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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소녀는 대원수가 되었다-122화 (122/541)

혼돈획책(9)

견하에겐 2월 말까지 아즈텍에 다녀올 시간이 있었다.

배로 가기엔 시간이 빠듯하기도 했고, 하루라도 빨리 돌아와서 지나의 짐을 덜어주고 싶었기에, 군용기를 빌려서 가기로 했다.

군용기에 오르기 전에, 견하는 함께 갈 사람들의 면면을 확인했다.

제국의 새로운 재무장관이 된, 차무룡. 그와 눈이 마주치자 견하는 묵례했다. 새 재무장관도 마주 인사한다.

차무룡은 여준설이 생전에 마무리 짓지 못했던 일을 마치러 아즈텍으로 간다. 견하는 그런 재무장관과 함께 아즈텍에 가서 테러 문제에 대해 정보를 교류한다는 명목으로 이 자리에 있었다.

그런 재무장관을 보좌하는 사람들, 경호원들…… 그리고,

경호원들 틈에 섞인, 확실히 이질적인 사람들이 보인다.

-신수덕을 제거할 임무를 받은, 암살조…….

아마 일은 거의 저들이 다 하겠지. 저들 중에는 이단도 있다. 하지만 만약 이단 전력이 더 필요하다면, 견하 역시 저들을 도울 계획이다.

마지막으로, 청초한 미소년이 한 명 더.

“나는 이번이 두 번째 해외여행이야.”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작년 3월까지만 해도 우리가 이렇게 해외출장을 갈 거라곤 상상도 못 했지.”

견하의 그 말에 재연은 풋, 하고 웃었다.

“그러게. 고등학생으로는 상상도 못 할 일들이었지.”

만약 견하가 4월의 그 날, 리안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견하와 재연의 사이는 달라졌을까.

아마 어디에나 있는, 평범한 고등학생으로, 평범한 친구로, 그렇게 지냈을지도 모른다.

두 사람 사이에 우정의 조각이라도 남아는 있을까. 아니면 둘 다 그저 남아있다고 가정하고, 그걸 연기하는 것뿐일까.

“태사 각하하고는, 어제 작별인사한 거야?”

“이런 자리까지 나와서 나한테 애정을 보여줄 수도 없으니까.”

공공연한 비밀이라고는 하지만, 연인 관계인 모습을 공적인 장소에서 자주 내비쳐서 좋을 건 없다.

정말로 공개적인 연인이 되는 건 그만한 공을 세우고, 입지를 다진 이후에…… 라고, 견하는 생각하고 있다.

“가자.”

견하의 말에 재연은 짧은 끄덕임으로 답했다,

***

견하가 군용기를 타고 출발했다는 보고를 받자마자, 리안은 황제 루우의 방으로 향했다.

견하를 아즈텍으로 보낸 건, 그가 신수덕을 처리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한 이단이라는 이유도 있었고, 또 아즈텍으로 나가서 견문을 넓히라는 의도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더 직접적인 이유는, 지금부터 황제와 나눌 대화를, 견하가 듣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방에 들어서니, 황제는 그럭저럭 깔끔하게 옷을 갖춰 입고 있었다. 리안도 정장 차림으로 그 앞에 섰다.

“생각해보면 기묘한 인연이야.”

본격적인 대화를 나누기 전에, 리안은 그렇게 운을 뗐다.

“그래.”

위기에 몰린 리안과 효윤, 견하와 류성일을 지키겠다고 홀연히 나타난 이단 소녀.

그때는 거의 넘겨짚다시피 한 추측이었지만, 루우는 궤멸한 황실의 마지막 후손이었다.

그런 그녀를 옹립해 황제로 세우고, 내전을 승리로 이끌고, 불안정한 제3제국 체제를 안정적인 위치로 올려두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황제로 옹립하고, 지금에 이르기까지, 리안과 루우 사이엔 상당한 신경전이 오갔지만, 동시에 일종의 동료애 같은 것도 조금은 자리잡았다.

그러나 지금 가늘게 뜬 리안의 눈에는, 그런 동료애를 전면 철회할 수도 있다는 의지가 서렸다.

루우도 그걸 느끼고, 말을 신중하게 받아내기로 한다.

“나는 이단이 아니기도 해서, 너에 비하면 이단에 관한 지식이 많이 부족해. 그러니까 앞으로도 우호적인 관계를 이어가고자 한다면, 이단 관련 지식을 어느 정도는 공유해줬으면 좋겠어. 황제.”

조금 거칠게 나오는 건, 리안에겐 그만큼 절박한 문제라는 거겠지.

“일단은 ‘파멸인’에 대해서. 그건 대체 뭐지? 효윤이에게 듣기로는 그것들, 몽골에서도 발견됐다면서.”

“‘파멸인’은 ‘하얀 괴물’의 완전체가 아닐까 하는, 내 추측도 들었어?”

