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돈획책(4)
“저 이익서라는 사람, 청년과 과장으로 삼으실 생각이세요, 선배?”
이익서가 나가자마자 유지나는 그렇게 물어왔다. 견하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 탐색 중이라는 말씀이시군요.”
소년감찰국이 감찰국으로 이름을 바꾸면서, 중등과도 소년과로 이름을 바꿨다. 그래서 소년과 과장이 된 유지나의 얼굴을 찬찬히 살피면서, 견하는 그녀의 말에 답했다.
“제1대학교라는 환경에 적응하고 청년과 조직을 만들 수 있을지부터 미지수야. 적응 자체에 실패할 수도 있어. 그때는 저 사람의 쓸모가 다한 셈이니, 다른 사람을 구해봐야지.”
안세규가 뿌리내린 대학생 조직이 얼마나 깊고 넓은지는 알 수 없다. 제1대학교 거의 전체가 안세규의 영향력 아래에 있을 수도 있다. 안세규 자신이 그 학교 출신이니까.
이익서의 능력으로는 상대도 되지 않을 가능성도, 생각해둬야 한다.
“그러니 한동안 ‘청년과’는 이름만 있는 조직이 될 거야. 조직원들이 들어와도, 또 한동안은 과장 없이 내 직속으로 둘 생각이야.”
“조직이 어느 정도 확장되거나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으면 이익서를 과장으로 임명하실 건가요?”
“그럴 수도 있지만, 음, 글쎄…….”
견하는 의문이 아직 남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답해줄 말을 정리했다.
“조직을 만드는 능력과, 이미 만들어진 조직을 운영하는 능력은 다르지 않을까, 나는 그걸 생각하고 있어.”
사람을 끌어모으는 능력과, 그걸 활용하는 능력은 다르다. 조직의 창설자와, 조직의 전성기를 이끄는 사람이 종종 다른 데에는 이런 이유가 있다.
“물론 사람을 끌어모을 수 있으면, 그 사람들을 활용할 안목이 있는 경우도 많지. 하지만 무턱대고 그럴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을 보내선 안 돼. 나는 아직 이익서에 대해 다 파악하지 못했어.”
최대한 위엄을 보이려 노력해봤지만, 상대는 성인이고 자신은 아직 고등학생에 불과하다. 견하도 몇 번 피바다를 헤치고 나왔지만, 상대도 그 정도 경험은 했을 터.
굳이 견하가 우위에 선 부분을 찾자면…… 몇 달 동안 중앙정치에 발끝 정도는 담근 것일까.
그러니까 인간 대 인간으로서, 자신이 상관으로서 이익서를 통제할 수 있을지 어떨지, 자신이 없다.
충성심을 살 자신이 없다면, 적절한 시점에 잘라내는 것이 옳다. 충성심이 없는 건 무능력한 것보다 나쁘다.
반대로 충성심만 있다면, 아무리 무능한 사람이라도 세심하게 조종하면 어느 정도 제 역할은 한다.
지나는 견하의 말에 대해 딱히 부정은 하지 않았다. 그저 음, 하면서 생각에 잠겼다.
“하긴 선배도 내년이면 대학생이 되니까, 청년과를 선배 직속으로 두는 게 맞을 수도 있겠네요.”
“그렇지.”
지나 말대로 내년에 청년과를 직접 통솔하려면, 청년과가 이익서의 조직이 되지 않도록 견제할 필요도 있다.
“선배의 의사는 그렇게 알고 있을게요. 그러면…… 이번 숙군 말인데요.”
견하는 지나의 말을 경청하겠다는 듯이 집중하는 눈빛을 보냈다.
“옛 천손민족협회 출신 직원들로, 천손민족협회 잔당들을 체포, 심문하게 한 건 좋은 시도였던 것 같아요.”
“좋지 않았다면 지금 이렇게 여유롭게 이야기는 못 했겠지. 계속해봐.”
“네. 반란군에 섞여 있던 천손민족협회 잔당, 그중에는 도주하던 걸 우리가 체포한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군부 측에 항복하거나 구금되어 있던 걸 넘겨받은 거거든요.
어쨌든 이런 사람들의 심문 과정에, 선배의 지시대로 천손민족협회 출신을 꼭 참여하게 했습니다. 그 결과, 자기들의 옛 정체성과 완전히, 성공적으로 결별하게 만든 것으로 보입니다.”
기대했던 대로의 결과가 나왔다. 견하는 흡족함을 담아 고개를 끄덕였다.
