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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소녀는 대원수가 되었다-118화 (118/541)

혼돈획책(5)

견하, 리안, 효윤, 루우. 오랜만에 황궁에 이렇게 네 사람이 모였다.

네 사람이 둘러앉은 식탁. 그 위에는 황궁에서 나온 것 치곤 간소한 점심이 차려져 있다.

“몽골 쪽 타이시인 볼로드에 대해서는 얼마나 파악하고 있어?”

그렇게 세 숟갈을 삼킨 뒤 황제 루우가 꺼낸 말이었다.

타이시. 태사를 일컫는 몽골어다. 루우도 종종 리안을 그렇게 부른다. 두 나라가 서로의 체제에 영향을 받았던 중세 시절의 흔적을 보여주는 단어이기도 하다.

리안은 젓가락을 단정하게 쥔 채, 루우의 물음에 답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별로 파악한 게 없어. 워낙 전면에 드러나지 않은 인물이기도 하고. 안세규 외무장관도 내가 아는 것 이상의 정보를 가진 것 같진 않아.”

라고 생각했었지만, 이라며 리안은 말을 이었다.

“안세규와 거래를 하고, 너를 고려로 보낸 주동자라는 건 파악했지.”

루우의 얼굴에 미묘한 표정이 떠올랐다. 웃는 것도 같고, 짜증이 난 것도 같은 미묘한 표정.

그 표정을 보며 리안은 계속 말했다.

“안세규의 의도, 네 의도는 알겠지만, 볼로드가 어떤 의도로 그런 거래에 응했는지는 여전히 모르겠어. 어쨌든 카간의 대변인일 뿐이라는 세간의 평가와는 확실히 다르지. 나름의 꿍꿍이를 가진 사람일까?”

효윤과 견하는 말없이 황제와 태사의 대화를 들었다. 지금 두 사람이 끼어들 여지는 없다. 좀 더 좁은 범위의 이야기가 나와야 효윤도 견하도 의견을 제시할 수 있다.

미묘한 표정 그대로, 루우는 리안의 말을 받았다.

“태사의 말대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야. 몽골식 입헌군주제가 카간의 권력을 비대하게 유지하는 체제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타이시의 영향력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

그런데 볼로드는 자신의 권력을 거의 사용하지 않아. 아버지가 내세운 꼭두각시라는 평이 나올 만도 하지.”

루우는 ‘하지만……’ 이라며 말을 흐린다. 시선을 옆으로 돌리며. 그 시선 끝에는 별다른 게 없다. 허공을 더듬으며 생각에 잠긴 것뿐이다.

이번에는 효윤이 루우의 말을 거들었다.

“제가 이번에 루우와 칸발리크에서 볼로드를 마주쳤을 때도, 그냥 평범한 중년 아저씨라는 것 말고는 다른 느낌을 못 받았어요. 그 정도 지위에 이른 사람을 ‘평범하다’고 넘겨짚을 수는 없겠지만.”

젓가락을 내려놓은 견하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의견을 냈다.

“정말로 평범할 가능성도 없진 않은 건가? 이를테면, 정치경찰실의 나제홍처럼.”

견하와 리안 사이에 세워둔 꼭두각시의 이름이 나오자, 리안은 피식 웃었다.

“루우가 안세규를 따라 고려에 온 게 몽골 카간의 뜻이고, 볼로드는 그 뜻을 실행에 옮겼을 뿐이라면, 견하처럼 추정해보는 것도 그렇게 틀린 건 아니야. 하지만,”

그렇게 대답하며 리안은 슬쩍, 루우 쪽으로 시선을 건넸다. 루우가 그 시선을 느끼고 다시 식탁 쪽으로 눈을 돌린다.

“아버지는, 분명히 내가 고려에 가는 걸 반대하셨지. 가려면 몽골의 황위계승권을 포기하라고까지 하셨어. 고려의 황제가 되면서 내가 일방적으로 그 약속을 깨버렸지만.”

루우의 말에 나머지 세 사람 모두 키득거렸다.

“안세규와의 거래에 응한 건 아버지가 아니라 볼로드야. 내가 칸발리크를 떠날 수 있도록 지원한 사람도 볼로드고, 아버지에게 타협안을 제시한 사람도 볼로드야. 어떻게 보면 나한텐 참 고마운 사람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지만……”

“……분명 ‘어떤 의도’가 있는 사람이라는 건 부정할 수 없다는 말이지.”

