한 뭔가를 드릴 순 없습니다. 하지만 안 장관이 원하는 ‘외부 상황’을 만들어드릴 순 있죠.”
“‘외부 상황’, 이라.”
감이 잡힐 것 같았지만 세규는 섣부르게 앞질러 말하지 않았다. 이 범 알타이 인민동맹에서 파견한 몽골인이 속내를 비칠 때까지 기다릴 생각이다.
“안 장관과 우리 모두, ‘군주제의 폐지’를 궁극적 목표로 한다는 점에선 동지라고 할 수 있죠.”
웃음이 터질 것 같았지만, 세규는 속으로 감췄다.
세규가 목표로 하는 건 군주제의 폐지 너머, 민주적 공화제다.
하지만 범 알타이 인민동맹이 꿈꾸는 건, ‘인민’이라는 이름 아래, 인민이 모조리 그 권력을 정부에 넘겨버린, 광신적 민족주의 국가다.
굳이 따지자면, 허동주가 꿈꾸던 제국과 비슷했다. 그랬기에 두 세력 사이에 동맹이 가능했겠지만.
세규는 일단 동의를 표하기로 했다.
“궁극적으로는 그렇죠. 군주 없는 고려, 군주 없는 몽골. 국민의 국가들…….”
“우리는 혁명을 일으킬 겁니다.”
세규의 얼굴이 굳었다.
몽골인의 말은, 먼 미래, 언젠가 있을 혁명을 의미하는 게 아니었다. 곧 일어날 봉기, 진행되고 있는 구체적 혁명 계획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래서 군주제를 폐지하고, 몽골 인민들의 나라를 다시 세울 겁니다.”
“그렇게 해서 군주제가 폐지된 신생 몽골에, 고려가 개입하지 않도록, 외무장관인 제가 억눌러 달라는 겁니까?”
“그것도 바라는 바죠. 하지만…… 저희는 좀 더 직접적인 지원을 원합니다. 자금, 무기, 혁명을 성공시키는 데 필요한 지식, 경험 등.”
돈과 무기에 더해, 혁명군을 훈련할 군사 고문 등도 바라는 건가.
“그렇게 해서 몽골이 ‘공화국’으로 태어난다면, 그런 나라가 옆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고려의 공화주의자들에겐 큰 힘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건 말이 공화국이지, 군주가 없다는 걸 제외하면 공화국이라 부르기엔 여러 결함이 있겠지만.
군주를 몰아낸 경험을 가진 나라가 옆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상당히 도움이 되는 건 사실이다. 사람들의 인식에 상당한 영향을 끼칠 테니까.
게다가, 몽골에서 군주제가 없어진다는 것은 곧,
몽골의 황위도 없어진다는 뜻.
「다이온 연방 창설 계획」이 구체화해 가는 요즘, 그걸 억제할 방법이 세규의 눈앞에 떨어졌다.
세규는 언젠가 이 고려가 민주공화국이 되길 바랐다. 그 꿈은 미승휴의 군사독재 아래서 키워 온 소중한 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