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돈획책(7)
아주 잠깐 주어진 휴식 시간.
리안이 ‘미성년자에겐 아직 아니야’라고 단호하게 이야기했기 때문에, 마음이 가는 대로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가벼운 차림의 그녀를 껴안고, 그저 가만히 누워서 휴식을 취하는 것 정도는 괜찮다고, 허락받았다.
품에 얼굴을 묻고, 그녀의 향기로 머릿속을 몽롱하게 채우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누워있는 시간.
정신이 쉬는 시간이다. 반쯤은 잠의 바다에 잠겨, 또 반쯤은 그 표면에 떠서, 견하는 리안이 자신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주는 감촉을 즐겼다.
이마에 굉장히, 부드러운 입술이 와 닿는다. 견하는 고양이처럼 눈을 감았다.
“이렇게 쉬는 중에 일 이야기하는 멋 없는 여자라고 생각해도 어쩔 수 없지만…….”
무슨 이야기를 꺼내려는 걸까. 견하는 눈을 떴다. 고개를 살짝 위로 들어, 갸름하게 모이는 턱과, 작은 입술을 거쳐, 커다란 눈을 바라본다.
견하가 품에 안긴 자세였기 때문에, 리안은 내려다보고, 견하는 올려다보게 된다. 리안의 입술이 작게 귀여워, 라고 말한 것 같았다.
“귀엽다고 말한 다음 뭔가 시키려는 건가요?”
“이런, 들켰네.”
명령을 받는 대신 뭘 받아 가볼까. 견하는 조금 손을 대담하게 움직여보기로 했다.
리안의 등까지 감싼 팔을 조금 풀어, 맨어깨를 만지다가, 그 아래로 시원하고 매끈한 피부에 손을 댔다.
상박 안쪽에 손을 넣어 간질여보고 싶기도 했지만, 그건 이야기를 들으며 생각해보자.
상황 탓일까? 리안의 얼굴이 조금 붉어진 것 같았다.
“……아즈텍에서 일어나는 정세 변화에, 바라트가 개입을 시작한 모양이야.”
견하는 손을 멈췄다.
“바라트가요?”
확인하는 물음이 아니라, 정말로 의아해서 묻는 물음이었다.
바라트와 아즈텍 사이의 지리적 거리도 거리거니와, 바라트가 그럴 국력이 되던가? 아즈텍이라는 초강대국에 개입할 군사력도, 경제력도, 정치적 영향력도 부족한 나라다.
아즈텍의 정세 변화에 개입하는 게 가능해지려면…… 앞으로 언젠가 탄생할지도 모를 ‘다이온 연방’ 정도의 체급은 돼야 한다.
“물론 아즈텍 정치권을 뒤흔들 만큼 대단한 건 아니고, 간첩들의 활동이 활발해진다는 보고가 있어.”
뭐 그 간첩이라는 것도, 바라트가 직접 파견한 자들은 거의 없고, 대부분은 아즈텍 내 사회주의자들이 바라트 공산당의 지도를 받는 것이겠지만. 리안은 그렇게 덧붙였다.
“어떻게 생각해?”
“일단은…… 아즈텍이 경제적으로도, 내부 정치적으로도 혼란스러운 틈을 타서 사회주의권을 확대하려는 시도가 아닌가 싶어요.”
“역시 그렇지? 멀리 떨어진 나라긴 해도, 이른바 ‘자본주의의 총본산’이라 할 수 있는 나라, 세계 제1의 초강대국을 공산화하면, 어쨌든 외교적인 고립은 벗어날 수 있으니까.”
아즈텍이 공산화된다고 해서 바라트의 뜻대로 움직이는 위성국이 되어 주리라는 보장은 없다.
그러나 바라트와 그 위성국들이 인도양 일대에 고립된 현 상황에서, 먼 해외라고 해도 공산주의라는 이념으로 묶일 수 있는 나라가 탄생한다면 큰 힘이 된다.
공산 아즈텍 역시 태평양과 대서양 사이에서 고립된 건 마찬가지일 테니, 해외의 친구와 손잡는 걸 꺼리진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바라트가 획책하는 아즈텍의 공산화는, 얼마만큼 가능성이 있을까.
“여전히 대공황이 사그라들 기미는 보이지 않아. 아즈텍 시민들의 불만도 서서히 올라가고 있고. 쿠아우테목에서 일어난 테러와 정치적 혼란은, 기존 정부에 대한 불신을 심어줬지.”
“이런 상황이면 충분히 아즈텍 내에서 공산혁명을 노려볼만 하다, 그렇게 생각했겠네요.”
“나도 그렇게 가능성이 작지만은 않을 거라고 봐. 우리처럼 내전을 겪을 수도 있지. 공산주의자들이 일단 작은 틈을 파고들면, 그 다음부턴 점차 성장하는 걸 막기 힘들 테니까.”
