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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소녀는 대원수가 되었다-121화 (121/541)

혼돈획책(8)

돌이켜보면, 어쩌다 여기까지 왔을까, 하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견하는 1929년 4월부터 1930년 2월을 앞둔 지금까지의 시간들을 그렇게 한마디로 정리했다.

리안, 효윤과 우연히 만나고, 부모님을 잃고, 복수를 다짐하고, 리안의 정권에서 일하기 시작하고, 그녀와 사귀게 되고,

어느새…… 감찰국 국장이라는 자리에 이르렀다.

부모님의 시신은 리안이 보낸 군인들이 수습했다. 장례식은 치르지 않았다.

견하는 장례식에서 자신이 어떤 모습을 보일지, 자신이 없었다. 내전이라는 더 시급한 문제가 눈앞에 있기도 했고.

무덤의 위치는 알고 있다. 하지만 그 무덤에도 한 번도 찾아가지 않았다.

아마 ‘복수’를 마치면, 그때 찾아가지 않을까 싶다.

“복수를 마치고 난 다음이라…….”

그때도 이, ‘감찰국 국장’이라는 일을 계속하고 있을까. 아니면 평범한 고등학생, 또는 대학생으로 돌아가게 될까.

지금에 와서는 복수라는 게 가능할지 어떨지도 잘 모르겠다.

내전을 거치면서, 어느 평범한 가족이 파괴된 사례는 수도 없이 많았고, 견하의 일도 그런 사례 중 하나로 묻히게 될 것 같았으니까.

그리고 견하는 요즘, 복수심 이외의 동기로 움직이고 있다.

조직을 만들고, 권력을 다져가는 데서 오는 뿌듯함.

이런 기분의 정체가 대체 무엇인지는 불분명하지만, 어쨌든 견하는 일을 즐기고 있었다.

미리안, 연상의 여자친구가 보여주는 매력도, 그의 삶을 윤택하게 해주는 요소다.

가끔 리안과 포옹을 할 때, 귓불과 쇄골 사이에서 맡을 수 있는 은은한 향기는,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마력이 있다.

때로는 반짝반짝 빛이 나는 것처럼 매끄러운 두 다리. 그 다리에서 그대로 이어지는 뽀얀 발뒤꿈치를 떠올려본다.

그러다 보면 견하의 얼굴은 귓등까지 빨개지곤 한다.

리안은 견하가 성인이 될 때까지 일정 선을 넘지 말라고 단호하게 이야기하지만, 솔직히 그냥 다 무시하고 멋대로 하고 싶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러니까 아마, 꽤 오랫동안, 이 일을 계속할 것 같다.

나이에 비해 이상할 정도로 어른스럽기는 해도, 주견하는 아직 소년이다. 소년은 사랑하는 소녀 옆에서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고, 그러니 계속 그 자리에 머무르려 할 것이다.

물론 이 소년의 무서운 점은, 그런 인간적인 면모 너머에 있다.

“이익서, 당신의 역할은 내가 출국해 있는 동안 소년과의 유지나 과장을 보좌하는 것이다. 유지나 과장은 국장 대리를 맡는다. 보좌의 의미를 잘 생각하도록.”

“알겠습니다.”

‘당신’이라고 서슴없이 하대하는 소년을 앞에 두고, 이익서 역시 망설임 없이 상급자에 대한 예절을 보였다.

그러나 견하는 그 대답이 정말로 알겠다는 건지, 아니면 군인 특유의 습관적인 대답인 건지 확신하지 못했다. 일단은 판단을 보류했다.

견하가 염려하는 건, 이 이익서라는 사람이 나이와 경력을 믿고 유지나의 머리 위에서 건방지게 굴려고 하지 않을까 하는 점이었다.

유지나는 엄연히 이익서의 상관이자 선배라는 점을 확립해 둘 필요가 있었다.

“내가 아즈텍으로 가자마자 태사 각하의 시찰이 있을 예정이다.”

“태사 각하께서……”

“우리 감찰국 조직이 얼마나 충성스러운지, 쓸모가 있을지를 평가하는 자리가 되겠지. 한편으로는 자신을 입증할 자리다.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는 스스로 판단할 수 있겠지.”

“예.”

이 정도면 충분한 당부와 경고가 됐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견하는 다른 쪽으로 화제를 돌렸다. 이익서가 시원치 않은 인간이라면 치워버리고 대체품을 찾으면 그만이다.