그렇게 말한 견하 쪽을 향해, 루우는 끄덕였다.

“베풂의 의도가 반드시 순수하다고는 할 수 없으니까.”

식사를 마친 네 사람의 그릇이 나갔다. 네 사람은 따뜻한 보리차를 홀짝이며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런 것 치곤, 칸발리크에 있었을 때 볼로드 측에서의 별다른 접근은 없었어. 뭔가를 할 만한 때가 아니어서였을까? 아니면 지금은 의도를 감춰야 할 때라고 판단했든지.”

효윤의 의견이었다.

“혹은…… 내가 고려에 간 후 자신의 의도와 크게 다르지 않게 활동하고 있다고 판단했을 수도.”

문득 생각이 거기 닿았다는 듯, 루우는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리안의 귀가 민감하게 그 변화를 감지한다.

“너의 고려 황제 즉위, 관세동맹, 몽골의 황위를 계승하려는 야심까지, 그 모든 게 볼로드의 의도대로라는 거야?”

“그럴 의도로 내가 고려에 가는 걸 도운 게 아닐까.”

“그렇다면, 어쩌면 저쪽도 저쪽 나름대로 「다이온 연방 창설 계획」과 비슷한 걸 세웠을 수도 있겠네.”

“충분히.”

리안은 팔짱을 끼고 생각에 잠긴다.

“볼로드가 그런 계획을 성공시켜서 거둘 수 있는 이익은 뭘까? 그리고 그건 카간의 의도와는 어떤 상관이 있을까? 대립하는 건 분명 아닐 거야. 어딘가에 두 사람의 이익과 의도가 합치되는 부분이 있으니, 카간도 볼로드를 계속 타이시로 기용하는 거겠지.”

“카간도 이번 관세동맹을 통해서 키타이와 낭키아스에 영향력을 확대할 생각인 걸까요? 더 나아가 두 나라를 합병한다든가.”

효윤의 추측에 리안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루우를 따라 칸발리크에 다녀온 후 효윤의 안목은 부쩍 높아졌다.

“카간도 두 형제를 견제하면서, 낭키아스와 키타이를 아예 식민화할 계획이라면, 볼로드의 구상을 반길만하지. 볼로드는 그 계획에 고려까지 끌어들이고 싶은 것 같지만, 문제는 볼로드의 계획 속에서 고려는 정확히 어떤 형태로 그려지고 있냐는 거야.”

리안의 말대로였다. 볼로드도, 루우도, 최종적으로는 키타이와 낭키아스를 아우르는 거대한 연방 체제를 구상했다면, 누가 그 주도권을 쥘 것인가 하는 문제가 남는다.

루우나 리안이야 말할 것도 없이 고려가 그 주도권을 쥐게 할 생각이다.

그러나 볼로드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루우가 몽골 카간의 자리를 계승하면 이 문제는 자연스럽게 해결되지만, 반대로 시레문 카간이 루우의 자리를 빼앗으려 들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다.

시레문은 이미 세계대전 종결 후에, 미승휴에게 고려 황위 계승의 야욕을 드러낸 적이 있다. ‘동군연합’이라는 구상은 루우의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아니다. 그건 원래 시레문의 것이었다.

“어쩌면 아버지는 지금도 내 남동생을 만들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몰라. 그 남동생으로 고려의 황위를 빼앗고, 다음 세대에 몽골과 고려가 다시 통합되는 걸 노리는 걸지도. 그게 본인이 직접 고려를 차지하는 것보단 안전한 방법일 테니까.”

효윤은 ‘너무 지나친 생각이 아닐까’라고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루우의 가정사다. 그 문제는 루우가 느끼는 그대로를 존중할 수밖에 없다. 카간은 분명 이번 관세동맹 협상에서도 협조적으로 나왔고, 딸인 루우를 많이 생각해주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루우가 그 진실성을 의심한다면, 거기에 반박할 구실은 다른 이들에겐 없었다.

“그 경우엔 시레문 카간이 네 어린 남동생의 섭정이라는 지위로 고려의 정치에 개입할 수도 있겠네.”