리안의 말이 옳다. 그런 일이 일어날 가능성이 얼마든 간에, 가능하다고 보고, 대비해야 한다.
“내전이 일어나면 대공황은 정말 끝으로 치달을 거예요.”
“고려의 내전이 불러온 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혼돈이 기다리고 있겠지.”
세계 1위의 경제력을 지닌 국가가 한순간에 세계 경제 무대에서 탈락. 각각 한 순위씩 올라간다고 좋아할 일이 전혀 아니다.
세계 경제는 긴밀하게 묶인, 정교하게 쌓아 올린 탑과 같다. 가장 커다란 조각이 빠져버리면 탑은 무너진다.
“어떤 식으로든 내전이 수습되거나, 혹은 어떤 파벌이든 정변이나 혁명을 성공시켰다면, 새로운 아즈텍이 나타나겠죠.”
“그 아즈텍은 과연 고려에 우호적인 나라일까, 아닐까.”
기존의 정치권이 아즈텍의 정세를 안정시키는 데 성공한다면 좋겠지만, 최악의 상황에는 대비해야 한다.
물론 그렇게 되지 않도록 아즈텍의 현 정부를 지원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그러나 거기엔 분명 한계가 있다.
“공산 아즈텍이라면 바라트와 손잡고, 태평양 방향이든, 대서양 방향이든, 압박을 해나가겠지.”
“대서양 방향 압박이라면 유럽이 괴롭겠네요.”
로마 제국, 루스계 공국들, 신성 제국, 브리튼, 에스파냐 등의 나라들. 바다 건너편에서는 아즈텍의 압박이, 페르시아 방면에서는 바라트와 위성국들의 압박이 시작될 것이다.
“태평양 방향이라면, 동아시아가 괴로울 테고.”
고려, 몽골, 키타이, 낭키아스, 일본, 대예, 보우슈엥, 라타나코신 등. 아즈텍은 극북 해협을 통해 고려를, 혹은 태평양을 가로질러 일본공화국을 압박하려 들 수 있다. 바라트는 대예나 라타나코신, 티베트를 위성국화하며 동쪽으로 확장해올 테고.
“거기에 저항하려면 다이온 연방이 필요하지 않을까.”
“필요하다고 해도 먼 미래의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촉박할 수도 있겠네요.”
“시간이 충분하길 빌어야지.”
“혹은 지금 아즈텍 내에서 성장하고 있다는 극단적 민족주의자들의 정권이 들어선다면…… 어떨까요?”
“그것도 꽤 위험하다고 봐야겠지. 허동주나 신수덕과 다를 바 없는 무리야. 어떻게든 그런 세력이 정권을 잡으면, 허동주가 그랬듯이 세계정복 계획이라도 짜 두지 않았을까.
문제는 허동주에겐 그걸 실현할 역량이 없었던 것과 달리, 아즈텍에는 그럴 역량이 충분하다는 거지.”
내전을 통해 경제는 파괴되고, 군사력만 비대해진다면, 그런 흐름은 가속화될 것이다. 리안은 그렇게 예측했다.
“그때는 바라트와의 협력도 꺼려선 안 돼. 뭐, 어느 쪽이든 다이온 연방이 필요하긴 하겠네.”
두 사람은 다시 말없이 서로를 껴안았다. 하지만 견하의 마음속에는 뭔가 걸리는 게 있었다. 바라트 공산당이 아즈텍에 개입한다, 라.
신수덕도 아즈텍으로 망명했다고 했지.
바라트 공산당이 아즈텍 문제에 개입할 수 있다면, 신수덕도…….
“신수덕, 아즈텍 연방에 있다고 했죠.”
“공식적인 망명은 아니지만, 거기 있는 건 맞아.”
“거기서 이번 쿠데타를 배후 조종했다면, 적어도 신수덕을 보호해주거나, 지원해주는 조직이 있다는 뜻이겠죠?”
리안이 견하의 머리를 더 꼭 끌어안았다. 볼과 귀에 닿는 피부의 감촉이 기분 좋았다.
“역시 똑똑해. 그래, 그리고 그 조직으로 가능성이 큰 건,”
“성향이 비슷한 조직이겠죠.”
신수덕은 고려 내 반란을 배후 조종했다.
그…… ‘철혈의 꽃’이라는 단체는, 쿠아우테목 폭탄 테러의 배후로 추정된다.
둘이 손을 잡았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신수덕과, ‘철혈의 꽃’이 손을 잡았다면, 철혈의 꽃은 신수덕의 망명 생활을 지원하고, 신수덕은……”
“아마 자기네 일파가 내전을 통해 얻은 교훈을 전달하지 않았을까. 이제 막 정변을 시작하고 싶은 조직에게, 경험자의 조언은 큰 도움이 될 테니까.”
