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돈획책(6)
루우는 방에 들어온 효윤의 모습을 바라봤다.
자기보다 머리 하나는 큰 키. 아마 견하와 비슷하지 않을까?
게다가 고개를 흔들 때마다 허리 언저리에서 찰랑이는 포니테일도 예쁘다.
부럽다는 생각이 든다. 나도 머리카락을 길러볼까.
머리카락 끄트머리를 만지작거리면서, 효윤의 말을 기다렸다.
오래지 않아 효윤이 입을 열었다.
“너, 네 아버지를 증오해?”
무슨 말을 하나 했더니, 아까 점심때 나눴던 이야기의 연장인가.
“아니라고는 못 해.”
“하지만 전에는…… 아버지와 싸우는 게 마음 편치 않다고 했었잖아.”
“증오한다고 해도 아버지가 아닌 건 아니니까.”
루우는 고개를 기울이며, 눈만 효윤 쪽으로 향했다. 왜 그런 걸 물어보는 거야, 라는 표정이었다.
“저번에 칸발리크에서, 너희 어머니, 십수 년째 의식 없이 병상에 누워 계신다고 했었지.”
“그래.”
“그게…… 네가 아버지를 증오하는 이유와 관련이 있어?”
효윤을 향해 시선을 똑바로 고정한 채, 입만 움직여 답했다.
“어느 정도는.”
“그 일, 네 이단 능력과 관련이 있다고 했지. 그때는 굳이 듣지 않았지만, 지금은 듣고 싶어.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야겠어.”
“내가 그때부터 네가 듣고 싶어질 때까지 그 이야기를 잘 보관해뒀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약간 날을 세운 물음에 효윤은 주춤하며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곧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말을 이었다.
“너한텐 이야기해야 할 이유가 있을 거야.”
시치미를 떼듯, 루우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런가?”
“그……‘파멸인류’에 관한 문제, 주견하에 대한 문제, 가능한 협력해주는 사람이 많아야 할 테니까.”
그리고 그녀가 황제가 되려 했던 이유도, 몽골의 황위를 계승하려는 이유도 이와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권력을 향해 일직선으로 치닫는 리안과 달리, 루우에겐 권력이 다른 무언가를 위한 수단이라는 느낌이 든다. 하지만 효윤은 그 말을 삼켰다.
“이젠 제법이네.”
“언제까지 리안 언니나 너나 견하 옆에서…… 보조 역할만 하고 있을 순 없으니까.”
“이번에 동명역에서 그 피바다를 보고 생각한 거겠지? 이대로는 도저히 안 되겠어, 라고.”
이번에는 효윤이 루우의 추궁에 동의했다. 그녀는 말없이 끄덕였다.
“글쎄, 그러면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까.”
루우는 옥좌 위에서 몸을 움츠렸다. 휴식을 취하고 있던 그녀는, 늘 그렇듯이 짧은 바지와 민소매를 즐겨 입는다.
하얗게 드러난 팔다리로 자기 몸을 감싸며 움츠리자, 커다란 옥좌와 대비되며 무척 작아 보였다.
어찌 보면 옥좌의 등받이가 그녀를 짓누르는 것 같기도 하고.
효윤이 약간의 안쓰러움을 섞어 루우를 보는 동안, 루우는 생각을 정리했는지 입을 열었다.
“이단에 관한 연구의 초점은, 결국 ‘이단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라는 질문으로 귀결돼. 군사적 목적으로 양산해내든 어쩌든, 그런 목적을 효율적으로 달성하려면, 일단은 원리를 파악해야 하니까.”
고개는 숙인 채였다. 시선은 하얀 발가락 끝을 향한 건지, 아니면 그 너머에 있는 바닥을 향한 건지 알 수 없었다.
“이단의 기원에 대해 사람들은 두 가지 설을 제시했어. 하나는 각지에서 발견된 ‘파멸인류’가 이단의 기원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야. 이건 이단의 인위적 양성 실험을 통해서 상당히 가능성이 큰 가설이 됐지.
아마 틀리진 않았을 거야. 내가 보기에도 그래. 다만 이 경우 파멸인류는 대체 무엇이고, 대체 왜 나타났는지에 대한 의문이 남지만…….”
“다른 하나는, 뭐지?”