“새 학기는 3월부터지. 그러니까 대학 내에서 조직을 만들어나가는 작업도 3월부터 시작할 수 있다는 말이야. 대략 한 달 이상의 시간이 남았군.”

“그렇습니다.”

“그동안 감찰국 내에서의 업무를 익혀두도록. 나제홍 실장님을 비롯한 상관들 얼굴을 익혀두는 것도 좋고.”

거기까지 이야기하고 이익서는 내보냈다.

견하의 눈은 다시 지나를 향한다.

“보고 싶을 거예요.”

“그런 장난 칠 정신은 없을걸. 휴가는 즐거웠어?”

“뭐 그냥 휴식이었죠. 재미있을 것까진.”

“그렇게 말하면 국장 대리를 맡겨놓고 떠나는 게 미안해지잖아.”

견하가 쓰게 웃자, 지나도 장난스레 고개를 갸웃하며 미소를 돌려준다.

“너무 미안해하지 않으셔 돼요. 국장 대리라는 자리, 믿음의 표시라는 거 아니까.”

“국장 대리이기 때문에 감찰국 직원들에 대한 생살여탈권도 그대로 주어져. 그게 무슨 의미인지는 알지?”

“항상 긴장하고, 조금이라도 수상쩍은 기미가 보일 때는 주저 없이 제거할 것. 잘 알고 있어요.”

“기존 직원들을 관리하는 건 너도 요령이 붙어서 잘해나갈 거야. 내가 신경 쓰는 건…… 이익서에 대한 일이지.”

지나는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못마땅하다기보단, 이해가 잘되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그렇게까지 생각하실 건 아직 없지 않나요? 지금은 파악하는 단계라고 봐야…….”

“유지나, 내가 지금 몇 살이지?”

“생일이 아직 안 지나셨으니까 열일곱 살이시죠.”

“새 학기도 시작하지 않았으니 그냥 고등학교 2학년생이기도 해. 우리가 생각 이상으로 높은 위치에 올라앉아서 잊어버릴 수도 있긴 한데, 우린 아직은 그냥 애들에 불과하다는 걸 잊지 마.”

견하의 말대로, 그들은 아직 고등학교 2학년, 1학년, 애들에 불과했다.

태사의 새로운 정부 아래에서 많은 권한을 받고 여러 가지 일을 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들이 경험이 부족한 아이들인 건 변하지 않는다.

물론, 권력 쟁탈의 소용돌이 한가운데에 있었던 만큼, 일반적인 아이들보다는 경험도 많고 더 성숙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뿐이다.

자칫 소꿉놀이가 될 수도 있는 감찰국의 활동을 떠받치고 있는 건 태사의 권력과, 주견하가 가진 이단으로서의 능력 정도다. 나머지는 허세나 다름없다.

그렇기에 견하는 조직원들의 능력을 조금이라도 더 빨리 신장시켜서, 어엿한 국가기관으로 기능하게 만들려 한다. 여기에는 약간의 조급증마저 보인다.

“우리는 내전을 겪었지. 지난번에는 쿠데타 진압에도 참여하고, 그 밖에도 죽을 고비도 여러 번 넘겼고, 적을 죽이기도 해봤어. 그렇기에 지나 네가 감찰국의 기존 직원들을 다루는 데는 큰 무리가 없을 거야. 너는 소질도 있고, 그만한 경험도 쌓았으니까. 하지만,”

잠깐 말을 멈추며, 견하는 딱딱한 표정을 지었다.

“그만한 경험은 이익서도 쌓았어.”

물론 이익서도 다른 정부 고관들에 비하면 어린애에 불과하다. 하지만 감찰국의 국장 이하 다른 직원들에 비하면 명백히 어른이다.

몇 년 더 연상이라는 그 경험의 격차는 무시할 수 없다. 게다가 그는 내전의 최전선에서 싸우고 살아남은 사람이다.

“경계해. 우리는 그를 길들일만한 경험을 쌓을 시간이 필요해. 시간이 충분하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그 사람을 버려야겠지.”

***

익서가 견하의 집무실을 나와 복도를 걷고 있을 때, 뒤에서 누군가 불렀다.

“자네가 이익서 군인가?”

돌아보자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을 법한 중년 사내가 익서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익서는 그의 제복을 보고 그가 정치경찰실 실장 나제홍임을 알 수 있었다.

습관적으로 경례를 올렸다.