천손민족협회 잔당들은 배신한 옛 동지들을 향해 욕설을 퍼부었겠지. 그 배신이 타의든 자의든, 그건 상관없다. 그 자리에는 배신자와 의리를 지킨 자의 극한 대립만이 남는다.
배신자라는 비난을 받으면서, 천손민족협회 출신인 감찰국 직원들은, 비로소 자신들이 옛 조직에서 완전히 떨어져 나왔음을 실감한다. 그 순간, 그들은 연고지가 없는 사람이 된다.
물론 연고지가 없는 상태를 오래 견디는 사람은 드물다. 어떻게든 새로운 연고지, 터전을 마련하고자 한다. 새로운 정체성을 형성하려 한다.
가장 가깝고, 손쉬운 정체성이 그들 근처에 있다. 감찰국 국장 주견하의 충성스러운 직원이라는 정체성이.
“오히려 반감이나 원한을 품는…… 부작용은 없었을까?”
“직원 한 명 한 명, 깊숙한 마음속까지 들여다볼 수는 없겠지만, 있다 해도 자기합리화가 우선이 아닐까요?”
즉 그런 명령을 내린 주견하에 대한 증오를 품기 이전에,
그런 명령에 저항하지 못한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게 된다는 뜻이다.
나는 과거와 결별했다. 나는 지금 국가에 충성하는 감찰국 직원이다. 나는 동지들을 배신한 게 아니라 국가가 부여한 의무를 수행한 것뿐이다…… 라는 식으로.
“너도 안목이 꽤 높아졌구나.”
견하의 칭찬에 지나는 헤헤 웃었다. 오랜만에 보는 소녀다운 웃음이다.
“누구 밑에서 배우는데요.”
“좋아. 직원들이 감찰국 직원이라는 정체성을 갖추기 시작했다면, 어쨌든 그건 긍정적인 신호야. 천손민족협회 출신인 직원과, 그렇지 않은 직원들 사이의 골도 없앨 수 있겠지. 감찰국은 태사께 절대적으로 충성하는 통일된 조직으로 완성돼야 해.”
거기까지 말하고, 견하는 문득 어딘가에 생각이 미쳤는지 미소지었다.
“일주일 정도, 유지나 과장에겐 휴가를 줄게.”
“드디어?”
그렇게 말하는 지나의 눈빛이 반짝였다.
“음, 그렇지만 안전 문제가 있으니까 휴가 중에도 총기를 항상 휴대하도록. 나와의 연락 수단도 유지하고. 휴가 중이라고 해도 수상한 자를 사살할 권리는 인정해 줄 테니까, 그건 안심해. 자신의 안전을 최우선시하도록.”
지나는 아주 잠깐, 그게 개인적인 걱정일지, 아니면 조직 간부를 아끼는 마음일지 생각했다. 하지만 곧 아무렴 어떠냐는 결론에 이르렀다.
“네!”
그렇게 답하며, 장난스레 경례했다.
***
양수영은 소년, 한재연의 등을 본다.
잠깐 기지개를 켜거나 화장실에 다녀오는 걸 제외하면, 거의 몇 시간 째 집필에 몰두하고 있다.
책상 위에 쌓인 각종 서류나 책은, 주견하의 책상 위에 쌓인 것 이상이다. 미친 듯이 읽고, 메모하고, 메모한 걸 정리하고, 종합하고, 글로 쓴다.
그 글을 다시 종합하고, 편집하고, 더 긴 글로 엮는다. 그런 과정이 무수히 반복된다.
수영은 재연의 등 뒤로 다가섰다. 두 팔로 어깨 위를 감싸고, 목덜미에 얼굴을 묻는다. 소년의 나른한 향기가 눈을 감게 한다.
그러나 수영은 눈을 뜨고, 소년이 집필 중인 글을 내려다봤다.
“「다이온 연방 창설 계획」을 보강하는 이론이야?”
“……그래.”
재연의 짧은 대답은 어째서인지, 수영에게 조금 짜증이 치밀게 했다.
“나, 옛날 동지였던 사람한테 방아쇠를 당겼어.”
불과 며칠 전에 있었던 일이다.
천손민족협회는 방대한 조직이었기 때문에, 같은 조직에 소속되어 있을 뿐 얼굴도 모르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수영은 아는 사람과 마주쳤다.
눈을 가린 채, 무릎 꿇려 있던 옛 동지들.
유용한 정보를 가진 한 사람에게 공포를 심어주기 위해, 권총을 들고, 별로 유용하지 않은 것으로 판정된 사람의 머리를 쏴야 했다.