리안은 루우의 의견에 동조하는 듯 아닌 듯, 미묘한 어조로 말했다. 그녀에겐 루우의 아픈 이야기보다는 시나리오의 가능성이 더 중요했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견하가, 다시 고개를 들어 말을 던졌다. 누군가를 향했다기보다는 혼잣말에 가까웠다.

“볼로드가 루우, 시레문, 혹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 몽골의 황태자, 그 누구도 상관없다는 태도라면, 게레센제나 울제이를 지원할 가능성도 아예 없는 건 아닐 거야.”

리안도 이 의견에 동의했다.

“볼로드가 누구라도 좋다, 어쨌든 네 개의 나라를 통합할 수만 있으면 된다는 식이라면, 그것도 충분히 그럴싸한 가설이네.

키타이와 낭키아스가 통합된다 해도, 울제이와 게레센제 두 사람의 칸 자리까지 박탈하진 않을 거야. 칸발리크의 중앙정부에서 두 사람의 영향력은 어느 정도 유지되겠지. 그러면 둘 중 하나를 새로운 카간으로 옹립하는 방식도 얼마든지 가능해.”

“하지만 그 경우엔, 누나의 부담이 커져요.”

이번에는 견하의 시선이, 똑바로 리안에게 향했다.

“누구라도 좋다는 건, ‘같은 조건 하에서는’이라는 전제가 붙는다는 거죠. 그럼 그 ‘같은 조건’이 무엇이냐, 하는 점이 문제가 되는데……”

“볼로드가 새로운 제국의 타이시, 연방 행정부의 실세가 되는 조건 하에선, 누구라도 상관없다는 식으로 생각할 거라는 말이지.”

“……네.”

리안은 미소를 띤 채 눈을 잠시 감았다.

“나도 다이온 연방에서 그 비슷한 지위를 누리려고 하니까, 볼로드가 나와 같다면 그런 생각을 할 가능성이 크겠지. 나는 루우 외에 다른 황제 후보가 없는 게, 그와 나의 차이지만.”

“실제로 연방이 성립된다면, 아니 성립되기 전부터 볼로드는 누나와 대립각을 세울 거에요. 그건 지금 우리가 고려 내에서 벌이는 싸움보다는 확실히 큰 규모일 거고요.”

“연방을 만들기도 전부터 연방 내에서 내전이 터질 수도 있지. 내전이라는 거, 두 번 해보고 싶진 않은데 말이야.”

“미리미리 견제해서 누나 앞에 무릎을 꿇리거나, 제거하거나 해야겠죠.”

리안은 기지개를 켰다. 점심이 소화가 되는지 조금 나른했다. 잠깐 낮잠이라도 자야 할까.

“한 번 볼로드와 직접 대면해봐야겠어. 그래야 어떻게 대처할지도 답이 나올 거야. 외무장관이나 재무장관끼리 협상이 좀 마무리될 때가, 양국의 태사끼리 회담을 열기에 적절한 시점이겠지.

그때는 효윤이도 같이 가자. 가서 효윤이도 볼로드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라고.”

네, 하며 끄덕이는 효윤에게서 견하로, 견하에게서 다시 리안 쪽으로, 루우의 시선이 천천히 옮겨갔다. 그러고는 아랫입술을 조금 끌어올렸다가, 입을 열었다.

“태사는 내전의 승자고, 그래서 당당한 면모를 뽐낼 수 있지만, 몽골의 타이시는 아니야. 계속 누군가의 그늘 속에서 숨어서 성장해 온 남자지. 그건 태사의 정보는 노출됐지만, 볼로드는 자기를 감출 수 있다는 뜻이야.”

“외국에 있는 볼로드에게는 고려의 정보력이 미치기 힘들지. 안세규가 좀 더 협조적으로 나와줬으면 좋겠지만, 그도 그 나름대로 꿍꿍이가 있으니 그건 어렵겠고. ……일단은 주의해둘게.”

점심 식사는 끝났다.

루우는 한쪽 발은 의자 위로 올리고, 다른 발은 의자 아래로 대롱거리면서, 그 나이대 소녀다운 자세를 취했다.

황제로서의 업무는 잠깐 접어두고, 루우라는 소녀로서 휴식을 갖겠다는 신호였다.

훈련과 전투로 다져진 근육은 탄탄하고, 그 덕분에 몸매도 늘씬하다. 늘씬한 건 자신도 마찬가지지만, 아무래도 효윤이 더 키가 크다 보니까 맵시가 더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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