“아, 여긴 군대처럼 그럴 것 없네. 자네나 나나 예비역 아닌가. 현역은 주견하 국장 정도지만, 그것도 격을 맞추기 위한 계급이라, 그렇게 딱딱하게 하진 않아도 돼.”

익서는 훑어본다는 인상을 주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최대한 나제홍의 외양을 눈에 담았다.

형식적이라고는 해도 정치경찰실의 수장이자, 주견하의 상관이다. 눈치를 살피지 않을 수 없었다.

“잠깐, 같이 걸으면서 이야기 좀 나눌 수 있나? 나가는 길이지? 나도 외출할 일이 있어서.”

“……예.”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속도로 걷는다. 약간 뒤처져서 걷는 이익서가 따라 걷기 좋은 속도다. 의도된 건지, 아니면 원래 이런 식으로 걷는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앞으로 감찰국에서 청년과를 신설하기 위한 밑 작업 임무를 맡았다지?”

“그렇습니다.”

“그래, 주견하라는 사람을 직접 만나보니 어떤가?”

무슨 의도를 품은 질문일까.

나제홍은 태사와 주견하 사이에, 적당히 내세울 인물로 선택된 자라고 들었다. 아직 고등학생인 주견하를 태사 직속으로 두는 파격은 지나치니, 실권은 주견하가 갖되, 명목상 상관으로 나제홍을 배치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 질문은, 자신의 속을 캐보기 위한 일종의 시험일까?

익서는 신중하게 답을 골랐다.

“꼼꼼하신 상관이라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핫, 하고 나제홍이 웃음을 흘렸다.

“교과서적인 답이구만. 자네, 어디 가서 미움은 안 사겠어.”

“…….”

감사하다고 하기에도 애매했기에, 익서는 잠자코 듣기만 했다.

“그럼 내가 느낀 인상을 한번 말해볼까. 주견하는 뛰어난 인물일세. 그리고 무서운 사람이기도 하지.”

무섭다, 라.

“그럴 일은 없겠지만 혹시라도 아직 소년에 불과하다, 그렇게 얕보고 있다면 그런 생각은 어서 버리게. 물론 소년이지. 맞아. 그런데 저 소년은 다음 아닌 허동주를 죽인 사람이야.”

그 이야기는 들었다. 태사에게 평화를 제의하러 왔다가 기습을 가한 허동주를, 오히려 역공을 가해 주살한 이단이 바로 주견하라고.

“물론 소년에 불과한 건 맞지. 하는 일마다 미비한 점이 반드시 있어. 내가 주로 하는 일이 그런 주견하와 감찰국의 업무를 뒤에서 지원하는 거야. 실상 나야말로, 주 국장의 보좌관이나 다를 바 없네.”

자조는 섞여 있지 않다. 그저 담담하게 사실을 나열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그 와중에, 주견하는 끝없이 배우고 있네. 언젠가는 감찰국에 예전 야별초와 같은 기능을 회복시킬 생각인지, 내 어깨너머로 일 처리를 열심히 배우고 있지. 그리고 한 번 저지른 실수는 두 번 반복하지 않네. 이게 얼마나 무서운 건지 아는가?”

익서는 끄덕였다. 두 번 다시 같은 실수를 하지 않는다, 말은 쉽지만 그걸 실천에 옮기는 사람은 드물다. 보통은 두 번, 세 번 같은 실수를 한다.

한 번에 고친다는 건, 그 실수의 원인을 완벽하게 이해했다는 뜻이다.

“하물며 시계도, 오차를 고쳐도 시간이 흐르면 다시 오차가 나게 되어 있네. 한 번 오차를 고쳤더니 영원히 오차가 생기지 않는 시계란, 이미 인간의 산물이 아니야. 그건 신의 기계지.”

동감이었다. 익서는 그렇게 생각했다.

“오래지 않아 주 국장은, 정치경찰실을 총괄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게 될 거야. 나는 그때까지 내 분수에 맞게, 태사 각하의 뜻대로, 주 국장의 뜻대로, 그렇게 중간 역할을 하다가 은퇴하면 돼. 태사 각하께서 노후는 넉넉하게 챙겨주시겠지. 나는 그 정도면 만족하네.”

분수를 알아야 하네, 내 말 알아듣겠는가, 라고 나제홍은 덧붙였다.

“……예.”

익서가 할 수 있는 대답은 그것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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