아니, 실상은…… 자신이 황제의 충성스러운 신민이라는 걸 입증하기 위해.
“그런 일을 겪었는데…… 이게 우리한테 무슨 소용이 있길래 그렇게 열심인 거야?”
만년필의 움직임이 멈췄다.
재연은 몸을 일으켰고, 수영은 팔을 풀었다.
재연은 몸을 돌려 수영을 똑바로 바라봤다.
“나를 살리기 위해서였지?”
재연의 물음에, 수영은 울 것 같은 얼굴이 됐다.
“나도 널 살려야 해. 이건…… 그 가장 확실한 방법이야.”
황제가 원하는 이론. 황제에게 유용한 이론. 그걸 세운 이론가는 황제에게 유용한 사람이 된다.
유용한 사람의 충성심을 유지하기 위해, 황제는 유용한 사람의 소중한 이를 보호해 줄 수 있다.
“그뿐만이 아니야.”
재연은 종이 한 장을 집어 들었다. ‘알타이 민족’에 대한 서술 부분이었다. 범 알타이 인민동맹에서 발간한 각종 연구들을 기반으로, 재연이 따로 수집한 고려 내 연구들을 조합했다. 거기에 재연의 독자적인 이론도 섞는 중이다.
유사 과학적인 주장이라도 쓸모가 있다면 거침없이 가져다 썼다. 말만 된다면, 그걸로 충분했으니까.
“좋든 싫든, 우리는 이제 천손민족협회의 회원이 아니야.”
수영은 재연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소녀 같을 정도로 청초한 미소년. 그 얼굴이……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의 마음속 상처를 드러낸다.
신념, 자존심, 그런 것들을 전부 강제로 잘라낸 사람의 얼굴이다.
“우리는 감찰국 직원으로 살아가야 해.”
수영이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재연은 덧붙였다.
“태사의 부하들이자, 고려 제3제국 황제 폐하의 신민으로 살아가야 하고.”
“그건…… 나도 알아.”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재연은 쓰게 웃었다.
“고려 민족의 이상, 허동주의 이상은 이제 사라졌어.”
수영은 숨을 삼켰다. 허동주는…… 그에겐 아버지 같은 것이었음을 알기에.
“우리는 우리가 의지할, 새로운 이상이 필요해.”
마치 이제는 아버지에게서 독립할 때가 됐다는 듯한 어조였다.
“‘알타이 민족’이라는 개념은, 방황하는 동지들에겐 버팀목이 되어 줄 거야.”
허동주의 이상이 비어버린 자리. 그 공허한 마음의 틈새를, 재연은 자신의 새로운 이론으로 메울 생각이다.
“우리가 살아가려면 그런 게 필요해.”
쓴웃음에, 조금 힘이 들어갔다.
“황제도, 견하도, 이상은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다고 했지. 내가, 우리가 꿈꾸던 이상 역시 허동주의 도구에 불과했다고 하고.
그래, 어쩌면 그 말이 진실일지도 몰라. 우리는 허동주와 미리안의 권력 놀음에 놀아난 불쌍한 백성들에 불과할 수도 있지. 하지만 말이야.”
말에 들어간 힘이, 점점 강해진다. 그래, 수영이 멋있다고 생각했던, 그 이론가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있다.
“그대로 당하진 않을 거야. 견하가 무력으로 이상을 짓밟는다면, 나는 이상이 몇 번이고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말과 글의 힘을 보여줄 거야. 무력마저도 범접할 수 없는, 죽여도 죽지 않는 이데올로기의 힘을 보여줄 거야.”
소년의 볼이 소녀의 볼에 와 닿는다.
수영은 자신의 볼이 너무 축축한 건 아닐까, 그런 걱정을 했다.
“알타이 민족이라는 개념은 관세동맹을 지지할 거야. 그리고 다이온 연방을 만들 거고. 이 이데올로기는 정치를 지배할 거야. 나는 그걸 주견하에게 보여주겠어. 그리고 우리가 이런 방식으로도 살아남을 수 있다는 걸 보여주겠어.”
수영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허동주가 아니라 한재연이 그녀의 신이었기에, 마치 고해하는 듯한 마음으로.
너비아니, 잘 익은 배추김치, 콩나물무침, 흰 쌀밥. 너비아니는 그 자체로 한입 물면 육즙과 살짝 달큰한 양념이 배어난다. 여기에 변화를 주려면 배추김치 한 조각을 올려 먹어도 좋고, 콩나물무침으로 고기를 말아 고소한 향을 즐겨도 좋다.