“들었어.”

“그 추측이 맞다면, 아마도 파멸인이 여러 가지 이유로 마모되거나, 혹은 인위적으로 이단을 양성하려던 수많은 연구의 결과가 ‘하얀 괴물’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어.”

“일단은 둘 사이에 명확한 인과관계는 확인되지 않았다는 거지.”

“그렇긴 하지만 거의 맞을 거야. 다른 가능성을 생각하긴 힘드니까.”

리안은 안동으로 휴가를 내려갔을 때, 배영훈의 안내를 받아 목격한 도산서원의 비밀 연구 시설을 떠올렸다. 참혹한 광경이었다.

그 ‘파멸인’이라는 괴물들의 전투력은 경이로운 수준이었고, 그걸 뿜어냈다는 끔찍한 구체는 여전히…… 살아있다. 제거할 방법은 현재로선 없다.

그런 것이, 몽골에도 있다고 한다.

그 말은, 세 번째 구체의 존재도 충분히 상정 가능하다는 뜻이다.

“얼마나 더 있을까?”

“그것까진 몰라. 바라트나 아즈텍, 로마나 신성 제국, 브리튼, 곳곳에 있는데 쉬쉬하고 있는 걸지도. 아니면 애초에 발견하지도 못한 채 어딘가 땅속에 묻혀 있을지도 모르고.”

“몽골 카간…… 너희 아버지는 그게 활성화되어서 파멸인을 마구 토해내는 사태를 우려하고 있다지.”

“나도 그렇고.”

“일정 수준이라면 화기와 이단을 최대한 동원해서 막아낼 수 있겠지. 하지만 그런 게 ‘무한정’ 쏟아진다면, 감당할 수 없는 재해가 될 거야.”

“세계 곳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터져 나온다면, 종말론도 더는 공상이 아니게 되겠지.”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일이다.

그러나 리안은 그 말을 듣고 망연자실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다. 그녀는 제국의 태사이며, 최고권력자고, 따라서 대책을 세워야 하는 사람이다.

“황제가 생각하고 있는 대책이 있어?”

“나로서는…… 최대한 세계 곳곳에 흩어진 「쿠빌라이 문서」나 그에 준하는 자료들을 모으는 것 말고는 없어.”

이미 터진 사건들, 이미 경험으로 알게 된 것들, 그런 것 이상을 알지 못한다.

하지만 지금 필요한 건 예방책이고, 예방책은 근본 원인을 알아야 제대로 세울 수 있다. 루우가 생각 중인 대책은 소극적으로 보이긴 하지만, 확실한 방법이기도 하다.

“관세동맹, 더 나아가 네가 몽골의 황위를 이으려는 것도, 「쿠빌라이 문서」를 비롯한 자료의 수집과 관련이 있는 건가?”

“틀린 말은 아니야.”

그 외에도, 고려와 몽골의 연구 성과와 인력을 하나로 합치면, 파멸인에 대한 진실에 한 걸음 더 다가설 수 있으리라 보기 때문이다.

“물론 개인적인 야심도 있고.”

리안은 양손으로, 가볍게 반대편 팔꿈치를 받쳤다. 왼손, 하얀 검지가 오른 팔꿈치를 톡톡 건드린다.

“야심은 누구한테나 있으니 이상한 일은 아니야. 어떤 일을 벌일 때 두세 가지 목표를 한꺼번에 달성하려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지. 하지만 앞으로는 그런 계획이 있다면, 적어도 태사인 나에게는 즉각 알려주길 바라.”

“‘즉각’은 어려워. 내 입장에선 그렇게 했을 때 태사가 얼마나 협조적으로 나올지 계산해봐야 하니까.”

살짝 짜증이 나긴 했지만 맞는 말이었다. 리안이 황제에게서 즉각적인 정보 공유를 얻어내고 싶다면, 리안 역시 뭔가를 내놓아야 했다.

“나와 견하에게 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루우 네 계획에는 협력해줄게. ‘적극적으로’.”

이게 루우가 얻을 수 있는 최대한의 확답이겠지. 리안은 루우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태사가 그 약속만 지켜준다면, 나도 태사에게 정보 공유를 아끼지 않을 거야. 주견하 때문에 태사가 이 문제에 절실하게 매달리듯이, 나 또한 그렇거든.”

리안은 무슨 뜻이지, 하는 눈빛을 보냈다.

“아, 오해는 하지 마. 별다른 뜻은 없어. 주견하가 꽤 괜찮은 미소년이긴 해도, 굳이 태사한테서 빼앗을 생각까진 없거든. 그냥 내 문제 때문에 주견하가 ‘중요한 인물’이라는 뜻이야.”

“…일단은 그 얘기부터 해보자. 견하, 저대로 둬도 문제가 될 것이 없는 거야?”