“파멸인류 가설로는, 설명하지 못하는 부류가 있어.”
루우는 잠시 말을 멈췄다. 효윤은 그녀가 멈춘 말이 무엇일지 알 것 같았다. 그래, 주견하도 특수한 이단이긴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루우도 특수하다.
루우가 소환하는 ‘용’은, 아니 늑대와 사슴과 파충류를 뒤섞어 놓은 듯한 그 하얀 덩어리는 대체 무엇인가. 그건 분명, ‘파멸인류’와는 별개의 존재였다.
“자신들의 시조가 동물이라고 설명하는 신화는 많아. 용, 늑대, 사슴, 곰, 호랑이, 등. 그리고 나처럼, 그런 신화를 체현한 이단들도 가끔 있지.
연구자들은 추측하기를, 짐승과 유사한 형태를 띠고 있지만 파멸인류에 가까운, 그러나 파멸인류와 동일한 건 아닌 어떤 존재가, 나 같은 이단의 기원이 아닌가 하고 있어.”
다시 눈을 들었다. 이번에 효윤을 향해 보내는 시선은 그다지 따갑지 않았다.
“그걸 신종(神種)이라고 불러.”
신종…… 신의 종족. 하지만 그렇게 부르니 마치,
“신을 성스럽고 기이한 존재가 아니라, 마치 하나의 생물 종처럼 부르는 것 같지. 그래, 신종에 대한 연구는, 신을 과학적으로 분류할 수 있는 하나의 생물 종으로 규명하려는 연구라고 봐도 좋아. 그런 느낌으로 만든 용어니까.”
“신종에 대한 연구는, 그럼, 어느 정도인 거야?”
“파멸인류에 비하면 거의 진척된 게 없어. 너도 봤잖아? 신환도역에서 허동주와 싸울 때, 내 근처에 소환됐던 거. 그건 ‘신종’의 잔여물 같은 거야. 진짜 신종은 아니지. 신종은 그렇게 잔여물 따위로, 혹은 기록에서나 나타날 뿐, 한 번도 실체가 발견된 적은 없어.”
“하지만 너와 같은 특수 사례는 분명히 존재하고 있다, 그렇기에, 신종 역시 과거 어떤 시점에선 분명히 있었던 존재다, 그런 말이야?”
“정확해. 아직도 신종 기원설을 바탕으로 이단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그런 가정에 매달리고 있어.”
좋다. 이걸로 다음 대화로 나아가기 위한 배경 지식은 갖췄다. 효윤은 한 번 숨을 크게 들이마신 뒤, 물었다.
“너희 어머니가 그렇게 되신 거, ‘신종’ 연구와 관련이 있는 거야?”
루우는 다시 시선을 내렸다. 내리깐 눈꺼풀, 그 끝의 속눈썹이 정말 길다고, 효윤은 새삼 생각했다.
“…….”
여기서 침묵은 긍정과 같다.
효윤은 그 침묵을 견디며 기다리기로 했다. 추궁한다고 해서 나올 이야기도 아니고, 추궁할 자리도 아니다. 그러기엔 이 방이 너무 컸다.
효윤이 나가면 루우는 이 큰 방에서 다시 홀로 있어야 한다.
그러니까, 말할 준비가 될 때까지 기다리자.
루우가 조금 숨을 들이켜는 것 같았다. 늘 침착한 어조였던 건, 이런 심호흡을 몰래 해왔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잘 들리지 않았을 뿐, 늘 오늘처럼 심호흡을 해왔던 걸까.
“세계대전을 겪은 젊은 몽골 카간은, 다시는 그렇게 침략받지 않을 군사력을 기르고 싶어 했어.”
군사력을 기르는 방법에는 기갑이나 항공 전력을 강화하는 것도 있지만, 이단 전력을 강화하는 것도 방법이다.
20대에 칸발리크를 잃고 북방으로 쫓겨나, 카라코룸을 사수하며 한족이 전 국토를 유린하는 걸 바라봐야 했던 5년.
시레문에겐 강한 군사력이 절박했다. 그리고 절박함은 이성적인 판단을 막기에 충분했다.