“어디까지나 가정이지만 말이죠. 그래도 멀리 떨어진 바라트가 아즈텍 정세에 개입할 수 있다면, 그 나라에 있는 신수덕이 어떤 방식으로는 개입할 방법도 있겠죠.”
“그래, 그래서 말인데…….”
이제 뭘 시킬 건지 이야기하려나 보다. 견하는 반쯤 체념한 듯 다시 고개를 내리고, 리안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물론 군에서도 전문 암살조를 보내겠지만, 너도 아즈텍에 다녀와 줬으면 해서.”
견하는 고개를 들지 않은 채, 눈만 깜박였다.
“저도 신수덕 암살 임무를 받는 건가요?”
“넌 몰래 누구를 처리하기보다는 다 휘저어놓는 전투 방식이라, 암살이라고 하긴 어렵지만.”
“신수덕을 처리하는 김에, 그 ‘철혈의 꽃’도 휘저어놓길 바라시는 거 아니에요?”
철혈의 꽃에 타격을 준다면, 그건 아즈텍의 현 정부에게도 도움이 된다. 어쨌든 고려에겐 아즈텍이 안정을 되찾는 편이 낫다.
“음, 글쎄.”
물론 리안은 그런 건 공식적으로는 인정하지 않는다.
견하는 고개를 들었다.
그가 정말 좋아하는 태사는, 소녀의 얼굴로 은은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
신수덕은, 반드시 고려의 암살조가 오리라고 확신했다.
“배후에 정말 내가 있는지, 없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신수덕이 살아있다, 그리고 소재 국가도 확실하다. 이 정도면 고려는 암살조를 보낸다. 미리안의 입장에서든, 보르지긴 루우 테무르의 입장에서든, 신수덕은 죽어야 했으니까.
그렇다면 암살을 피할 방법에는 무엇이 있을까.
또 다른 나라로 망명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미리안이 암살을 포기할 리가 없다. 수십 년이 걸린다 해도 계속해서 보낼 것이다.
아마 신수덕이 수명이 다해 자연사한다 해도, 적어도 신수덕의 무덤을 파헤쳐서 시체 조각 하나라도 가져가려 할 것이다.
게다가, 다른 나라에서도 지금처럼 안전하게 지낼 수 있다는 보장이 없다. 고려와 우호 관계에 있는 여러 나라는 신수덕의 신병을 고려로 인도하려 들지도 모른다.
그러면, 아즈텍에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암살자가 암살자인 데에는, 다 이유가 있지.”
암살자는 ‘암살’을 해야 한다. 그러니까 목표가 있는 국가나 사회에 조용히 섞여들어서, 목표만 조용히 처리한 후, 역시 조용히 빠져나와야 한다.
하지만 그게 도저히 불가능한 상황을 만든다면?
항공기가 폭탄을 쏟아붓고, 기관총이 불을 뿜고, 화포가 화력을 자랑하는 전장에서 암살자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그런 환경 속에선 ‘조용히’라는 전제가 불가능하다.
그렇다.
아즈텍을, 전장으로 만들자.
아마 입국부터 힘들 것이다.
“그리고 철혈의 꽃에게, 내가 꼭 필요한 상황도 만드는 셈이지.”
아즈텍에 혁명, 혹은 내전이 일어난다면, 철혈의 꽃은 신수덕의 조언을 더욱 갈망할 것이다. 그렇다면 더 많은 지원과 보호를 바랄 수 있다.
“그럼, 착수해볼까.”
내전은 정말 의도치 않게, 하루아침에 일어나기도 하지만, 그런 내전은 승패를 장담할 수 없다. 그러니, 차근차근, 준비 단계를 밟아나가야 한다.
“1단계는, 고려에서 일어난 쿠데타 소식을 활용하는 쪽으로 해 볼까. 어차피 일어났다면 써먹어야지. 나를 이렇게 곤란하게 했다면, 그 정도 쓸모는 해야 하지 않겠어?”
고려에서 일어났다가 순식간에 진압된 반란. 이걸 대공황으로 인해 고려의 정세가 불안정해진 결과라고 선전하자.
대단히 과장된 소문이지만, 사람들은 소문의 과장된 정도까지 세세하기 따지진 않는다. 그저, 자신의 불안한 예감을 만족시켜줄 근거로 쓸 뿐.
불안을 퍼트리자.
사회적 격변에 대한 불안을 퍼트리면서 공산주의자들을 견제하고,
격변을 통제할 힘이 없다면서 현 정부에 대한 불신을 심고,
안정을 가져올 강력한 새 정부의 필요성을 널리 알리자.
불안과 희망의 이중주를 시작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