“하나씩 확인해보자. 태사, 이번 쿠데타 진압 때, 동명역에 주견하를 보낸 건 태사의 뜻이야?”

“그래. 내 명령이었어.”

“그런 잔혹한 살상을 명령한 것도 태사의 뜻이야?”

리안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말했다.

“……보고 받은 바로는 상당히 격렬한 전투였다고 들었어. 동명역 안에서 반란군의 피를 씻어내는 데 상당히 고생했다더군. 대강 어떤 참상이었는지 추측은 되지만, 현장에 있던 사람 말을 듣고 싶어.”

“필요 이상의 잔인함이었어. 주견하의 전투 방식은.”

사람은 피가 가득 든 주머니나 마찬가지다. 그 신체를 손상하면 많은 피가 흘러나온다.

그러나 그걸 온 바닥과 벽에 골고루 펴 바르지 않는 이상, 일부러 시체에서 짜내지 않는 이상, 그런 피바다가 되긴 힘들다.

“보통 빠르고 효율적인 전투 방식을 추구하면, 그만큼 적의 고통도 최소화돼. 빨리 죽으니까. 하지만…… 예를 들자면 주견하는 베는 것보다는 ‘짓이기거나’, ‘뜯어내는’ 방식을 반복했어.

전투 중에 종종 잔혹함과 광기에 취하는 사람이 있긴 한데, 주견하는 거기서 그치지 않아. 주견하는 그 광경이 어떤 ‘공포’를 불러일으키는지 명확히 의식하고 한 거야. 내가 옆에서 전투를 가르칠 때는 다르지만, 혼자 전장으로 내보내니 결국 이렇게 되는군.”

루우는 양손으로 뒷머리를 받쳤다.

“즉, 태사가 의도한 잔혹함은 아니라는 거군.”

루우의 이야기를 듣던 리안의 얼굴에 희미한 흔들림이 감돌았다.

“그거, 견하에겐 안 좋은 일인 건가?”

“그 전에 하나 더 확인할 게 있어. 태사는, 주견하를 보면서 ‘어린애처럼 유치하다’거나, ‘아무리 그래도 연하구나’라는 식으로 생각한 적 있어?”

리안은 곰곰이, 견하와 연인이 되기로 한 이후의 기억을 되짚어봤다. 외적으로는 소년이구나, 귀엽구나, 하고 여긴 적은 많다.

그러나 유치하다거나, 연하남의 한계를 느낀다거나 한 적은 없다.

견하는, 정신적으로 충분히 의지할 수 있는 남자다.

“성격이야 워낙 어른스러워서 그럴 수 있다고 쳐도, 사고, 즉 판단력 자체가 리안 너와 대등한 수준에 이르렀다면, 잘 생각해봐야 해.”

이단 능력은 상당한 지능의 성숙을 동반한다고 한다.

이단은 자신의 구성 원리와 그 구현 형태, 즉 ‘이’와 ‘기’를 파악한 자니까.

같은 논리로, 자신의 지식 체계를 파악하고,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렇게 할 수 있다면 다음 지식으로 나아가는 속도는 비약적으로 향상된다.

그 지식의 응용과 실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나는 이렇게 생각해.”

리안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보며, 루우는 말했다.

“지나치게 빨라. 지식과 능력이 향상되는 속도가. 그리고 이단 능력에서도 너무 이례적인 모습들을 보여줘.”

“단순히 정도의 문제인 건……?”

루우는 고개를 저었다.

“파멸인이 나타났을 때 인간을 향해 보인 살의, 그거 주견하가 보이는 잔혹성하고 닮았어. 그 ‘구체’들이 파멸인을 소환하는 것, 주견하가 다른 공간을 열고 하얀 괴물들을 뿜어내는 것과 비슷하지 않아?

그리고 그런 하얀 촉수들을 향해 ‘아이들’이라고 말하는 건, 확실히 이상해.”

반대로 뒤집어보자면, 이라고 루우는 말을 이었다.

“그 징그러운 구체들이 ‘아이들’을 소환한다는 느낌으로 파멸인으로 불러내는 게 아닐까. 주견하처럼 어떤 필요 때문에, 파멸인은 인간을 죽이려 드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주견하는 파멸인, 파멸인류의 행동 원리를 파악하기 위한 중요한 단서야. 우리가 우려하는 사태를 막을 방법도, 주견하에게 있을지 몰라.”

리안은 팔을 풀었다. 똑바로 루우를 향해 걸어와, 얼굴을 바짝 댄다.

그 움직임은, 견하에게는 입을 맞추겠다는 신호였다. 그러나 지금 루우에게 하는 같은 동작은, 마치 물어뜯어 버리겠다는 뜻 같았다.

“견하를 위해서라면 협력하겠습니다. 하지만 견하를 이용만 하고 버린다면, 폐하껜 허동주와 같은 운명이 기다릴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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