“아버지는 몽골 황실이 푸른 늑대와 흰 사슴의 후손이라는 신화에 집착했어. 그리고 고려 황실이 용의 후손이라는 신화가 아버지의 눈에 들었지. 두 황실에서 종종 나타난 이단들…… 아버지는 여기서 신종 연구의 단서를 잡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고, 그래서,”
루우의 어머니에게, 실험을 강요했다.
“어머니는 용의 후손이라 일컬어지는 고려 황실의 먼 방계였어. 나한테 ‘왕서라’라는 이름을 물려준 사람이지. 그런 불행한 결혼을 감수할 때, 어머니가 내세운 조건이 바로 ‘자식에게 고려식 이름도 함께 지어줄 것’이었거든.”
실험은 가혹했다.
이단이 아닌 사람에게, 오래전 물려받은 핏줄 한 조각을 토대로, 강제로 이단 각성을 일으켰다. 나타날지 어떨지도 모르는 신종 이단을 다시 만들어내는 작업이었다.
인위적으로 이단을 만들어내는 통상의 작업과는 달랐다. 입증되지 않은 모든 방식을, 몇 배는 고통스러운 방식으로 실험해보는 것이었다.
실험은 모체뿐만 아니라 태아에게까지 미쳤다.
루우가 첫 아이가 아닌 것은 분명했다.
그 과정에서 어머니의 몸은 만신창이가 됐고, 루우를 낳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의식을 잃었다.
“몇 번이고 아이들을 실험에 쓴 아버지가, 나를 사람으로 보기는 할까?”
그 물음에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없으리라.
“아버지가 나를 대하는 태도가 죄책감인지, 아니면 갑자기 생겨난 부성애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어렵게 얻은 성공작을 아끼는 것인지, 전혀 알 수가 없어.”
내가 아버지를 어떻게 믿겠어, 라고 말하며, 루우는 웃음을 흘렸다.
한 번도 저렇게 웃은 적이 없는 소녀가.
“상황이 이런데 혹시라도 남동생을 얻으려 한다? 그건 단순히 내 황위, 내 계승권에 대한 위협이 아니야. 내 삶에 대한 기만이면서, 어머니한테는 절대로 용서받지 못할 죄를 짓는 거지. 만약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해가 될 그런 시도를 한다면……”
정말 오랜만에 루우의 눈이 금빛으로 빛났다.
효윤은 거기서, 명백한 살의를 느낄 수 있었다.
“이런 말이 주제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뭐라도 말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효윤은 격려 비슷한 것을 입에 담아보기로 했다.
“너는 우리의 황제 폐하야. 네가 어떻게 태어난 사람이든, 고려는 네 나라고, 우리는 ‘충성’이라는 감정을 다 해 헌신할 수 있어. 그게, 너한테 힘이 됐으면 좋겠어.”
루우는 효윤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가, 힘없이 웃었다.
말이라도 고마워, 라면서.
“하지만 나는 이 육신에 자신이 없어. 이단으로서의 능력은 최강이라 불릴만하지. 하지만 태어나는 과정에서…… 과연 결함이 없는 몸이라고 할 수 있을까? 태어나지도 못한 내 형제들처럼 언제 육신이 붕괴해서 없어져 버릴지 몰라.
근거 없는 불안이긴 하지. 반대로 어마어마한 수명을 자랑하게 될지도 모르니까.”
다짐하듯, 루우는 효윤에게 말했다.
“내가 견하에게 흥미를 갖는 건, 내 몸 때문이기도 해. 내가 얼마나 살지, 어떤 인생을 살지, 그 실마리가 견하에게 있을 수도 있거든.
그러니 견하에게 무슨 일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불안은 조금 접어둬도 좋아. 내가 살아있는 이상, 주견하도 반드시 살 거야.”
효윤은 루우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다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에게 해야 할 예를 표하고, 방을 나왔다.
황궁의 복도를 걸으면서,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모두에게 사연이 있다. 모두에게 걱정거리가 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해결의 실마리를 어떻게 잡아야 할지 모를 정도로…… 얽히고설켜 있다.
지켜보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건 잘 안다. 지켜보다가, 뭔가 일이 터졌을 때 비로소 힘이 되어 줄 수 있다. 그렇게 할 힘은 충분히 있다.
그러나 그 일이 있을 때까지…… 그저 발 동동 구르며 기다려야만 한다는 것이, 효윤의 마음에 무력감을 드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